원래 변화를 거부하고 구체제를 지키는 것이 보수(保守)의 생리인데 지금은 진보는 물론 보수 세력도, 여도 야도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 이제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를 이뤄 새 미래를 열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리키는 대한민국호의 미래는 무척 다르다. 여전히 "어떤 변화인가"가 문제로 되고 있다.
지난 시기 산업화와 민주화라고 하는 근대화 이중혁명의 관문을 모두 통과한 대한민국의 성취는 매우 크고 충분히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이 후발 압축 이중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노동자, 서민과 국민 대중은 얼마나 큰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가. 그러나 그 다음 관문, 즉 87년식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사회경제적 민주화 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증진을 양 날개로 하는 민생 민주화로 가는 과제 앞에서 우리는 좌절했고, 그래서 표류하게 됐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역사적 진화 경로는 매우 유별난 구석이 있다. 지난 시기 권위주의적 개발체제는 고도로 집단적인 협력자본주의 특성이라든가 온실적 보호를 넘어 개방 이익과 보호를 결합한 역동성이라든가 하는 면에서 거대한 성장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 발전모델에서는 권위주의 정권과 독점재벌이 폐쇄적인 지배연합을 이뤘고 이를 감시· 견제하는 힘은 억압당했다. 또 이 모델은 성장을 최우선가치로 삼아 비용은 사회화하면서도 이익은 주로 재벌이 차지하는 분배의 불공정에서 심각한 모순을 내장하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재벌독식 공화국과 두 국민 분열을 초래한 한국 보수 세력의 첫 번째 역사적 책임이다.
87년 정치적 민주화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 과제 그리고 세계화 추세라는 내외의 압력을 동시에 받게 됐는데 김영삼 정부는 이 두 압력에 전혀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했다. 터무니없이 '세계화'를 국정기조로 내세운 이 정부의 말기는 재벌에 발목 잡힌 채(삼성의 편법세습을 포함해)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하고 마침내 외환위기를 부르는 비극적 사태로 결말이 났다. 이것이 보수 세력의 두 번째 책임이다.
보수정부의 다음 바통은 '경제를 살리겠다', '부자 되세요' 구호를 내 걸고 집권한 이명박 정부로 넘겨졌다. CEO출신 이명박이 이끈 현 정부는 부자 감세와 친재벌 규제완화 등 온갖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움) 정책과 4대 강 사업을 통해 한국현대사상 재벌 독식, 토건 삽질과 두 국민 분열을 가장 저돌적으로 밀어붙인 '강부자' 정권이 되었고 민생과 서민경제를 파탄 지경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미 FTA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한국 보수 세력이 저지른 세 번째 책임이다. 그리고 이런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해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이 공동책임을 지고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97년 이후 10년을 책임졌던 민주개혁 정부도 오늘의 재벌 독식체제와 두 국민 분열상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97년 외환위기가 발발하고 그로 인해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아래 놓이게 된 것은 김영삼 보수정부가 떠넘긴 것이고 김대중 정부의 책임은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김대중 정부가 IMF 프로그램을 초과 달성했다 할 정도로 경제적 자유화와 시장화를 추구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IMF위기를 조기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약한 민주주의의 깃발은 재벌독식 시장경제의 지배력에 꺾였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금융 및 부동산 시장의 자유화로 민생은 고달파지고 국민 대중의 삶의 미래는 매우 불안해 졌다.
원래 한국경제는 기본 체질상 복지가 취약하며 이를 고성장과 지속적 일자리 창출로 만회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복지 지출을 좀 늘렸다고 해도 그것으로 일자리가 대량 파괴되고 몹쓸 일자리가 양산될 뿐 더러 성장도 감속되는 사태를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노동자, 서민 대중, 중산층의 고통으로 안겨졌다. 그리하여 김대중 정부 시기 한국 사회경제는 노동, 토지 주택, 그리고 금융이 시장화됨으로써 민생의 살림터전이 파괴된 '폴라니적 모순'에 빠지게 됐다. 이것이 민주개혁정부가 오늘의 재벌독식과 양극화 상황에 대해 지고 있는 첫 번째 책임이다.
그런데 민주개혁 정부에 큰 애정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종종 김대중 정부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 더 비판적임을 보게 된다. 김대중 정부의 실정 중에는 김영삼 정부가 떠안긴 부분이 크지만 그에 비해 노무현 정부는 너무 무력하게 '권력을 시장에', 재벌에 넘겨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보수 정권이 해야 할 일인 한미 FTA를 임기 말 최대의 국정과제로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도 노무현 정부였다. 참여정부 말기는 거의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 세력이 합심해서 진보·노동세력을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정권 바통이 이명박 정부에 넘어간 것은 참여정부의 책임이 크다. 이것이 민주개혁정부가 오늘의 고통스런 상황에 대해 지고 있는 두 번째 책임이다. 결국 민주개혁 정부 또한 세계화와 시장의 시대가 제기한 도전에 적절히 응답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본다면, 지금 자신들과 대한민국의 미래 명운을 걸고 다투고 있는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모두 어쩔 수없이 '과거 부채'를 물려받은 채, 미래 변화 그리고 국민 통합, 민생 살리기를 외치고 있는 형편이라 하겠다. 물론 민주개혁 세력의 입장에서는 보수 세력에 훨씬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또 이미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 정부가 심판받았으므로 이번에는 이명박 정부가 심판받는 것이 순리라고 말할 것이다. 더욱이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정부 실패에 대해 공동 책임을 져야 마땅한 당사자가 아닌가.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여하튼간에 이쪽저쪽 과거 실패들이 '톱니효과'처럼 경로의존적으로 쌓인 결과 87년 민주화이후 '물탄 민주주의' 세월을 보낸 오늘, 대한민국은 민생 문제 또는 이른바 '사회 문제'가 가히 폭발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의 두 바퀴로 가는 민생 민주주의야말로 재벌독식 정글자본주의를 넘어, 두 국민 분열의 대한민국(two nations)을 넘어, 함께 사는 통합(one nation)의 대한민국으로 가는 최대, 최고의 시대정신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민생민주 공화국으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공화국의 새로운 시민은 정치적 시민일 뿐 아니라 '사회적 시민'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것이 변화하라, 그리고 통합하라는 시대명령 앞에 보수 (保守)세력도 나름대로 보수(補修)를 도모하고 민주개혁 세력도 진보를 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까닭이다.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공동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차별화를 시도하며, 심지어 '빨갱이'색을 자신들의 상징 색으로 도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들이 자신들의 본색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변화, 통합, 민생, 그리고 미래 등에는 생리상 여전히 변화보다는 지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들의 대안은 어디까지나 시장보수, 성장 보수, 재벌보수가 중심 기둥이며 여기에 민생은 끼워 넣기 모양새로 되어 있다.
만약 그들이 난파하고 있던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김종인씨를 새로 영입했던 초기의 쇄신 정신을 그대로 밀고 갔더라면 아마 '개혁적 보수'로 거듭났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랬더라면 한국의 보수는 제법 '큰 보수'로, 위협적인 미래 보수 세력으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총선 승리에 도취되고 다시 오만해져 중도에 그 길을 포기하고 옹색한 보수로 되돌아갔다. 이는 현 정부에서 총리까지 지냈던 정운찬 같은 이가 문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걸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 결과 박근혜 후보는 너무 태연자약하게 '줄푸세'는 여전히 유효하며 경제 민주화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친재벌 신자유주의 양극화 정책의 대명사이면서 민생과 서민경제를 파탄시킨 바로 그 정책이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민주화 정책과 같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박근혜 후보가 얼마나 과거에 붙들려 있고 반성할 줄 모르는지를 이토록 잘 웅변해주는 대목이 있을까. 김종인표 경제민주화 정책을 내친 후 내 놓은 경제성장과 경제민주화의 '투트랙'론이 어떨지 알만하지 않은가.
ⓒ프레시안(최형락) |
나는 박근혜 후보가 이끄는 보수 세력이 명실상부한 '개혁적 보수'로 새로 거듭나지 못하고 줄푸세 보수와 성장 보수, 재벌 보수, 기득권 보수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 구체제를 지키는 '수구적 보수'를 중심에 놓고 미사여구로 변화와 미래, 민생과 통합을 외치고 있는 것은 확실히 그들의 자충수라는 생각을 한다. 거꾸로 그것은 민주 진보세력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세력은 여전히 힘이 세다. 결집력과 대중의 충성도도 대단히 높다. 상당수 국민들은 여전히 성장주도 능력과 위기관리 능력 부분에서 박 후보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폴라니가 말했듯이, 역사적으로 경제 위기 상황에서 대중들은 흔히 보수, 심지어 파시즘의 선동에 넘어가기도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특히 위기 국면에서 보수의 자충수를 기회로 포착해 국민 대중을 민생민주연합으로 불러낼 수 있는 민주 진보세력의 저변 넓은 소통과 공감의 능력, 대안 구성의 능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는 대선 승리뿐만 아니라 집권 후 '전환의 계곡'에서 재벌과 모피아, 국제금융자본의 사보타지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보수대연합이냐 민주민생 대연합이냐, 과거로 역주행이냐 미래로 전진이냐, 이는 저쪽의 실수가 아니라 전적으로 이쪽의 정치적 능력 여하에 달려 있다.
민주개혁 세력의 대선후보 문재인은 민주당의 틀 안에서는 변화하라는 시대정신에 가장 잘 부응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비좁고 낡은 민주통합당의 틀을 깨야 할 뿐더러 무엇보다 '노무현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그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다. 늦긴 했지만 문재인은 중도 부동층과 2030세대, 노동계층에까지 폭넓게 호소하는 '문-안-심 연대'를 구성했다. 그리고 국민 연대의 후보로도 추대되었다. 그는 과연 민생민주 공화국과 이 공화국의 새로운 시민을 위해 새 문을 여는 지도자, 민생 경제와 참여민주주의가 상생하는 '시민정부' 시대의 문을 열어젖히는 첫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산업화와 민주화이후, 87년식 민주주의를 넘어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다시 2012년 12월 대한민국 대선의 여신은 누구의 약속에 미소를 보내줄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온 몸을 내던져 '박차고 문여는' 문후보의 막판 스퍼트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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