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3일 19시 24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R&D팀 ㅇ주임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가 쓴 원고가 잘못됐으니 수정하라는 내용이었다. 글을 작성한 나에게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고, 내 글을 '오류'라고 단정하며 '해당 내용을 지워'달라고 했다. 2018 세계문화예술교육주간 유관학회 세미나를 3일 앞둔 시기라 자료집 인쇄 예상까지 하고 '가운데 취소선을 긋는 방식으로 수정'하라는 구체적이고 친절한(?) 지시까지 내렸다.
섬뜩하면서도 화가 났다. 학회에 제출한 세미나 발제자료 10여 쪽 분량의 글을 진흥원 직원이 이렇게 꼼꼼히 읽어보며 검열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로 그 난리를 피웠던 박근혜 정부 하에서도 나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세미나를 겨우 3일 앞두고, 메일과 전화로 강요할 정도로 진흥원이 여전히 예술가들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글은 해당 지역의 조례에 나온 기구의 본 명칭을 그대로 쓴 것이기 때문에, 진흥원에서 틀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진흥원이 틀렸다라고 판단한다면 해당 지자체의 의원들에게 찾아가서 조례를 개정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흥원 직원은 며칠동안 나와 학회 사무국을 괴롭혔지만 나는 글을 수정하지 않았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이를 지시했을 본부장과 팀장이 징계를 받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검열이 계속되는 이유는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열과 사업배제 등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이 여전히 요직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진흥원은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서 TF를 꾸렸지만,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결과도 공개하지 않았다. 2016년 복지기관예술강사들이 대거 해고되었던 일, 진흥원 임원이 연구사업심사에서 지원자의 국회토론회 발언을 문제삼았던 일, 자격이 없는 심사위원이 계속 심사를 맡고 있는 일 등에 대해 문제제기했지만 TF는 피해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았다. 진흥원 직원의 말만 듣고 어영부영 조사를 마치며 면죄부를 주었다.
블랙리스트와 연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원은 여전히 기존강사를 잘라내고 계약갱신을 부정하는 2019 복지기관예술강사 지원공고를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 때 연구를 수주했던 사람들은 이 정부 들어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자격이 없는 심사위원은 여전히 몇 년째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바로잡힐 줄 알았던 우리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9월 13일 문체부가 발표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책임규명 권고 이행계획'은 진흥원TF 결과와 같은 선상으로 이해된다. 문체부는 진상조사위원회의 그간 활동을 전면 부정하고, 징계 0명으로 발표하며 스스로 면죄부를 주었다. 다 처벌하면 누가 일을 하냐는 문체부 장관의 황당한 발언에 이르러서는, 적폐와 손잡았다는 표현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공교롭게도 9월 13일은 문체부가 19년간 상시지속 직종인 예술강사의 무기계약 전환 부결을 결정한 날이기도 하다. 문체부의 기습적인 발표와 결정에 헛웃음마저 나왔다. 우리는 끝나지 않은 검열과 적폐에 다시 맞서려고 한다. 우리는 11월 3일 다시 거리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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