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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섬진강, 만경강이 여기서 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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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금강, 섬진강, 만경강이 여기서 발원하다

2018년 11월 고을학교는 <진안고을>

황홀한 가을의 막바지 1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1강은 호남의 젖줄인 금강, 섬진강, 만경강의 발원지이고, 호남을 반역향(叛逆鄕)으로 만들며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원인이 된 ‘정여립모반사건’의 현장인 진안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진안고을의 상징 마이산Ⓒ진안군

고을학교 제61강은 2018년 11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1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금산IC-주천면(운일암,반일암/와룡암/주천서원)-용담면(태고정/용담댐/전망대휴게소)-안천면(화산서원)-동향면(어서각/용담서원/죽도)-진안읍(점심/진안향교/진안객사터)-수선루-마이산(남부주차장/이산묘/금당사/탑영제/탑사)-진안IC-서울의 순입니다.

▲<진안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1강 답사지인 <진안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금강, 섬진강, 만경강의 발원지
진안은 전북의 동부 산악권에 위치하고 동쪽으로 무주와 장수, 남쪽으로 장수와 임실, 서쪽으로 완주, 북쪽으로 충남 금산이 인접하여 있습니다. 진안고원은 동쪽으로 대덕산, 덕유산, 백운산 등 높은 연봉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운장산, 부귀산, 만덕산으로 이어지는 연봉과 경계 지어지는 해발 350∼500m의 고원으로, ‘호남의 지붕’이라고도 하며 금강, 섬진강, 만경강 등이 여기에서 발원합니다.

진안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상의 장안산에서 뻗어나온 겹침 산줄기인 금남호남정맥이 지나가며 남북 방향으로 이어지는 두 갈래의 주요 산봉우리들이 진안군의 서쪽 경계와 동쪽 경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서쪽 경계는 운장산, 보룡고개, 모래재, 곰티재, 만덕산, 성수산, 방미산으로 이어지고 동쪽 경계는 지장산, 국사봉, 영구산, 천반산, 방고개, 깃대봉, 팔공산으로 이어지는데, 동쪽 산지가 서쪽 산지보다 대체로 고도가 높은 편입니다.

진안의 물줄기는 ‘호남의 지붕’인 진안고원에서 발원한 금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로 나눠지는데,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진안군을 거쳐 북류한 다음 충남, 충북, 대전, 전북을 지나 서해로 흘러가는데, 주자천, 정자천, 진안천, 구량천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입니다.

섬진강은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자락의 깃대봉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북서 방향으로 흐르다가 마령면 강정리에서 금강과 반대 방향인 남서쪽으로 흘러나갑니다.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계는 진안 읍내 서남쪽, 전주와 진안을 연결하는 도로 상의 활인동 고개이며 섬진강은 전북 임실과 순창을 지나 전남, 경남의 경계를 이루며 남해 광양만으로 흘러듭니다.

▲마이산의 돌탑무리Ⓒ진안군

진안의 상징 마이산
진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마이산은 동봉(수마이산 678m)과 서봉(암마이산 685m)의 두 암봉이 마치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남쪽 사면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북쪽 사면에서는 금강 수계가 각각 발원하고 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는 용출산, 조선 때는 마이산이라 불렀는데 오행의 금행(金行)을 묶은 듯하다고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부릅니다.

마이산 은수사는 이성계가 임실군의 성수산서 돌아오다가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상원사라 했고, 숙종 무렵에는 상원사는 없어지고 이후 폐사지에 누군가 암자를 지어 정명암(正明庵)이라 했으며 ‘정(正)’은 5획으로 오행, ‘명(明)’은 일월이므로 정명암 이름은 음양오행의 순환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은수사에는 줄사철군락, 청실배나무 등 두 종류의 천연기념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춘향전>에 이도령이 춘향이 집을 찾아가 첫날밤을 치르기 전에 월매가 내온 주안상에 올라온 과일 중의 하나가 ‘청슬이’ ‘청술레’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청실배(靑實梨)입니다.

마이산 탑사는 이갑룡이 25세 되던 해,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암울한 시기에 마이산에 입산하여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솔잎을 생식하며 기도로 탑을 쌓기 시작하여 천지탑, 오방탑, 월광탑, 일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80여 기의 자연석 돌탑들을 남기고 9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이산 동쪽 수봉우리의 암벽에는 화암굴이 있으며 암굴 안에는 물이 솟아나는데 예로부터 이 물을 마시고 산신에게 빌면 득남한다 하며 탑사 아래에 있는 탑영제는 맑은 날에는 마이산이 거울처럼 비치는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호수입니다.

화양산(華陽山)은 1919년 수당 이덕응이 천, 지, 인(天地人) 삼극을 모시고 순종의 윤허를 받아 황단(皇壇)을 세우고 천극(옥상황제), 지극(공자), 인극(고종황제) 등 삼위에 매년 8월 그믐 정오에 황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던 곳입니다.

이덕응은 궁내부 판임관으로 황실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인물로 한일합병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주천 대불리에 화양도원(華陽道院)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던 중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상복차림으로 화양산에 올라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자들과 더불어 삼년 동안 망곡하였습니다.

또한 날로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고자 화양봉, 선암봉, 제천봉, 천황봉, 두문봉, 파초봉, 유제봉 등 7개소에 황단을 설치하기를 상소하자 순종이 윤허하고 고종황제 어진을 하사하며 삼극사(三極使)로 임명하였고 1922년 13도 도강장으로 임명받아 전국을 순방하며 교육을 통하여 신유교부흥과 항일사상을 앙양하니 후학이 전라, 충청, 경상에 3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운일암, 반일암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길이 없어 하늘과 돌 그리고 나무만 있을 뿐, 오가는 것은 오직 구름밖에 없다 하여 운일암(雲日岩)이라 하였다 하는데, 전라감영인 전주와 용담현 사이에 가장 가까운 통로는 이 길뿐인데 길이 어찌나 험하던지 공물을 지고 가다보면 얼마 가지 못하고 해가 떨어진다 하여 떨어질 운(隕)자를 써 운일암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하루 중에 햇빛을 반나절밖에 볼 수 없다 하여 반일암(反日岩)이라고도 불렸다 합니다.

진안에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산성과 조선시대의 봉수대가 남아 있습니다.

환미산성은 가치마을에서 정천으로 넘어 가는 노래재[歌峙] 정상의 우측 산 계곡을 돌로 에워싼 포곡식 석성으로 축성 연대는 미상이고 약 150m 가량의 성벽이 있는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무너졌으며 성내에는 비상시를 대비한 양식 구덩이 등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합미산성은 강정마을 맞은편 봉우리에 축성된 성으로 북쪽에 월운마을이 있으며 성은 북서쪽 계곡에서 남동쪽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되어져 있는데 남서, 북동 성벽은 대부분 파괴 되었고 남동쪽은 높이 약 4.5m, 길이 약 70여m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성의 전체 길이는 약 600m 정도로 보입니다. 성 안에는 무수한 기와편과 삼국시대 토기편을 수습한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평봉수대는 천연의 암석위에 잡석으로 쌓아올린 석축으로 임진왜란 이후 1595년(선조 28)에 태평산성과 전주감영에 신호를 보내기 위하여 세웠다고 하는데 남쪽의 대부분과 서쪽 일부의 벽은 무너졌으나 나머지는 거의 완전하며 가운데는 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도보, 말, 교자(轎子)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마필(馬匹)과 역정(役丁)을 갖춘 역(驛)을 두어 공무여행자에게는 소정의 편의를 제공하였고 진상관물의 수송을 담당하였는데 고려 때에는 520개, 조선시대에는 540개가 있었습니다.

진안에는 고려시대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전주-진안-장수로 연결되는 단령역과 금산-용담-진안으로 연결하는 달계역, 두 곳으로 모두 금산 제원 도찰방 속역이었습니다. 단령역은 진안읍 단양리에 있었고 달계역은 용담면 월계리에 있었습니다.

▲마이산의 안뜰 같은 사찰 은수사Ⓒ진안군

조선시대 진안현이 되다
진안은 삼국시대 백제의 난진아현으로 완산주 99현 가운데 한 현으로 월랑이라고도 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757년 진안으로 개칭하여 장계군의 속현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전주의 속현으로 감무를 두었으며 1391년(공양왕 3) 월랑현으로 현령을 두어 마령현까지 겸무토록 하였습니다. 조선시대는 1413년(태종 13)에 마령현을 통폐합하고 진안현으로 개칭하여 현감을 두었고 1895년(고종 32) 진안군으로 개칭하여 군수를 두었습니다. 1896년 남원부 진안군이 되었다가 1914년 용담군과 합병하여, 오늘의 진안군이 되어 11개 면을 관할하고 있습니다.

진안에는 진안과 용담에 읍치구역이 있었으며 진안관아는 진안군청 자리에, 용담관아는 용담면사무소 자리에 있었습니다.

진안객사는 지금의 진안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중앙은 군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정청을 두어 삭망과 나라의 애경사 시에는 수령이 이민(吏民)을 대동하여 망배하였으며 동쪽을 동대청, 서쪽은 서대청이라 하여 구빈 접대 처소를 두었습니다.

진안향교는 1414년(태종 14)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향안당, 서재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용담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되고 1391년(공양왕 3)에 현령 최자비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남은 건물을 그 이듬해 박지술이 동쪽으로 약간 옮겨지었고 1633년(인조 11)에 현령 오전이 중건하였으며 1664년(현종 5)에 현령 홍석이 개축하였는데 원래는 용강산 남쪽 기슭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습니다.

진안에는 사립교육시설로 화산서원, 주천서원, 와룡앙, 지선당이 남아 있습니다.

▲용담호는 금강 상류에 생긴 인공호수로, 주변에 태고정·화산서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진안군

방촌 황희 모신 화산서원
화산서원은 방촌 황희의 영정을 안치하고 자손인 황보신, 황발 등을 배향하고 있는 장수황씨 사당이자 서원입니다. 강당에 있는 현판들의 기록에 의하면, 192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970년 중수되었습니다. 방촌 영정은 1474년(세종 6) 황희의 나이 62세 때의 초상으로 원래는 경북 상주군 모동 수봉리에 위치한 옥동서원에 봉안되었는데 1844년 복제하여 나누어 받아 화산서원 관리인이 보관해 오다가 1927년 화산서원이 건립되자 화산서원에 보관하였습니다.

주천서원은 본래 광산김씨의 사당으로 1924년 김대현이 전국의 사우와 유림을 방문하여 협조를 구하여 광산김씨 문중에서 주천사를 창건하였다가 1975년 성균관장의 인준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어 주자, 여대림, 주잠, 이황, 이이, 이충립, 김중정 등 7명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와룡암은 원래 1654년(효종 5)에 긍구당 김중정의 개인서당으로 건립되었는데 김중정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조부 김충립과 함께 1637년 36살 때에 주천에 들어와 은거하였고, 53세에 와룡암을 세워 후진의 교육에 힘썼는데, 원래의 와룡암은 내 건너편에 있었으나 내왕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1827년(순조 27)에 김상원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합니다.

지선당은 반남박씨의 재각 겸 서당으로 입향조인 박지영의 뜻을 기리고 문중 자제들과 이 지방의 후학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후손들이 창건하였는데 박상탁의 <지선당기>에 쓰여 있는 ‘숭정3임진(崇禎三壬辰)’으로 보아 1772년(영조 48)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지영의 선대는 원래는 금산에서 세거하였는데 지영이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내금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이 지방에 후손들이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산묘는 조선 태조의 꿈 이야기가 전하며 호남지방 최초의 '의병창의동맹지'이기도 하다.Ⓒ진안군

진안의 사당과 정자들
진안에는 이산묘, 인현묘, 쌍충단, 옥천사의 사당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산묘는 태조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장차 삼한의 강토를 재라는 금척을 주었는데,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하는 길에 들린 이산의 경치가 꿈에 금척을 받았던 자리와 흡사해 속금산(束金山)이라 하였으며, 이후 이곳에 연재 송병선이 고을의 선비들과 용암에 이름을 새겼고, 면암 최익현이 쌍계수석이라는 표제를 남겼으며 호남지방 최초의 '의병창의동맹지'입니다.

연재와 면암을 흠앙하는 선비들은 1924년 존현의 의의를 살린다는 뜻으로 석벽에 ‘주필대’라는 글자를 새겼고, 같은 해 유림회의 때 오채열의 발의로 마이산에 사당을 짓고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자고 뜻을 모았고 전국의 향교, 서원에 통고하여 1925년 주필대의 서쪽에 회덕전을 지어 이산정사와 태조의 제향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1946년 완공된 회덕전에는 단군성조와 세종대왕을 추가로 모시고, 그 아래 동서의 두 사우를 지어 동쪽의 영모사에는 조선개국 이래의 명유 40위를 모시고 서쪽 영광사에는 연재, 면암과 순국선열 34위를 모셨으며, 일제의 훼철로 전주 건지산에 임시 봉안되어 있던 고종의 위판을 1948년에 옮겨 왔습니다.

이산묘에는 이시영 부통령의 친필현판이 외삼문에 걸려있고 독립기념비각에는 이승만대통령의 휘호로 된 '대한광복기념비'가 새겨있고 백범 김구의 '청구일월대한건곤(靑丘日月大韓乾坤)'이라는 글귀가 은선동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인현묘(仁賢廟)는 1926~28년경에 세워진 기자의 사당인데, 원래 평양의 인현서원에 모셨던 기자영정이 갑오병란 때 서원이 불타버려 그 영정을 서울 청주한씨 종약소에 봉안하였으나 1935년 가을 종약소가 해체되므로 기자영정을 향사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며 해마다 동짓달 축일에 재향을 올린다고 합니다.

중앙의 벽에 '태조문성대왕기자(太祖文成大王箕子)'의 화상과 위패가 모셔져 있고 측면의 벽에는 '후조선왕위휘호세계병정치사(後朝鮮王位諱號世系竝政治史)' '무진년제관분정기(戊辰年祭官分定記)' 등이 붙어 있습니다.

쌍충단(雙忠壇)은 1923년 설단 되어 송당 전자온, 죽헌 전자양을 제향하고 있는데 송당, 죽헌 형제는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였고 송당은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습니다. 두 형제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을 때 이의 부당함을 논한 죄로 폄출되었다가 단종이 사사되자 서강 청령포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으며 영산사와 이산묘에 배향되었습니다.

옥천사(玉川祠)는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하양지에 있는 창녕성씨 관련 유적으로 성여완을 주벽으로 하고, 입향조인 성석린과 성계종을 배향하고 있으며 어서각(御書閣)에는 1402년(태종 2)에 성석린에게 내려진 어서를 보관하고 있는데 같은 마을에 성석태의 정려와 재각인 승유재(丞裕齋)가 있습니다.

진안에는 수선루, 영모정, 태고정의 정자가 남아 있습니다.

수선루는 섬진강 천변의 산기슭에 자연암굴을 이용하여 2층으로 세워져 있는데 1686년(숙종 12) 진유, 명유, 철유, 서유 등 4형제가 건립하였으며 1888년(고종 21) 연재 송병선 등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선루'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이 이들 4형제가 갈건포의하며, 팔순이 되도록 조석으로 다니며 풍류함이 진나라 말년에 전란을 피하여 협서성의 상산에 은거한 동원공, 하황공, 용리선생, 기리수 등의 기상과 같다하여 명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영모정은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1869년(고종 6) 세워졌으며 누정의 남쪽 내부 중앙에는 영모정과는 달리 영벽정(永碧樓)이라고 쓰인 현판과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지낸 윤성진이 지은 상량문이 걸려 있습니다.

태고정은 원래 주자천변의 절벽 위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태고정이 있던 자리엔 15세기 말경 현령 조정이 지은 이락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으나 1666년(현종 7) 당시의 현령 홍석이 크게 고쳐 짓고 이름도 태고정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홍석은 용담향교를 개축하고 삼천서원을 창건했던 인물이며 태고정에는 송준길이 쓴 태고정 현판과 송시열이 쓴 용담현태고정기의 현판이 있습니다.

진안에는 중요한 근대건축물인 전영표가옥과 진안성당 어은공소가 남아 있습니다.

전영표가옥은 근대 한국 농촌지역에 희소한 2층집으로 당시의 이 지역 민간 목수의 기술과 역할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건축물입니다. 당시 상업지역에 2층 상가들이 한옥형식이든 일본식이든 상당수 건축되었고 이러한 건축기술이 축적되어 농촌 주택에도 전파된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궁궐이나 사찰의 대목수가 아닌 일반목수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볼 때 민간기술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진안성당 어은공소는 본격적인 성당건축이 이루어지기 전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외부는 전통가옥의 형식이나 실내평면이 전통 평면형식과는 전혀 다르게 건물로의 진입방법이나 내부공간의 형식에 있어서 집회공간의 기능이 건물평면에 나타나는 보기 드문 아(亞)자형 구조입니다.

▲주자천계곡의 운일암, 반일암은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폭포와 소들이 빚어낸 절경이다.Ⓒ진안군

삼국시대 사찰들
진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한 사찰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고림사(古林寺)는 672년(문무왕 12) 원효가 부귀산서 수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며 원효는 삼국통일의 대업이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대로 성취되기를 소망하여 부안의 변산, 진안의 부귀산 등 주로 편안할 ‘안(安)’자가 들어 있는 곳을 찾아 수도했는데 그 자리가 곧 고림사 근처에 있는 좌선대(坐禪臺)라고 합니다.

금당사(金堂寺)는 마이산에 있는 사찰로 창건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전해옵니다. 하나는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이 그의 제자인 금취와 함께 세웠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814년(헌덕왕 6) 중국 승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원래는 지금보다 약 1.5㎞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입니다.

보흥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하여 광덕사(廣德寺)라 하였으며, 1448년(세종 30)에 중창한 뒤 폐허화된 것을 1914년에 신도 민씨가 옛 절터를 찾아와서 법당과 산신각을 신축하고 북수사(北水寺)라 하였으나 최근에 절터에서 1448년 중수 때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그 기록에 따라 보흥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옥천암(玉泉唵)은 892년(진성왕 6) 정현선사(定玄禪寺)가 창건하였으며 1798년(정조 22) 용담현의 군수였던 김이례에 의해 중창되었습니다. 정현선사는 <삼국사기>에 “894년 고운 최치원이 가야산 해인사에 은둔할 때 현준스님 등과 셋이서 함께 도반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의 연혁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천황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5년에 무염국사가 창건하였고, 1065년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였는데 본래는 주천면 운봉리에 있었으나 숙종 때 중건을 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절 입구에는 평생 금강경을 강의하던 명봉의 부도가, 대웅전에서 산 쪽으로 150m가량 떨어진 곳에는 애운의 부도가 있습니다.

정여립 모반사건의 진원지 죽도
진안에는 정여립 모반사건의 진원지인 죽도가 있습니다.

죽도(竹島)는 남쪽 장수에서 흘러오는 장수천과 동쪽 안성의 덕유산에서 발원한 구량천이, 파(巴)자 형으로 굽이쳐 합류되는 중간에 우뚝 솟아 있는 독산으로 험준한 암산이 강상에 솟아있는 모양은 참으로 절경이며, 푸른 송백과 하얀 모래사장의 조화가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곳으로 모반을 꾀하였다는 정여립이 자결한 곳이기도 합니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3) 과거에 급제하고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이듬해 수찬이 되었으며 이이, 성혼의 총애를 받고 서인의 ‘차세대 유망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이이는 이조판서 때 선조에게 정여립의 중용을 건의할 정도였으나 이이가 세상을 뜬 뒤 그는 서인에서 동인으로 말을 갈아타고 이발에게 붙어 자신의 스승인 이이를 경연에서 대놓고 난도질하자 서인들은 후일을 기약하였고 선조 또한 이런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즈음 정여립을 비난하는 의주목사 서익의 상소까지 올라오자 더 이상 공직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는데 처음 터를 잡은 곳은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 제비산 자락이었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났음에도 그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으며 기백이 출중하고 언변 또한 유려해서 그가 입을 열기만 하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좌중은 탄복을 하곤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여립은 산 속의 섬으로 불리는 진안군 죽도에 ‘대동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달 보름날에 모임을 갖고 활을 쏘고 말을 타고, 칼과 창을 쓰는 법도 배웠습니다. 이렇게 단련된 ‘대동계’는 1587년 왜구가 침입했을 때 ‘용병’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정여립의 내란음모는 안악 사는 조구의 밀고를 받고 안악 군수 이축, 재령 군수 박충간, 신천 군수 한응인 등이 황해감사에게 보고하여 1589년(선조22년) 10월 2일 선조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대동계’가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군사를 일으키고 한강이 얼 때쯤 서울로 쳐들어와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황당한 내용이었습니다.

변숭복이 안악에서 달려와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알려주자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 변숭복, 박연령의 아들 박춘룡 등을 데리고 죽도로 도망쳐 변숭복, 정옥남, 박춘룡을 차례로 칼로 내려치고 자신도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칼날에 목을 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정여립, 변승복만 죽고 정옥남, 박춘룡은 살아남아 관아로 끌려갔습니다.

이 사건은 마침내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이어지고 이후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의 등용길이 막혔는데 당시 재기를 모색하던 서인들이 ‘배신자’ 정여립을 쿠데타의 주역으로 옭아매고 동인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다는 ‘조작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영조 대의 문인 남하정은 <동소만록(桐巢謾錄)>에 “사건을 만든 사람은 송익필이고, 각본에 따라 연출한 사람은 정철이다. 정여립모반사건은 서인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당쟁의 산물일 뿐, 역사 속에서 역모사건으로 기록될 사건은 아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장갑,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11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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