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는 지난 2006년 재보선 유세 당시 중년 남성에게 습격 당했던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당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국민들 덕분이었으며, 남은 인생을 대통령이 돼 국민들에게 바치겠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자막으로는 "준비된 여성대통령 박근혜"가 깔렸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의 딸 집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가족의 모습을 소재로 했다. 문 후보 부인 김정숙 씨가 문 후보에게 차를 건네주고, 연설문을 읽으면서 깜빡 잠이 든 문 후보의 모습과 문 후보의 옷을 다림질하는 부인의 모습이 교차됐다. 대선후보 수락 연설 장면으로 이어졌고, "사람이 먼저다"를 자막으로 깔았다.
개인적으론 첫 TV 광고전은 문 후보의 '완패'였다고 생각한다. 문 후보 쪽에선 전직 대통령 딸인 박 후보에 맞서 '귀족후보 대 서민후보'라는 대립전선을 긋고 싶어 한 것 같으나, 유권자들이 바라는 '서민후보'는 그저 '나랑 똑같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 문재인 TV 광고의 한 장면. ⓒ민주당 |
2002년 서민후보 노무현 vs 2012년 서민후보 문재인
사실 '귀족후보 대 서민후보'라는 대립구도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 쪽에서 활용했던 것이기도 하다. 대법관 출신인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귀족, 엘리트, 기득권으로 몰아붙이고, 노무현 후보는 이에 맞서는 서민후보로 설정했다.
TV 광고 '노무현의 눈물'과 '기타 치는 대통령'에서도 이 메시지를 강하게 담았다. 두 편 모두 이전 대선 광고와 다르게 감성적 코드를 강조한 광고였지만, 무작정 감성을 건드리려는 접근은 아니었다. '노무현의 눈물' 편에선 노동인권 변호사, 지역구도에 맞서 싸운 정치인으로서 노무현의 삶을 보여주는 영상에 이어 맨 마지막에 노무현 후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했다. '기타 치는 대통령' 편에선 직접 기타 치며 부르는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서 "국민에게만 빚진 대통령 노무현, 국민만 보고 일하겠다"는 메시지가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깔렸다. 두 편 모두 서민적이고 소탈한 노무현의 면모를 강조했지만, 여기에만 방점이 찍힌 게 아니었다. 기득권에 맞서 싸워왔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결과로 '귀족 대 서민'의 구도가 작동될 수 있었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노래도 '눈물' 편엔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노래인 존 레논의 '이매진'이, '기타' 편엔 양희은의 '상록수'였다. 두 노래 모두 당시 노무현 후보의 핵심 지지층인 40대를 타깃으로 한 것이었다.
반면 문재인 후보에겐 '전선'이 분명치 않다. 27일 TV 광고만 놓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 스토리가 부족한 문 후보는 여전히 대중들에게 박근혜, 새누리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불려나왔다는 이미지만 강하다. 그러다보니 박근혜 후보 쪽에서 짠 '실패한 노무현 정부의 비서실장'이란 프레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아닌가. 무소속 안철수 전 후보가 사퇴하면서 사실상 넘겨준 '정치개혁'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단일후보가 되면서 슬그머니 뒤로 미룬 듯한 느낌이다. 문 후보와 그 참모들이 안 전 후보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안 전 후보가 제기한 정치개혁 아젠다를 대신 이루기 위해 온몸으로 뛴다는 느낌도 주지 못하고 있다. 공식선거운동 하루 만인 28일 공격 대상을 박근혜에서 이명박으로 급하게 바꾸고 나선 것도 전략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 일이다.
'여성대통령'에 맞서는 '보통의 서민 가장'?
치열함이 없다. 문 후보 측은 첫 TV광고 제목을 '출정식'으로 잡았지만, 제목만 '출정식'이지 '무엇을 위해 싸우러 나가는' 것인지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문 후보가 앉아 있는 의자가 '명품'이라는 둥 엉뚱한 논란이나 야기했다. 서민을 대표해 어떻게 싸울 것인지 보이지 않으니 진짜 서민이냐, 아니냐는 데 대중들의 관심이 쏠린 것이다. 오히려 박 후보가 "국민들이 살려준 목숨을 국민을 위해 바치겠다"는 비장함으로 먼저 방패를 치고 나와, '귀족', '기득권'이란 비난이 끼어들 틈을 없앴다.
절박함이 없다보니 상대 후보의 전략에 대한 고려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 쪽에서 최근 가장 미는 콘셉트가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다. 박 후보의 첫 TV 광고도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내세웠다. '여성대통령론'은 40-50대 여성들에게 상당 부분 먹히는 것으로 여론조사 결과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이 여성들에게 '여성대통령론'이 먹히는 이유는 "이젠 여자도 똑똑하면 대통령도 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야지"라는 '보상심리' 때문이다.
그런데 문 후보가 보여준 모습은 알뜰살뜰한 부인의 내조를 충실히 받는 '가장'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가정의 일상 풍경이지만, 이를 위해 여성들이 얼마나 참고 노동해야하는지, 여성들은 다 안다. 특히 문 후보는 민주당 후보 경선 당시 "대한민국 남자"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 폐기하는 원죄마저 있지 않은가.
2012년 대선은 이전 선거와 다르게 여야 1 대 1 구도가 짜였다. 이전 선거와 비교할 때 구도만 놓고 보면 문 후보에게 비교적 유리하다. 하지만 이 구도는 안철수, 심상정 두 후보의 '눈물과 희생'에 기반한 것이다. 문 후보가 남은 선거기간 동안 '눈물과 희생'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흩어진 야권 지지자들의 마음을 붙잡기 힘들 것이다. 안 후보가 사퇴한 다음날 캠프 대변인 중 한 명이 기자들을 모아놓고 '안철수 지지자들이 결국은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했다. 이런 안이하고 오만한 태도를 계속 보인다면 '서민후보'는 '서민대통령'이 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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