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에 의해 대체된 여론(public opinion)
여론의 영어 표현은 public opinion이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면서 '공중'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public과 '의견'의 의미를 지니는 opinion이 합성되어 여론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당시 공중은 주로 지식계층의 성원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분위기의 정치적 공론의 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로 의견이 충돌하는 공적 이슈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공중(public) 개념에는 보편성, 객관성, 합리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반해 의견(opinion)은 사실과 구별되는 개인의 판단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다분히 주관적이고 불확실하며 유동적일 가능성이다.
이처럼 여론 개념에는 이성적/비이성적, 객관적/주관적, 합리적/비합리적, 보편적/유동적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에 기반한 '여론조사'가 등장하면서 여론(public opinoin)에서 공중(public)의 개념은 사라지고 의견(opinon)만이 남게 되었다. 즉, 여론이 개개인이 가진 의견들의 단순한 종합으로 의미가 협애화된 것이다. 이제 여론조사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충분한 숙고와 토론에 기반했느냐는 '의견의 질'이 아니라 단순한 '의견의 합'이 되었다. 오늘날 여론조사로 표현되는 여론이 지니는 불안함은 여기에 기인한다.
여론의 역할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시각 달라
여론조사는 선거가 없는 일상적인 시기에 국민주권, 참여의 가치를 활성화시킨다는 명분하게 적극 수용되고 있다. 특히 참여정부 이후 여론조사는 공적 이슈를 놓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거나 국민을 설득하는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또한 주기적으로 보도되는 대통령 지지도는 사실상 '국민투표'의 역할을 하는데, 대통령은 수시로 여론조사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점검할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신임' 여부를 평가받는다.
여론조사가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하게 활용되면서 여론조사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정보도 충분하지 않고 숙고되지도 않은 개인의 의견이 국민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공적 이슈를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 점에서 진보와 보수의 입장이 상이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진보는 대체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을 가정하면서 빈부의 격차, 지식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것을 중시한다. 반면 보수는 다분히 개인이 지니는 전문성과 지식의 정도가 다른데, 정제되지 않고 전문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보통 시민의 의견들이 '여론'이라는 형식으로 공적 의사 결정에 반영되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입장이다. 엘리트주의적 요소가 짙다.
▲ 문재인, 안철수 후보(왼쪽부터) ⓒ뉴시스 |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가 여론조사를 통해 결정된 이후 정당의 후보 공천, 정당간 후보단일화와 같은 중대한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여론조사가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어왔다. 그 결과 한국 정치에서 취약한 '정당정치'의 공간을 '서베이 민주주의'가 대신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여론조사는 개인의 참여 의지와 책임이 뒷받침된 적극적인 행위로 보기 어렵다. 면접원에 의해 간택되어 면접원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선호를 '표출'하거나 '반응'하는 소극적 행위에 가깝다. 여론조사에 '반응'하는 것과 경선과 같은 정치적 행위가 동일한 선에서 비교될 수 없다.
공론조사는 여론조사의 이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방식이다. 공론(public judgement)이 여론(public opinion)과 다른 것은 불안정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공중으로서의 합리적 판단이 의견 형성에 중요하게 고려되기 때문이다. 공론조사는 특정 이슈에 대해 상반된 시각과 주장에 대해 균형잡힌 정보를 제공받은 상태에서 토론을 통해 형성된 공론(public judgment)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 보다 훨씬 숙고된 의견으로 경청할만하다고 본다.
스탠포드대 공론조사연구소 소장인 J. Fishikin은 공론조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학자로 민주주의와 공론조사(Democracy and Diliberation)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공론조사는 공론과 여론조사의 결합으로 과학적 확률표집과 토론의 결합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여론조사'가 지니는 대표성의 원칙을 충분히 실현하면서도 토론과 숙고에 기반한다는 장점을 지닌다는 점에서 개인의 불안정한 의견인 '여론'을 보완한다. 공적 의사 결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단순히 다수의 의견 개진을 넘어 보다 좋은 의사결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참여정부 시기 부동산 정책을 놓고 공론조사 실시되기도
한국에서도 공론조사가 시도된 바 있다. 참여정부 시기, 부동산 정책을 놓고 국민적 갈등이 극심해지자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안으로 2005년 7월 공론조사가 시도되었다. 당시 아파트 폭등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던 서울 및 수도권 거주자 500명을 대상으로 표본을 구성한 뒤 1차 설문을 통해 부동산 정책 방향 등에 대한 개인의 의견을 확인했다. 이들에게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찬반 양론을 담은 자료를 제공하고 시청하게 한 후에 1차와 동일한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의견변화 정도를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일정한 의견 변화들이 나타났고 그 변화는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거나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이렇듯 공론조사의 강점은 찬반 갈등이 팽팽하거나 찬성측과 반대측의 강도가 완강해 좀처럼 타협 지점을 찾기 어려운 공적 이슈라도 충분한 정보와 토론을 제공한다면 이를 통해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여론조사의 응답이 단순한 선호표출이나 일방적 '반응'들의 집합인 반면, 공론조사는 토론을 통해 나의 의견과 다른 이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나의 의견이 틀릴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즉 여론조사 결과는 각 의견들이 서로 접점 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면 공론조사는 상호간 무수한 접접을 통해 합의 가능성을 찾게 해준다.
새 정부에서 공론조사 적극 활용해야
필자는 개인적으로 후보단일화 과정에 공론조사 방식이 포함되기를 기대했다.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양측 지지자들이 동수로 구성된 공론단(배심원 등 뭐라고 지칭해도 좋다)이 후보의 토론을 보고, 또 다양한 정보를 접한 후 가까운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의견을 교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원래 지지했던 후보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타난 결과는 나의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나와 다른 이들의 차이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기에 자신이 지지하지 않았던 후보가 단일후보로 결정된다 할지라도 결과에 승복하기 쉽다.
비록 후보단일화 방식으로는 채택되지 못했지만 공론조사가 부각되고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평가된다. 공론조사는 개혁적 성향의 새 정부가 들어설 경우, 각종 개혁과제를 추진해야 할 임기 초반, 갈등적 의견들을 조율하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유용한 방안으로 활용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했듯이 임기 초반 신임대통령이 의욕을 가지고 개혁과제를 수행하려해도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는 경우가 적잖다. 반대층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선거연합 내부의 이질적 이해를 조율하고 갈등적 사안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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