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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이회창의 실패를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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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 이회창의 실패를 닮아간다

[대선읽기]<23>두 '원칙주의자' 박근혜, 이회창의 '데칼코마니'

'원칙의 정치인'의 원조는 이회창이다. 그는 97년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책 <아름다운 원칙>을 통해 청렴, 원칙, 법치를 강조했다. '대쪽'과 '법대로'는 그의 별칭이었다. 그런 이회창에게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은 두 차례에 걸친 대선 과정에서 지독한 골치거리로 떠올랐다. 그의 '원칙'에 비춰 봤을 때, "위법한 사실이 없는"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이 정치 쟁점화되는 것을 사실상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회창은 관련해 수차례 입장을 표명했다. 97년 8월 TV 토론회에 나와서 "병역 비리 의혹 문제와 관련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양심에 거리끼거나 특권층의 지위를 이용한 일은 없다"고 했다. 97년 9월 그는 병역 비리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예고한 뒤, 막상 기자 회견장에서 "정치적 공세에도 불구, 군의 명예와 신뢰를 흔들만한 아무런 자료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은 안심하시리라 믿는다"며 "부정 의혹에 대한 확증도 없고, 자료에서 사실 관계가 드러났는데도 이 문제를 선거 전략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부정적인 정치 행태"라고 말했다. 전향적인 입장을 밝히기는 커녕 되려 야당을 따끔하게 훈계했다.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논평을 내고 "새로운 게 전혀 없다"며 전면전을 선포했다. '총풍', '안풍' 등의 사건으로 '북풍'이 강하게 불었던 그해 대선에서 이회창은 결국 떨어졌다. 그러나 5년 후, 아들 병역 비리 의혹은 '병풍'이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부활한다.

시험지에 똑같은 문제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학습 효과'는 없었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에게 주변 참모들이 "병풍 문제는 어떻게든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아니,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안인데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취지로 참모들에게 말을 돌려줬다고 한다. 그는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전향적 입장을 내지 못했다. 원칙론의 한계다.

<문화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보수 논객 윤창중 씨는 칼럼을 통해 박 후보를 둘러싼 정수장학회 논란을 이회창의 사례에 빗댔다. 그는 "(만약) 이회창이 두 아들의 병역문제에 대해 법률적으로 문제가 있느니 없느니 따지지 말고 '어떻든 두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선 백배 사죄한다. 군대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께도 죄송하다'고 무릎이라도 덥석 꿇어버리고 사죄했다면..."이라고 지적했다. 박 후보의 정수장학회 논란에서 그는 2002년을 봤던 것이다.
▲ 2005년, 두 번의 대선에서 배한 뒤 정계 은퇴 선언을 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모친상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조문하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이회창의 '데칼코마니'

이회창의 사례와 '데칼코마니'다. 2007년 신문 지면을 연일 장식했던 정수장학회 문제가 5년간 잠복기를 거친 후 다시 부활했다. 5년 전 박근혜 후보는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저는 2005년에 장학회 떠난 이후 장학회와 어떠한 관계도 없고 무엇을 지시하거나 건의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래서 그간 장학회 질문 받으면 저와는 관련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장학회와 관련해서 정치적 논란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 위해 장학생을 배출하며 노력한 정수장학회가 마치 비리에 연루돼 있고 의혹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 받고 있다."

이사장 직에서 물러난 후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이해할 수 없는 정치 공세가 진행되고 있다는 투다. "법적으로 문제 없는데 왜 정치 공세를 하느냐"는 이회창의 태도와 오버랩된다.

기자회견장에서 사실 관계를 잘못 말한 후, 회견을 지켜봤던 참모의 지적에 정정한 것을 보면, 그는 정수장학회 입장을 밝히며 주변 참모들과 딱히 깊은 상의를 했던 것 같지 않다. 틀린 팩트가 담긴 후보의 발언을 현장에서 듣고 수정해 줘야 하는 참모들의 심경은 어떠할까.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안인데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이회창의 말을 들은 참모는 '직언'이라도 했다.

박 후보는 오히려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정수장학회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공보단은 김지태 씨의 '부정 축재'를 부각시키며 "민주당은 김지태 씨를 비호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후보가 전날 "야당의 정치 공세"라고 규정하자 당이 이를 그대로 따르며 '정공법'을 펴고 있는 모양새다.

문제의 핵심이 과연 '김지태 씨가 부정축재자냐 아니냐' 여부일까? 그가 부정축재자라고 하면 5.16장학회의 탄생은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일까?

박근혜가 둔 '악수' 두 가지

박근혜 후보의 이번 기자회견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악수'였다. 고심 끝에 내 놓은 '과거사 사과'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정수장학회 논란을 대선판의 중심에 올려 놓았다.

첫째, 박 후보는 지난달 23일 "5.16과 유신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 말이 얼마나 포괄적 의미를 담는지 이해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5.16쿠데타 직후 정수장학회를 "강압에 의해" 빼앗긴 고 김지태 씨는 박 후보가 설정한 "5.16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됐다.

둘째,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와 무관하다는 것은 '형식적 진실'이다. 반면 대중은 '실체적 진실'을 요구한다. 박 후보와 정수장학회 간의 '실체적 진실'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50년 전 사건의 대략적 진실이라도 그가 인정하길 바라고 있다. 이번 기자회견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라고 하는 유권자들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21일 저녁 자신의 트위터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수장학회는 법의 잣대가 아니라 국민들 눈의 잣대로 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 의원은 "쿠테타가 아니었으면 부일장학회를 강탈할 수 있었을까. 5.16쿠테타와 유신은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하면서 그때 강탈한 남의 재산은 합법이라고 한다면 (대통령의) 자질을 의심받는다. 깊이 생각해 볼 일"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원칙의 정치인' 원조격인 이회창의 실패를 돌이켜 봐도 좋다.

불필요한 가정이지만, 만일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는 강압에 의한 민간 재산 헌납을 통해 만들어진 재단이다. 제가 지난 95년부터 10년간 이사장 직을 수행했지만, 그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지금부터라도 장학회가 국민의 품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털어버린 뒤, '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재단'의 현 수장인 최필립 이사장에게 공을 넘겼다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까. 최 이사장이 지금처럼 여유로운 '버티기'에 돌입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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