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북단 부동항인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남반구로는 시드니, 아시아의 몽골에서 서유럽 파리나 미국 LA다저스의 야구장까지, 몸놀릴 정도의 공간에 '오빤 강남스타일'만 울려 퍼지면 항구의 넓은 공간이든 교도소 담장 안의 죄수용 운동장이든 한두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동시에 일어나 말춤판을 벌인다. 몇백 광년 밖의 외계인도 지금 이 순간은 지구 자체가 자전하기를 잊고 말춤을 추는 것으로 볼 것이다.
베니스 영화제의 분위기도 공감과 찬사의 밀도에 있어서는 차라리 강남스타일을 능가한다. 여우주연상까지 받았을 <피에타>의 영상과 메시지는 심사위원 전원이 김기덕 감독에게 황금사자상을 주는 데 만장일치로 찬동하게 만들었다. 사실 문화적 성숙성이라는 측면에서 <피에타>의 위업은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넘어선다.
그래서 지금 한국 언론들은 특히 '강남스타일'에 대한 전지구적 대중의 호응에 고무되어 거침없이 국가주의적 언사를 내뱉는다.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를 석권했다!"는 식으로.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나온 대중문화가 세계를 향해 간다는 식의 관점이 철저한 자기기만이라는 점에서 이런 국가주의적인 발상을 수긍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를 '말아먹은(席捲)' 것이 아니라 국적을 불문한 전지구적 우울증이 이 신나는 한국판 대중문화를 일거에 '공중부양(空中浮揚)' 시켰다. '강남스타일'은 '한국'의 그 어떤 우수한 문화라고 간택된 것이 아니다.
지구 대중들이 집집마다 놓은 컴퓨터의 유투브 포털은 전세계의 갖가지 문화상품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난장이다. 싸이는 "아예 맘 먹고 저질덩어리로 만들기로 작심한" 댄스 뮤직 하나를 거기에다 던져 넣었다. 결과는? 우연찮게 '강남스타일'을 본 이들이 모두 '그냥 빵' 터진 것이다.
이제 싸이가 말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 전지구적 말춤에 싸이가 말아먹힌 형세이다. 싸이는 말춤 추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잘 추는 말춤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것도 순식간에!
ⓒ로이터=뉴시스 |
21세기 첫 십년기를 지난 현재 지구인으로 태어난 존재들에게 신날 일이 있는가? 지난 세기 역사의 종말까지 선언했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십년이 지난 지금 전세계 시민 대중들에게 무슨 신날 일을 주고 있는가?
온통 자본주의 우울증에 걸린 지구에서 '강남스타일'의 말춤만큼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신날 일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한없이 무거운 것이 전세계 시민대중들의 현실이다. 실업, 부채, 파산 등에 짓눌리는 지구 대중들이 간단한 스텝만 몇 번 밟으면 온몸을 신명나게 흔들어주어 잠시나마 경제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게 만드는 것으로 이 말춤보다 더 좋은 것이 지금 이 순간의 이 지구에는 없다.
한국에서 상황은 더 진중하다. '강남스타일'은 한국에서 신흥부자들의 집결지인 강남 지역을 위한 관광 내지 장소 마케팅 가요가 아니다. 어느 면에서 그것은 강남에 대한 해학적인 비판이다.
강남은 온갖 저질 욕망이 최고급 소비재로 포장되어 있는 혼돈의 땅이다. 없는 자가 강남스타일을 따라 할 수 있는 방법은 강남 흉내내기밖에 없다. 해변에 갈 능력은 없으니 어린이 놀이터의 모래밭에서 선탠 기분을 낼 수밖에 없다. 승마할 돈은 없으니까 마장에서 말 타는 흉내를 내면서 승마 기분을 낼 수밖에 없다. 외제차는 죽어도 못 타니까 그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유재석에게 쫓겨난다. 이런 불만도 내놓고 못하니까 혹시 누가 들을까봐 변기통에 걸터앉아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혼자 허공에다 욕질 하는 기분만 내야 한다. 섹시한 여자와 엉켰으면 하지만 언감생심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요가하는 여자 엉덩이 뒤에서 섹스 흉내나 내거나 지하철에서 멋진 여자를 보고 상상으로 관음하는 것뿐이다. 당연히 여자에게 진짜 덤비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참으면서 말이다.
'강남스타일'의 영상과 메시지는 참으로 슬프다. 쌓이기는 하지만 손에 넣을 수는 없는 갖가지 욕망들을 앞에 두고 보통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저질 욕망들이 표출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자기도 인간임을 쉽게 느끼도록 해주는 말춤을 자기와 똑같은 처지의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떼춤을 추어 달래는 것뿐이다. 그리고 비애감이 어린 쉬운 리듬이 같은 처지의 세계 시민들에게 발견된 것이다. 충족시킬 수 없는 저질 욕망이 고급 소비재로 치장된 것 속에서 그것을 채울 수단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지구의 모든 루저들이 아무데서나 떼춤판을 만든다. 이 춤이 얼마나 저질인지 "정작 강남 나이트에서는 강남스타일을 틀어주지 않는다."
ⓒ피에타 |
영화 <피에타>는 잔인한 채권추심자인 강도(이정진 분)가 엄마라고 나타난 미선(조민수 분)에게서 자기가 그렇게 쫓아다닌 돈 말고도 자신이 욕구할 수 있는 것에는 모정(母情)이라는 것도 있음을 깨닫는 과정을 절묘하게 파고든다. 이 과정만 해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은, 더 할 나위 없이 잔혹무도한 강도를 녹여낸 모정조차 자신이 엮어놓은 돈의 사슬 안에서 자신에 대한 처절한 보복의 한 분절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강도는 돈뿐만 아니라 돈을 벗어나려고 매달렸던 모정에게서도 배반당한다. 그에게는 남는 것이 이제 하나도 없다. 자신이 죽인 수많은 인간을 통해 그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하나 스스로 비우면서 빈껍데기만 남는다. 막장은 단순한 돈과 사랑의 멜로가 아니다. 막장은 총체적 배신이다.
세계적 인정을 받은 대한민국의 두 문화제품의 실질적인 심층코드는 막장과 저질, 그리고 그것들을 재생산하는 총체적 배신이다. '강남스타일'의 말춤과 떼춤은 '피에타'에서 총체적으로 배신당한 인간들이 집단자살을 하지 않으려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피에타>와 '강남스타일'의 화면 분위기는 정반대이다. 전자는 잔혹하게 비극적이고 후자는 기괴하게 희극적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발원한 이 두 문화제품의 심층코드는 일종의 총체적 니힐리즘이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지구적으로 호응받으면서 이 두 문화제품은 전지구적으로 편만해 있는 글로벌 니힐리즘의 초절정을 보여준다.
<피에타>를 보고 '강남스타일'을 따라하는 지구상의 시민대중을 보다보면 백인들의 총공세 앞에서 멸족을 앞두고도 저지시킬 수 없었던 인디언 부족들이 마지막으로 추던 열광댄스가 연상된다. 더구나 2012년은 지구 멸망이 사방에서 예언되어 온 해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최초로 세계를 석권한 두 개의 한국산 문화상품이 종말 앞에서 무력한 글로벌 니힐리즘을 가감없이 구현한 B급 레벨의 적나라함 때문에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면 너무 씁쓸하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메시지를 준비하는 징후는 아닐까 하고 안쓰럽게 희망해 보고도 싶다. 놀랍도록 열광적인 '강남스타일'과 슬플 정도로 방관되는 <피에타> 사이에서 <도둑들>과 <광해>가 조용히 관객 수를 넓혀가는 것이 위안이 되면 좋겠다. 무엇보다 도덕적 영웅과 정치적 천재가 우리 시민대중에서 나오는 징조가 되면 아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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