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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분단되자 회사도 분단됐다: 칼자이스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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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분단되자 회사도 분단됐다: 칼자이스 스토리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⑧] 재통일의 여파를 이겨내다

칼 자이스(Carl Zeiss)는 렌즈 기술로 유명한 회사다. 의료용 렌즈, 현미경 렌즈, 안경 렌즈, 카메라 렌즈, 천체투영관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졌다.

1846년, 독일 튀링엔 주의 도시 예나(Jena)에서 카를 자이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광학회사 칼 자이스를 설립했다. 회사는 1866년 대학 교수였던 물리학자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의 참여, 1884년 화학자 프리드리히 쇼트(Friedrich Otto Schott)의 참여로 본격적인 성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카를 자이스 사망 후 둘은 아베의 주도 아래에 단독 주주의 횡포를 막고자 칼 자이스 재단을 설립, 지금의 칼 자이스 체제를 만들었다. 재단은 당시로는 급진적이라 할 만한 하루 8시간 노동제, 풍부한 휴가제 등을 회사에 도입했고, 종신 고용 모델에 기반을 둔 연구자 중심 기업 체제를 완성, 예나의 프리드리히 쉴러 대학과 함께 산학 협력 기반을 다졌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극이 시작됐다. 히틀러의 압력 하에 군사용 렌즈를 보급하던 칼 자이스의 예나 공장을 1945년 4월 13일, 미 육군 80보병사단이 점령했다. 튀링엔 주는 소련의 점령 지대였지만, 예나만은 달랐다.

미군은 칼 자이스 이사진을 포함한 핵심 임직원 77명을 서쪽 미군 점령 지대인 하이덴하임(Heidenheim)으로 빼돌렸다. 중요 기술 기업인 칼 자이스를 소련에 빼앗길 수 없다는 판단 아래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이덴하임은 지금 칼 자이스 재단이 자리한 곳이다. 미군보다 한 발 늦은 1945년 12월 31일, 소련은 예나를 비롯해 동쪽에 남은 칼 자이스를 압류했다.

1946년 10월, 서쪽으로 강제 이주된 칼 자이스 임원진은 오버코헨(Oberkochen)에 '자이스 옵톤 광학공업 오버코헨 유한책임회사(GmbH)'를 설립했다. 이듬해 회사명은 '칼 자이스'로 변경됐다. 1948년 6월, 소련은 예나에 남은 칼 자이스 재단을 인수하고 동쪽의 칼 자이스를 '콤비나트 인민기업(VEB) 자이스 예나'로 국영화했다. 이로써 동서 독일이 갈라지듯, 기업도 동서로 갈라졌다.

체제가 갈등하듯, 한때 한 몸이었던 기업도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냉전 시기 두 회사는 자신이 아베가 만든 회사의 적통임을 입증하려 국제 무대에서 싸웠다. 싸움은 법정으로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데탕트의 시기, 두 회사도 휴전했다. 이후 재통일이 왔다. 둘로 갈라진 기업을 한 몸으로 만들면서 엄청난 규모의 노동자 해고라는 산을 넘어야 했다.

칼 자이스는 독일의 분단-재통일 역사를 상징한다. 이윤을 따라 움직이기 마련인 기업사에서 찾기 쉽지 않은 이야기다. 취재진이 이 회사에 주목한 이유다. 취재진은 칼 자이스 역사를 상징하는 예나에서 동독 콤비나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났다.

지난 달 11일, 지금은 은퇴한 전 임원진인 볼프강 볼크홀츠(Wolfgang Volkholz, 1947년생) 씨와 빌프리드 랑(Wilfried Lang, 1951년생) 씨, 그리고 현재 칼 자이스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는 볼프강 빔머(Wolfgang Wimmer) 박사와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칼 자이스 기업사를 정리했다.

볼크홀츠 씨는 지난 1971년 자이스 예나에 입사해 2006년 (통일된) 칼 자이스 유한회사의 임원까지 승진한 후 2012년 은퇴했다. 랑 씨는 1974년 자이스 예나에 입사해 2005년 칼 자이스 부회장까지 올랐고, 2016년 은퇴했다. 랑 씨는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셋 중 유일하게 서독 출신인 빔머 박사는 1993년 베를린에서 독일 의약품산업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96년 칼 자이스 기록보관소에 입사했다. 회사 역사를 정리한 책 <같은 사람끼리 모이기 마련(Birds of a Feather)>의 책임편집자다.

▲ 빌프리드 랑(왼쪽) 씨와 볼프강 볼크홀츠(오른쪽) 씨. 이들은 동독 출신으로 칼 자이스 통일 시기의 혼란을 견뎌냈고, 회사 최고위직까지 오른 후 은퇴했다. ⓒ특별취재팀

한 가족이 적으로

동서 칼 자이스의 충돌은 1948년 본격화했다. 이 해 7월 30일, 오버코헨의 칼 자이스는 재단 주소지를 예나에서 하이덴하임으로 이전하겠다며, 도시가 소재한 서독 뷔템베르그-바덴 주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이제 칼 자이스는 서쪽에만 있다는 뜻이었다. 예나의 VEB 자이스는 발끈했다. 오버코헨 칼 자이스와 동독 국가통상기관(DIA)의 긴 협상이 시작됐다. 1954년 2월 12일, 결론이 났다. 서독 괴팅겐 지방재판소는 VEB 자이스 예나가 칼 자이스 명칭과 상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국영기업이 된) 예나의 칼 자이스는 이제 가짜라는 뜻이다. 싸움은 국제전으로 번지게 됐다.

"당시는 두 기업이 적대적이었어요. 천문분야뿐만 아니라 현미경, 의료기기 등 모든 부문에서 동서 자이스가 경쟁했죠. 아마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사례이지 않을까 싶어요." (볼크홀츠)

1965년, 영국 런던에서 동서 칼 자이스가 맞붙었다. 6년에 걸친 법정 싸움 끝에, 동서는 겨우 타결안을 냈다. 1971년 4월 27일, 런던 고등법원에서 오버코헨의 칼 자이스(이하 오버코헨)와 VEB 자이스 예나(이하 예나)는 △예나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 제품을 판매할 시 '칼 자이스' 브랜드 대신 '예놉틱(Jenoptik)'을 사용하고 △오버코헨은 코메콘(COMECON) 국가에서 제품을 판매할 때 '옵톤(Opton)' 브랜드를 사용하며 △비 서방 유럽국가와 아시아, 아프리카, 미국을 제외한 아메리카에서는 동서 자이스가 '칼 자이스' 브랜드를 함께 사용하되, 소비자가 동서 제품 생산지를 명확히 구별 가능하게끔 보충설명서를 첨부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런던 협정'에 동의했다. 상대의 존재를 상호 인정하면서 겨우 갈등을 봉합한 것이다. 뒤늦게 임원진으로만 꾸려진 기업으로 재출발한 서쪽의 사실상 승리였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오버코헨을 대리했던 미국의 잭슨 변호사가 제소 이유서에 쓴 내용은 냉전 체제의 갈등을 일개 기업까지 떠안아야 했던 시대상을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본 건은 냉전의 부산물로,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경제 체제를 지닌 채 두 부분으로 분열되어 상호 적대하는 독일의 모습을 투영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칼 자이스 광학기기 기업과 오너였던 에른스트 아베 교수가 만든 정관에 따른 사회·경제적 이상(理想)으로, 75년 전에 설립된 칼 자이스 재단의 전설적인 이야기다." (도서 <우리가 할 수 없으면 누구도 할 수 없다>(아민 헤르만 지음, 장미화 옮김, 삼성경제연구소 펴냄)에서 발췌)

이제 동서 자이스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됐다. 동쪽은 비대해졌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일본산 제품이 글로벌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은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예나와 드레스덴에 흩어진 연구센터를 통합, 예나에서 연구부터 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한 번에 소화하는 대형화 전략을 택했다. 이로써 VEB 자이스 예나의 노동자 수는 도합 6만 명까지 불어났다. 예나 인구가 10만 명을 겨우 넘을 때였다. 예나가 사실상 칼 자이스였다.

재통일의 여파

이처럼 조직이 비대해진 상황에서 재통일이 닥쳤다. 본래 하나였던 두 기업이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1990년 5월 29일, 동서 자이스는 재단 통합을 선언하고 독일 각지에 흩어진 칼 자이스 오버코헨, VEB 자이스 예나, 쇼트 유리 마인츠, VEB 예나 유리 등 4개 기업을 빠른 시간 안에 하이덴하임의 칼 자이스 재단 아래에 통합키로 결정했다. 준비 과정으로 국영기업이었던 VEB 자이스 예나는 1990년 6월 29일, '칼 자이스 예나 GmbH'로 전환됐다.

통합은 쉽지 않았다. 당시 서독의 동독 흡수 상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0년 7월 1일, 동서 마르크화가 1대 1 비율로 통합됐다. 이어 신연방주의 VEB들은 전부 새로운 조직 독일신탁청(Treuhand) 재산이 되었다. 이로써 신탁청은 약 400만 명의 노동자 목줄을 쥔 4만5000개 국영기업의 주인이 되어, 이 기업들의 민간 자본 매각을 담당하게 됐다. 칼 자이스 예나의 소유주도 신탁청이 되었다. 칼 자이스 예나는 다시 '예놉틱 칼 자이스 예나 GmbH'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런데 당시 동서 마르크화의 적정 환율 기준은 약 1(서)대 4(동)였다. 이를 무리하게 1대 1 비율로 통합한 게 화근이었다. 안 그래도 국영기업 특성상 비대한 조직의 동쪽 기업들 자산 가치는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민간 자본들이 경쟁력을 잃은 동쪽 기업을 인수하려 할 리 없었다. 그 사이 5만여 명이던 칼 자이스 예나의 직원은 이미 2만7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노동자 절반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뜻이다. 정리해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90년 11월 22일, 칼 자이스 통합 컨설팅을 맡은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하이덴하임과 예나로 나뉜 재단을 통합하고, 예나의 자이스 노동자 수는 2만7000명에서 1만200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남은 인력을 다시 거의 3분의 1로 줄이는 가혹한 구조조정이었다. 1991년 말까지 예나 전역에서 2만여 명의 자이스 노동자들이 해고 반대 시위를 이어갔다.

1991년 6월 11일, 마침내 통합 결론이 나왔다. △칼 자이스 재단 본거지는 하이덴하임에 두고, 예나의 재단은 예나 지역 부동산만을 관리하는 에른스트 아베 재단으로 전환하는 한편 △예놉틱 칼 자이스 예나를 임직원 7400명의 '예놉틱 GmbH'와 2800명의 칼 자이스 예나 GmbH'로 분할하며 △나머지 2만여 명은 해고한다는 방안이었다. 이로써 진통 끝에 하나였다 둘이 된 회사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사업 부문별로 보면, 예나에는 천체투영관과 의료 장비, 현미경 사업을 남겼고, 그 사이 새로 시작한 반도체 사업을 비롯해 나머지는 전부 서쪽으로 일원화했다.

▲ 동독 VEB 시절 칼 자이스는 체제에 복무해야 했다. ⓒCarl-Zeiss-Stiftung

정리해고

이 고통스러운 정리해고는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이뤄졌을까. 취재진과 만난 이들은 모두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았다.

"동독 시절에는 예나에서 부품부터 조립까지, 모든 걸 다 했어요. 그래서 서쪽 기준으로 보면 직원이 아주 많았죠. 재통일 후 둘을 하나로 합치려다보니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어요.

정리해고가 결정된 후 가장 큰 고민이 누가 떠날 것이냐였죠. 사회적 요소와 전문적 지식, 두 가지를 주된 기준으로 잡았어요.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나머지 조건이 동일하다면 둘 중 더 어린 사람을 해고했어요. 나이가 찬 사람은 새로운 직장을 잡기 어려우니까. 같은 방식으로 한 명은 맞벌이를 하고 한 명은 남편만 일을 한다면, 맞벌이하는 사람을 해고했어요. 아이가 몇 명 있는지도 고려했죠. 저의 경우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과거 업무 특성상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경험이 있어 살아남았어요.

아주 고통스러운 전환이었죠. 사회주의 체제의 기업을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하게끔 하느냐를 아는 이는 당시 세계에 없었으니까요." (볼크홀츠)

"독일의 노동 관련법에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는 걸 막는 여러 조건이 명시되어 있어요. 하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건 칼 자이스의 전통이기도 해요.

에른스트 아베가 칼 자이스에 들어온 후, 칼 자이스는 사회를 개혁하는 기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조직 내에 강했어요. 이런 전통이 동독 시절에도 끊어지지 않았죠. 정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손 쳐도, 기업 외적 변수까지 고려해야만 했어요.

예를 들어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칼 자이스는 다시금 노동자를 해고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어요. 세계 여러 기업이 그랬듯이요. 당시 자이스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급여를 13% 줄이고, 임원은 25%를 줄이는 대신 해고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그 결과 1년 후 경기가 회복되자 이들은 줄어든 급여를 되돌려 받을 수 있었죠." (랑)

칼 자이스는 여러모로 특이한 기업 모델이다. 지난 2004년 재단이 유일 주주인 주식회사화했지만, 그 전까지는 각 유한책임회사가 재단의 결정에 따르는 집단 기업 모델이었다. 특정인의 기업 자산 지배를 탐탁지 않게 본 아베의 결정이었다. 되도록 임직원이 정년까지 근무하는 전통 역시 아베 시대의 유산이다. 전문 경영인보다 기술자를 더 우대하는 문화 역시 100년이 넘었다. 칼 자이스 역사를 이야기할 때 창업자보다 아베의 이름이 더 거론되는 까닭이다.

두 임직원과 달리 독일 재통일 후 회사에 합류했고, 제조 업무가 아닌 기업 역사를 정리하는 빔머 박사가 이 같은 모델의 장단점을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정리했다.

"'아베 정신'은 비록 칼 자이스가 기업임에도, 모든 것을 학문화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기술적으로 좋은 제품이라면 시장성을 따지지 않고 일단 생산하고 보는 풍토가 있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정신이 분단 시기에도 동서 양측에 이어졌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산 제품에 밀릴 당시 동서 자이스가 (일단 좋은 제품이라 판단하면 만들고 보는) 같은 실수를 범했다는 점은 이 같은 관점에서 흥미롭습니다.

동독 시기 예나에서 아베를 공격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SED의 입장에서 아베는 어쨌든 자본가였으니까요. 하지만 예나의 노동자 중 동의한 이는 거의 없었을 겁니다. '당이 아베를 오해하고 있다'는 반발이 많았죠. 1970년대가 지나며 결국 SED는 아베 정신과 일종의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1989년에 SED가 만든 아베 전기 영화가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 아베는 못된 자본주의자가 아니며 숭고한 이상을 가진 학자로 묘사됩니다. 다만, 아베 밑의 경영진이 나쁜 자본가로 나오죠." (빔머)

▲ '칼 자이스 정신'을 만든 에른스트 아베. 칼 자이스 역사에서 에른스트 아베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기업을 통해 민주주의를 학습한다는 신념을 지녔던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zeiss.co.uk

눈물의 구조조정

재통합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재통일 후유증은 단숨에 해소되지 않았다. 기업이 항상 위기를 맞는 것, 항상 새로운 경제위기가 닥쳐오는 건 경제사에서 언제나 확인 가능하다.

재통합 당시 대규모 구조조정도 부족했음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동서 양측에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연이었다. 1994년 10월 17일, <슈피겔>은 헤드라인에 "자이스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다"라고 보도했다. 서쪽 칼 자이스가 소재한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 주의 디터 스푀리 경제부장관은 "칼 자이스 문제는 독일 재통일의 결과"라고 이 사태를 촌평했다.

결국 구조조정 전문가가 기업에 등장했다. 지멘스의 구조조정을 지휘했던 피터 그라스만(Peter Grassmann)이 1995년 1월 1일, 칼 자이스의 새 CEO로 취임했다. 그는 26개이던 사업부를 5개 사업부로 재편하고, 예나에 투자 예정이던 2억 마르크 규모의 자본 투입을 취소하고, 2600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일부 자회사를 매각했다.

고통스러웠던 구조조정은 드디어 끝났다. 숱한 이의 희생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2000년 9월 23일, 칼 자이스 예나는 오픈하우스 행사를 열었다. 이제 예나가 제 궤도에 올랐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였다. 드디어 재통일이 남긴 고통이 끝난 것이다. 현재 칼 자이스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30여 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

▲ 칼 자이스 기록보관소의 볼프강 빔머 박사. 서독 출신인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칼 자이스에 입사했다. 비록 베를린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베를린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다시 하나로

칼 자이스 관계자들은 예나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15분가량 떨어진 시 외곽의 고풍스러운 사옥에서 취재진을 맞이했다. 동독 시절인 1971년 지어진 건물이다. 이들은 곧 첨단 기술을 적용한 신사옥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과거를 상징하는 건 정말 이 건물뿐일까. 이제 동독 시절의 흔적은 남지 않았을까.

"콤비나트 시절이 남긴 유산은 이 건물과 나 같은 은퇴자들뿐이죠. (웃음) 동독 시절이 남긴 흔적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적 유대는 이어지고 있죠. 예나가 일종의 칼 자이스 도시다 보니, 나 같은 은퇴자도 시내 카페나 식당에서 과거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곤 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기에, 만나면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죠.

회사에서도 우리 같은 은퇴자를 챙깁니다. 매년 하루씩 퇴직자들을 회사로 초대해 그 사이 회사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설명해주죠. 각 부서에서 직원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에도 퇴직자를 초대합니다. 회사가 일반인의 견학 신청을 받기도 하는데, 이 때 퇴직자들이 가이드가 됩니다." (볼크홀츠)

"난 동독 시절의 유산이 백퍼센트 남아있다고 확신합니다. 아베 정신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인간관계가 돈독하다는 점에서 다른 기업과 칼 자이스가 구분됩니다." (랑)

이 같이 특이했던 역사는 지금도 신입 사원에게 교육된다. 빔머 박사에 따르면 "신입 직원이 오면 인터넷을 이용해 회사의 사업 영역과 역사를 알려주는 강연을 생중계한다." 과거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

"과거에는 역사 강연을 법무팀장이 했습니다. 동서독 칼 자이스의 법정 싸움 역사 등에 사람들이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죠. 누가 옳았는지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강연할 때마다 칼 자이스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빔머)

구조조정 당한 이들과 남은 이들이 서로 적대하진 않았을까. 인터뷰에 참여한 생존자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이를 온전히 믿기란 어렵다. 다만, 자이스가 상대적으로 이 같은 문제를 좋은 결론으로 맺고자 한 시도는 조명할 만하다.

자이스는 구조조정 시기 원칙을 세웠다. 되도록 퇴직자들이 창업한 기업으로부터 물품을 조달하자는 것. 이런 방식은 퇴직자가 새로운 창업자로 나서게끔 했고, 그들이 계속 예나에 정착해 도시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을 가져왔다.

"예나가 신연방주의 다른 도시에 비해 지금도 활기가 있는 중요한 이유라고 저는 봅니다. 자이스에서 해고된 이들이 주변의 작은 기업에 취업하도록 회사가 도왔고, 퇴직자들이 새로운 기업을 만들면 이들을 지원하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칼 자이스는 예나 시내 반경 100km 이내에 있는 소기업에서 부품 60% 이상을 조달합니다. 지역을 발전시키자는 거였죠. 값 싼 중국산 제품을 사지 않았느냐고요? 근방 기업의 제품도 가격 경쟁력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이스는 대량 생산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중국산 제품은 대량 생산 체제의 기업과 잘 맞죠." (볼크홀츠)

"예나 시 전체가 자이스를 중심으로 네트워크화되어 있어요. 이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예나와 오버코헨의 차이점이기도 하죠. 오버코헨에는 가까운 대학도 없고, 부품 기업도 근처에 많지 않습니다. 해고자가 적기 때문이죠. 반면 예나는 바로 인근에 대학이 있기에 산학 협력이 아주 쉽습니다. 부품 회사도 주변에 많죠. 이 같은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나 시가 곧 칼 자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 지역 축구 클럽 이름이 'FC 칼 자이스 예나'겠어요? (웃음)" (랑)

▲ 예나의 칼 자이스 천체투영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체투영관이다. 칼 자이스는 베를린에도 천체투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wikipedia

인내심이 필요하다

남북한이 교류의 희망을 키워가면서 자연스럽게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지난 달 18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한국의 여러 기업인이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칼 자이스의 전현직 임직원들에게 남북 자본 교류에 관한 생각을 들어봤다. 이들은 남북한 분단사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서도, 조심스레 문화적 차이를 잘 극복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의 재통합 당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선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걸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조언을 해 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죠. 남북의 분단 상황은 독일과도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동서독의 경제적 격차보다 남북의 경제적 격차가 더 큰 만큼, 아마 아주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문제를 침착하게 대비하되, 닥쳐오는 현실에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랑)

"인간적인 면을 많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체제가 변한다는 건 인생의 전제조건이 변화함을 뜻합니다. 아마 남북의 교류가 잦아진다면 자연스럽게 남한 위주로의 변화가 이어질텐데, 그만큼 북한 사람들이 많이 힘들 겁니다. 동독 출신들도 변화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는데, 북한 사람들은 동독 사람들보다 훨씬 큰 어려움을 견뎌야 할 겁니다. 이에 남한이 인내심을 갖고 충분한 시간을 주길 바랍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부유한 남한 사람들이 자본을 앞세워 북한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히도 동서독 재통일 당시는 이런 실수가 있었습니다." (볼크홀츠) (통역: 조경혜)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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