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레시안>에서 전개된 '한국 경제 성격 논쟁'에서 서로 날 센 대립각을 세웠던 김상조-정태인 그룹과 장하준-정승일 그룹은 참으로 오랜만에 이헌재 비판이라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김상조-정태인 그룹과 장하준-정승일 그룹의 '의견 일치'
김상조-정태인 그룹과 장하준-정승일 그룹의 비판 지점은 약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전자 그룹은 '관치 금융'에 비판의 초점이 놓여 있고, 후자 그룹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신자유주의'를 주도했다는 것에 비판의 초점이 놓여 있다.
먼저, 나는 이들 양자 그룹의 비판이 일리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금융 개혁의 과제는 금융 공공성을 강화하고, (금융) 소비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금융 안정성을 제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 양자 그룹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좋은 취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논란이 '올바른 논점'에 입각해서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본다면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소위 '이헌재 논란'은 세 가지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둘러싼 관치(官治) 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둘째, (선거) 캠페인 전략 차원에서, 이헌재 카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셋째, 인적 카르텔의 의미를 갖는 '모피아'를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 출마 선언 기자회견에 앞서 악수하고 있는 이헌재(왼쪽), 안철수. ⓒ연합뉴스 |
허공에 주먹질하기 : 관치(官治)라는 개념의 공허함
먼저, 관치 논란이 적절한 논점인지 살펴보자. 막스 베버는 근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을 '관료 체제'로 꼽고 있다. 나는 진보 진영의 경제학자들이 관료 체제, 그 자체의 타파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 나는 관치(官治)라는 개념 자체가 '허공에 주먹질하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모피아'라는 말로 바꿔도 매 한가지이다. 이 개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는 '실천적' 관점에서 반문을 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질문을 던져보자. '관치'의 반대말은 뭔가?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관치가 잘못된 것이라면, 옳은 것에 해당하는 다른 개념은 무엇인가?
나는 관치(官治)라는 개념 자체가 (용어를 사용하는 분들의 선의와 무관하게)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용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관치의 반대 개념은 필연적으로 '시장 자율'(=자유 방임 시장)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학계를 포함하여 진보 진영의 다수는 자유 방임형 신자유주의와 국가 사회주의 모두를 반대하는 '조정 시장 경제 체제'를 대안으로 합의하고 있다. 즉, 시장과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의 개입'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관료 체제'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시장 개입은 다른 말로 '관료의 시장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가의 시장 개입'을 용인하면서, '관료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마치 둥근 사각형처럼 논리적 형용 모순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관치 비판'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용어가 될 수밖에 없다.
관치라는 개념 자체가 박정희식 발전 국가에 대한 대항 담론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독해될 필요가 있다. 군부 독재 시절에 '관의 배제'를 주장하는 것은 군부 독재의 경제적 퇴장을 요구하는 맥락을 갖게 된다.
즉, 관치라는 개념 자체가 1970년대 재야 경제학계의 대항 담론의 일환으로 사용된 것이며, 조정 시장 경제의 지향과 양립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오늘날 '관치 비판'은 필연적으로 '국가 개입 비판' 그 자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관치(官治)'가 아니라 '정치(政治)'를 비판해야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적 행위자 집단을 편의상 시장-관료-정부로 구분해 보기로 하자. 1)시장은 기본적으로 자유 방임이 작동하는 민간의 영역이고, 2)관료는 국가에 복속된 공무원 체제를 의미한다. 3)정부의 가장 큰 특징은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권력'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조정 시장 경제 체제'를 지향한다면,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는 프로세스는 1)선출된 권력이 2)관료 체제를 통해 3)시장에 개입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주체-수단-객체를 구분하는 것이다.
관료 체제는 엄밀히 말하면, '수단'에 불과하다. 관료 그 자체가 '최종 의사 결정'을 쥐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최종 의사 결정은 '선출된 권력'이 갖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에 함께 했던 일부의 논자들이 "모피아 때문에"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다고 항변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데, 이는 주객이 전도된 논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선출된 권력'이 관료 체제를 통제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출된 권력의 '무능함'을 방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논점의 핵심은 관치-관료-모피아 그 자체가 아니다. 선출된 권력의 통치 능력 유-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관치-관료-모피아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통치 능력에 대한 평가가 올바른 논점이라고 할 수 있다.
관치-모피아 때문에 정부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위기가 당 대표(혹은 당 지도부)때문이 아니라 '당직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헌재 카드' 활용에 대한 '정치적' 판단 지점
두 번째 질문을 던져보자. 선거 캠페인 전략 차원에서 볼 때, 이헌재 카드 활용은 적절한가? 원론적으로 살펴보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타깃 집단'을 어디로 설정하느냐와 맞물려 있다. 안철수 후보가 출마하기 전에,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중 하나는 "누구와 함께 하는지"였다. 이에 대해서 현재 두 번의 계기를 통해 드러났다.
[계기-1] 9월 19일 안철수 후보의 출마 선언식에 노출된 사람들 중에 '보수' 인사는 사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한명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체로 진보 쪽의 인사들이었다. 그날 드러난 사람들이 약 15명이었는데, "1 대 14의 구도"였다.
[계기-2] 9월 21일, 박선숙 선대본 총괄본부장의 '캠프' 인선 발표에 의하면, 그 멤버들이 주로는 민주당-진보 개혁 쪽에서 있었던 전문성과 실무능력을 겸비한 40대 그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위의 [계기-1]과 [계기-2]에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없었다면, 중위 투표자 집단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까? 일부의 사람들은 안철수 캠프가 '진보-40대'로 편향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요컨대, 이헌재 카드의 실질적 의미는 진보-40대 중심의 캠프를 보완-중화해주는 역할을 통해 안정감과 균형감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중도층은 견인하되, 이헌재는 멀리 하라?
이번 대선에서 소위 '선수'를 자임하는 분들 중에는 안철수 후보에게 중도층-무당파층을 견인하라고 주문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특히나 이분들이 이헌재 카드를 비판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야말로 (실천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정치적 형용 모순'을 주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문이 왜 모순된 것인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철수 캠프에서 이헌재 전 경제 부총리같은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과장된 비판이다. (중요한 것은 '지배적' 흐름. 즉, '헤게모니'를 읽어내는 것이다.)
둘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역할은 '중도층'에게 이념적-세대적 안정감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헌재 카드를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중도층 흡수를 포기하라고 주문하는 것과 같다. (또는 '진보쪽 인사' 배치로만, 중도층 유권자를 설득하라는 다소 무리한 주문인 셈이다.)
셋째, '관치' 비판은 잘못된 논점이다. 문제의 본질은 '선출된 권력'이 정치(政治)의 기능을 제대로 작동시키느냐의 여부이다. 즉, 안철수 후보가 만일 대통령이 되면, '안철수의 생각'이 이헌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전의 민주 정부 10년이 그랬다고 해서, 현재 출마한 안철수-문재인 후보를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며, 근거가 희박한 주장인 셈이다.)
넷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아직 캠프에서 아무런 직책이 없다. 아직까지는 그냥 '멘토'일 뿐이다. 안철수 후보 캠프의 정책기획팀장은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이, 정책팀장은 김형민 (박선숙 의원) 보좌관을 역임했던 사람이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그간 금융 공공성과 금융 안정성의 강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이다.
민주 정부 10년 동안 '모피아'가 더욱 성행했던 진짜 이유
셋째, 인적 카르텔을 의미하는 '모피아'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이다. 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인 모피아라는 표현은 특히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한번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하필 '민주 정부' 10년 동안에 모피아가 활개를 치게 되었을까? 그것은 결론부터 말하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인사 정책'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경제와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경제적 영역을 '민주적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는 경제적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거나 "경제는 경제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교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실제로 지난 민주 정부 10년 동안 경제 부처 장관직은 경제 부처 공무원 출신에게 의탁-위임해버렸다. '민주적 통제'가 사라진 자리에, 경제 분야 전문가들의 인적 카르텔이 형성된 것은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렇다면, 폐쇄적인 인적 카르텔을 의미하는 '모피아 문제'를 올바로 극복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경제 분야에 '민주적 통치' 원리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즉, 경제 부처 장관직은 우리 시대의 경제적 개혁 과제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정치인 출신'으로 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왕이면 기재위-정무위-지경위-환노위 등의 경제 분야 상임위에서 좋은 활약을 했던 정치인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정책 노선, 통치 능력, 인사 철학이 검증의 핵심이어야
1원 1표의 시장 영역을,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로 통제하는 것. 바로 이것이 '경제 민주화'의 철학적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민주화의 원리가 '인사 정책'에서 구현되는 방법이 바로 경제 부처를 선출된 권력이 통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지난 민주 정부 10년의 과오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위 '이헌재 논란'은 잘못된 논점에 기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 올바른 토론이 되기 위해서는 1)다른 대선 후보를 포함하여, 안철수 후보의 (금융 분야) '정책 노선'이 무엇인지? 2)관료 사회에 대한 통치 능력은 어떠한지? 3)경제 부처 장관직에 대한 인사 정책의 방향성은 무엇인지? 를 묻는 것이어야 한다.
위에 대한 대선 후보의 답변이 분명하다면,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멘토'를 하건 말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심지어 '보수적' 관료의 멘토가 '진보적' 개혁을 위한 매우 소중한 밑거름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오히려 '이헌재 논란'이 금융 개혁의 방향성, 인사 정책의 원칙을 둘러싼 '본질적-생산적 토론'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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