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에서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19년 동안, 내게 우리나라 대통령은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다. 유신체제는 1972년 10월 17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7년 동안 존속했다. 나는 72년에 대학 입학해서 79년 2월에 졸업했고 74년 10월부터 77년 8월까지 군복무를 했다. 그러니까 유신시대와 내 대학시절은 대략 일치한다. 내가 알기로 박근혜 후보는 70년도 입학이고 문재인 후보도 72년도 입학, 79년 졸업이며 두 사람은 동갑내기다. 이번 대선에 나선 이 두 사람 모두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 같은 시대의 공기를 마시면서 대학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유신에 대한 첫 기억은 72년 10월 19일 저녁 안암동에서 신촌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버스가 청계천 삼일빌딩을 지날 즈음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황당한 긴급뉴스가 방송되었다. 곧바로 휴교령이 내렸고 다음날 아침에 학교 앞으로 가니 군인들이 교문을 막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두 달 가까이 집에 내려가 있으니 학기말에야 겨우 학교 문이 다시 열렸다. 내 기억에 대학시절 휴교하지 않은 학기는 입학한 그 해 봄 학기 단 한 차례 밖에 없었다. 그 후 대학 문은 심심하면 닫혔고 모두 긴급조치 때문이었다.
유신시대, 그러니까 70년대를 회고하자면 우선 그 시대는 대단한 고도성장의 시대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연평균 성장률이 10%에 가까울 정도의 고도성장이었다. 한국현대경제사 연구자들은 이 경제성장의 원천을 근면 성실한 노동력, 높은 교육수준, 저임금구조, 정부주도형 경제개발전략 등에서 찾았고, 국제금융환경도 지극히 우호적이어서 성장에 필수적인 해외자본 도입 역시 순조로웠다고 본다. 또 이 고도성장을 설명함에 있어서 박정희라는 개인이 가진 통치력 요소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고도성장은 실로 굉장한 성과였다. 이 시기 인구증가율을 아마 2-3% 수준이었을 게다. 갓 결혼한 차범근 부부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버스광고에 나오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높은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양적 성장은 새로운 일자리를 계속 창출하기에 충분했고 실업 문제는 사실상 없었다. 대학 졸업 무렵이면 대부분 취업합격증 한두 개는 손에 쥐고 있었을 정도였다. 오늘날의 심각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생각할 때 이러한 고도성장의 덕목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연히 반대 측면도 있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어용노조만 있었지 노동3권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고 노동운동은 공산주의자들의 체제전복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지금의 기형적 재벌체제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도 70년대였다,
▲ 박근혜 후보 ⓒ프레시안(최형락) |
그때의 교내 풍경을 돌이켜보면 학내에는 늘 정보과 형사들이나 중정요원들이 나무 밑 벤치 같은 곳에 숨어 앉아서 학생들을 감시했다. 시위가 예상되는 날에는 건물 안 각 층의 복도마다 형사들이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고 심지어는 강의실에 들어와 교수들의 강의내용을 직접 감시하기도 했다. 학생들 중에는 중정이나 경찰의 프락치도 있었다. 시위주모자나 참가자로 잡히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몇 년간 징역을 살았다. 학교는 물론 제적이었다. 또 교련이란 교양필수과목은 일주일에 1시간 1학점짜리였는데, 교련학점을 따지 못하면 방학 중에 신검 받은 뒤 영장 받고 곧장 군에 가야했다. 우리보다 몇 년 뒤 학번들은 1학년 초에 몇 주간 병영체험훈련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거리에서 불심검문은 다반사였고, 공공장소에서 정부 비방하다 재수없어 붙잡히면 그것도 긴급조치법 위반이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미풍양속을 해치는 경범죄로 단속하던 것도 이 숨막히던 시절이었다.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은 74년 초에 터졌고 늘 그랬듯이 이 반정부 학생운동도 공산주의자의 사주를 받아 일어난 것으로 발표됐다. 그해 여름, 영장이 나와 가을에 군에 가야할 처지라 마음이 뒤숭숭한 때였는데 어느 날 저녁 신문을 보니 군사재판에서 민청학련사건관련자 십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대문짝만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 중에는 고등학교 일 년 선배인 김병곤 형이 끼어있었다. 고교시절 그 깐깐하던 형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형이라니 싶어 잠시 동안 숨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공포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들의 죄목은 국가전복기도였다. 그 때 그 형 나이가 스무 하나 아니면 둘이었다. 그 뒤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모두 감형되었다. (김병곤 형은 그 후에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불행하게도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에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그 다음 해 군에서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형에 처해 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친 시대였다.
이런 시절이 나의 70년대였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 누구에게나, 그 시대가 잘못된 역사였다는 것은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명명백백하다. 돌이켜보면 민청학련 관련자 같은 이들이 없었더라면, 이들이 유신체제를 걷어내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민주사회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만큼 우리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설사 70년대의 경제성장이 축복이었다고 믿더라도, 그래도 유신체제는 잘못된 것이고 인혁당 사건은 유신시대가 강요한 광기의 독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근혜 후보를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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