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유엔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북한의 핵 문제 역시 아직 해결되지 않아 남북 간 협력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미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통해 공동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조만간 열릴 것으로 관측돼 북미 관계가 대결적인 상황으로 되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관계가 원만히 풀린다면 그에 맞춰 남북관계 역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부 간 협력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협력 사업도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지난 9월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을 만난 데 이어 3차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온 이기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회장을 만나 향후 남북 민간 협력의 방향을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어린이 및 육아 문제에 관심이 많아 관련 활동을 했던 이기범 회장은 현재 북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영양 및 의료, 교육 지원 활동을 벌이는 비정부기구(NGO)인 (사)어린이어깨동무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서울대 의과대학 소아과와 함께 북한에 어깨동무 어린이 병원을 설립했고, 평양의학대학병원의 소아병동을 건립하는 등 북한 어린이들의 의료 여건 개선에 힘을 쏟아왔다. 또 콩우유 공장, 샤프 연필 공장 건립 등을 통해 어린이 교육과 관련한 대북 지원 활동도 벌여왔다.
이기범 북민협 회장은 9월 만난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업을 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며 "구호 물품을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협력을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구체적으로는 지역 단위의 기술 교육부터 각 지역 단위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등을 협력하는 것"이라며 "2000년대 중반에 이러한 활동이 일부 진행됐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이러한 활동이 단절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측의 필요성이나 수요 등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개발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남북이 새로운 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런 부분부터 먼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 자격으로 10여 년 만에 평양을 찾은 이 회장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달라졌냐는 질문에 "평양의 경우 도시 개발이 많이 이뤄졌다. '창전거리'와, 과학자들이 모여 사는 '미래 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을 중심으로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는데, 이 세 지역은 앞으로 평양의 발전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의 심적 자신감이 느껴졌다. 초기에는 제재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이후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해내고 인민들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희망, 자신감 등이 엿보였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이 회장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시민들을 상대로 한 연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며 "북쪽 시민들이 문 대통령 연설을 듣고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남북관계와 대남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1998년 11월 첫 방북 이후 그동안 49차례 북한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 계기 방문이 50번째였는데, 이번에는 북한 측과 어떤 논의를 했나?
이기범 : 2009년 가을에 방문한 이후 거의 10년 만의 방북이었다. 공식 일정으로는 김영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과 만나 인민문화궁전에서 회의를 가졌다. 김 부위원장은 2004년 6월에 만수대의사당에서 면담한 적이 있었는데 이 만남을 기억하고 있어서 서로 반가워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특별 수행원 약 50여 명 중에 시민사회 관계자가 총 4명 갔는데 저와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 염무웅 겨레말 큰사전 이사장이 함께 했다.
남북이 민간 차원에서 협력하는 부분은 스포츠와 문화, 예술 등의 분야가 있는데 북한은 지금이 판문점 선언 이후인 만큼 판문점 시대에 맞게 새로운 방식으로 하자고 말했다. 다만 큰 틀에서 앞으로 잘 해보자는 정도 외에 구체적 합의를 이룬 자리는 아니었다.
물론 내년에 전국체전 100주년과 3.1운동 100주년 등의 행사를 남북이 함께 추진해보자는 이야기는 나왔다. 이러한 행사들은 비교적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다. 예술 공연과 스포츠 교류 등도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은데 순수 민간 차원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남북 정부 모두 아직 구체적인 안이 정해진 것 같지 않다.
다만 지난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전염성 질병의 유입 및 확산 방지를 위한 긴급조치를 비롯한 방역 및 보건‧의료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였다"고 한 만큼 정부든 민간이든 보건 의료 분야와 관련한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최근 북측 관계자들과 만나서 향후 협력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이기범 : 지난달 초에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대표단을 1년 6개월 만에 만났다. 북측은 남북 정상 간 합의대로 움직이겠다고 밝혔다. 지난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민간교류나 인도적 개발 협력 분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으니 앞으로 추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일단 우리끼리라도 시작할 수 있는 부분은 시작하자고 해서 협력 방향에 대해 합의한 부분은 있다.
북측 민화협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업을 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구호 물품을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협력을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인도적 지원에서 개발 협력으로의 전환은 이미 2000년대 중반 정도에 시작된 바 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고 난 뒤에는 식량과 물품 등 긴급구호적인 성격을 띤 지원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런 지원이 많았고 이후에는 어린이어깨동무와 같은 몇몇 단체들이 북과 힘을 합하여 병원이나 제약공장 등을 세우기도 했다. 개발협력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사회 전반의 발전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을 만드는 일에 협력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역 단위의 기술 교육부터 각 지역 단위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등을 협력하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에 이러한 활동이 일부 진행됐다. 어린이어깨동무도 우리민족서로돕기본부 등 다른 단체와 함께 일부 지역에서 초보적인 형태의 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이러한 활동이 단절됐다.
아무튼 지역단위의 개발 협력을 남북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도 딱 정형화된 의제로 북쪽이 제안한 것은 아니다. 북측의 필요성이나 수요 등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개발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협력이 필요한 부분으로 파악한 것이다. 즉, 남북이 새로운 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런 부분부터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역단위의 개발 협력은 우선 인프라 구축이 전제돼야 한다. 도로망, 철도, 전기를 비롯한 에너지 등의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 인도적 개발 협력을 할 수 있는 기반 구축은 남북 정부 간 협의해서 추진해야 할 사항이고 지역 개발이나 보건 의료, 식량 증산 등의 주체는 민간들이 되는 것으로, 통일부도 그런 식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으로 협의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북쪽 사회도 그동안 변화가 있어서 협력의 내용과 방식에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의료나 보건 같은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투자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간의 지원이 이루었던 성과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다.
북쪽의 보건의료 인프라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확실하게 판단하기는 이르다. 물론 새로운 병원들이 생기긴 했다. 옥류 아동병원, 류경안과종합병원, 평양산원 유선종양연구소를 비롯해 제약회사 등등이 생겼는데 전반적인 보건 의료 상황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투자도 더 많이 필요할 것이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인프라 부분 외에 농업 부문은 우리가 북한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나?
이기범 : 식량 문제와 관련해서 과거에 그 분야에서 활동하던 단체를 중심으로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에서 분과를 꾸려서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시민단체나 민간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지자체에서는 관심이 많으므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민간단체와 지자체가 협력하면 좋겠다. 서울시는 산림녹화에 관심이 크고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같은 경우 농업 협력 단체별 기구를 따로 만들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농업 교류 협력이 재개된다면 지자체가 많이 참여할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북한이 관광 산업에 관심 많다고 하던데?
이기범 : 관광 쪽이 아무래도 수익 측면에서 즉각적인 효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지난 판문점 정상회담 때 냉면이 상당히 주목받았는데, 북측에서도 이런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이 백두산에 함께 올랐는데, 백두산 관광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홍보가 어디 있겠나.
대북 제재, 비핵화와 함께 유연해져야
프레시안 : 2009년 이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북한에 방문했는데 실제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측면이 있었나?
이기범 : 나름 경제발전도 이뤄지고 자신들의 국가적 목표도 정해졌다고 보인다. 그러다 보니 북측도 여기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업의 틀을 정하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지역 개발과 과학기술협력인 것 같은데, 군이나 시 정도 규모의 개발에서 남북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 사람들의 심적 자신감이 느껴졌다. 초기에는 제재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이후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해내고 인민들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희망, 자신감 등이 엿보였다.
프레시안 : 그런데 지난 2014년 4월, 북한에서 모든 남한 민간 단체와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이 방침은 유효한가?
이기범 : 베이징에서 북측 민화협 관계자를 만나지 않았나. 이를 보더라도 북한의 그러한 방침은 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민간 차원의 남북 협력도 다시 시작하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 측도 5.24조치 해제 등 평화와 번영을 지향하는 차원에서 정책을 재검토 해야 할 것이다.
제가 북민협 회장 자격으로 이번 정상회담에 같이 갈 수 있었던 것도, 남북 정부가 민간 차원에서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발전적인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또 실제 북측에서 김영대 부위원장과 민화협 등 관계자들이 나와서 우리 측과 면담을 진행했고 그러한 의지가 확인됐기 때문에, 인도 분야에서의 개발 협력을 재개하고 활성화하도록 노력하자는 원칙은 새로 세워진 것으로 본다. 민간 협력 재가동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향후 어떤 협력 사업을 진행할 예정인가?
이기범 : 북쪽에 새로운 수요가 있으니까 일단 거기에 맞추는 사업을 진행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사업은 아니고, 과거 진행했던 지역 개발 협력 사업의 규모를 더 키우고 지역에 자급 자족적인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 분야는 그동안 쭉 했던 것처럼 보건 의료분야라든가 영양증진 분야인데, 이 역시 규모를 좀 더 키우고 평양의 수준을 우선 높이면서 이를 북측 전역으로 확산하는데 협력하는 일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북민협 차원에서도 각 분야별로 소속 단체들이 원하는 분과에 들어가서 북측이랑 같이 할 수 있는 사업을 개발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본격적인 사업을 어렵게 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다.
물론 제재가 있어도 인도적 물품은 반입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약품의 경우 통일부와 유엔 제재위원회, 필요한 경우에는 미국의 승인을 받아 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제재 예외를 신청하는 절차가 까다롭다. 예를 들어 북측에 비닐하우스를 세운다고 하면 비닐과 철제 프레임이 같이 들어가야 하는데 철제의 경우 제재 품목이다. 그렇다고 비닐만 제공하면 비닐하우스를 만들지 못한다. 제재 속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은 있지만 절차 자체가 굉장히 힘들고 물품이 제한돼있다.
이런 이유로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시작해 나가자는 생각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제재 품목에 해당되더라도 인도적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유엔과 미국에 설득하고, 이를 통해 하나의 사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남북 정상회담과 이어진 북미 정상회담으로 비핵화에 대한 진전과 한반도의 평화‧신뢰 구축이 동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동시적 접근이 이뤄지고 있고, 유엔의 모든 제재 결의안에는 상황 변동이 있을 경우 제재를 강화할 수도 있지만 약화할 수도 있다는 항목이 들어있다. 또 사실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해 몇 가지 진전 및 가시적인 결과를 내놓고 있는데 반해 제재는 한 점의 변동도 없다. 이런 부분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냉면과 백두산에 관심 보이던 젊은 세대, 이들에게 기회를 줘야
프레시안 : 지역 개발이나 교류 협력도 중요하지만 남북의 주민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중요한 부분 같다. 어린이어깨동무에서는 인도적 차원의 협력 외에 평화교육도 진행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5만 명 정도 평화교육에 참여했던데 이 역시 남북 간 중요한 프로젝트로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이기범 : 남북이 힘을 합해서 건물을 세우고 보건 의료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남북의 사람들이 만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평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6.15, 10.4 선언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남북의 해당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게 됐다는 측면이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로가 불필요한 적개심을 해소하고 대화를 통해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워크숍이나 교육을 같이 하는 것 외에 남북 주민들 간 이러한 의식의 저변이 확대되는 것이 중요한데, 이번 정상회담 때 평양시민들을 상대로 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이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그 성격은 정치적 사건이지만 이 연설 자체가 사회문화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북쪽 시민들이 문 대통령 연설을 듣고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남북관계와 대남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제가 당시 능라경기장에서 문 대통령의 연설을 듣는 시민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시민들의 얼굴에서 호기심과 놀라움 등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저의 주관이 개입된 느낌에 불과하지만, 찍어온 사진도 다시 보면 시민들이 마지못해 앉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름의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는 구별된다.
우리가 남측에서 했던 교육을 북측에서도 하려면 북측의 전문가와 함께 내용을 다듬고 자연스러운 교육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교육 차원에서 사람과 만남을 통해 자연스러운 평화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건 의료 사업을 하러 북측에 방문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대화하는 가운데서 서로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변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도 이 부분이 중요할 것 같다.
물론 현재 국면은 정부 주도로 비핵화를 진전시키고 남북협력에 필요한 기반과 제도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사회가 변하려면 역시 사람들 간의 만남이 중요하다. 민간 차원에서 특정한 현장에서 특정 분야의 사람들이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의논하고 부대끼기도 하는, 그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프레시안 : 최근 출간한 <남과 북 아이들에겐 철조망이 없다>에서 2008년부터 최근까지 초중고등학교를 보낸 학생들은 과거에 남북이 협력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저술했다. 남한 내에서도 남북 평화와 관련한 교육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증거 아닌가?
말씀하신 평화 교육은 중등 교육 과정에 관련 내용이 일부 있는데 필수는 아니고 선택이다. 일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말을 들어보니까 2008년부터 10년 사이의 사회적 분위기가 평화, 특히 남북평화를 가르치기는 조심스러워서 교육을 하기가 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교육은 꼭 남북관계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여전히 남측에서는 북측에 대해 호혜적이거나 상호주의적인 인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안상수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9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왜 평양에 태극기가 없었냐고 물어보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인공기를 휘날릴 수 있겠냐고 반문한 사례가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쳐 생각하시는 분들이 적잖이 있을 것 같다. 한 언론사 기자도 자기네 회사 지국을 평양에 만들어야 겠다고 하길래, 그럼 북측의 <로동신문> 지국을 서울에 만드는 건 괜찮냐고 하니까 그건 안된다고 하더라. (웃음)
우리가 북쪽과 관계에서는 상당 부분 호혜적인, 상호주의적인 의식이 마비되는 측면이 있다. 무의식중에 특별히 북에 대해 적대적 생각을 가져서라기 보다는, 이런 상호적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책에서 "한반도 평화는 단일국가를 이룬다는 바람보다는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전망으로 협력해야 한다. 시민들의 활발한 참여가 중요하다. 평화공동체라는 집으로 들어갈 사람들이 스스로 집을 지어야 한다. 자기 삶을 누군가 대신하는 과정으로는 불평등과 불합리가 되풀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남한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다면?
이기범 : 북한과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과 부정적인 시선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우선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꾸리는 사안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공정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 이건 그만큼 현재 우리 사회의 공정성이 많이 흐트러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이 세대들은 순수한 측면에서의 호기심도 있다. 제가 이번에 정상회담을 갔다 왔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냉면 어땠냐, 백두산은 어떠냐 등등을 물어보더라. 과거에 평양냉면 이야기를 꺼냈다면 남북관계 같이 중요한 문제를 두고 냉면 이야기나 한다면서 경망스럽다고 했을텐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다르다. 본인들의 피부에 와닿는 흥미로운 것이나 변화가 있고 영향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가 미래의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 예를 들어 이번에 10.4 남북정상선언 남북 공동 기념식이 평양에서 열린다고 할 때, 참석해야 할 분들이 많겠지만 젊은 세대들을 많이 참여시켰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북쪽에서도 여기에 맞춰서 젊은이들이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평화교육이 이뤄지는 것이 필요하다.
또 남북 간 끊어진 도로와 철도 복원하는데 수십조 원이 든다는 주장이 있는데, 실제 철도와 도로를 복원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 그리고 이걸 연결하면 어떤 이득이 있고 우리 삶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줘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남한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로, 대륙으로 넓힐 수 있도록 사고의 패러다임을 밝혀주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 10, 20대에게 기회를 주면 잘 참여할 것이다. 본인에게 영향이 있는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잘 북돋을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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