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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5.16 혁명 없었으면 우린 공산당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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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 "5.16 혁명 없었으면 우린 공산당의 밥"

89년 인터뷰서 "매도 당한 유신, 뭐가 잘못됐느냐고 설득해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지난해 선거관리위원회의 '디도스' 공격 파문이 불거졌을 때 곧바로 특검을 결정했다. 많은 이들의 생각보다 신속한 입장 표명이었다. 올해 초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 재수사가 이뤄지기 전에도 특검을 거론했다. 공천 헌금 파문에 측근이 연루됐다는 말이 나오자 빠르게 그를 당에서 제명했다. '국민 통합'을 꺼내들고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를 찾은 후 곧바로 봉하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요컨데 박근혜 후보는 새누리당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기성 정치 시계보다 더 빠르게, 기성 정치 관행보다 통크게 행보를 했다. 김종인, 안대희 영입만 봐도 기대 수준을 넘어서는 행위를 통해 대중에게 '충격'을 주는 행보를 해 왔다. 견고한 박근혜 지지율의 비밀이다.

그런 그가 유독 '유신 미화' 논란과 관련해 예측 가능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박 후보의 핵심 측근은 "유신 때문에 수출 100억 불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박 후보 본인도 한 토론회에서 유신을 "국가 발전 전략"으로 묘사하며 이를 높이 평가했다. "5.16은 불가피한 선택"이기 때문에 긍정과 부정 평가가 혼재돼 있었다면 유신은 "국가 발전 전략"이기 때문에 긍정적 평가가 부정적 평가를 누른다. 그는 다만 "본의 아니게" 아픔을 겪은 분들이 심정을 "깊이 이해하고" 있고, "위로의 말"을 보낸다고 했다. 그게 끝이다. '유감'도 아닌 '위로'다.

▲ 89년 당시 <박경재의 시사토론>에 출연한 박근혜 후보ⓒMBC 화면 캡쳐

박 후보는 심지어 당 대변인 명의의 사과를 부인했다. 이미 논평이 나간 후인데, 이를 뒤집었다. "절대 사과는 안하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버렸다. 새누리당의 고위 관계자는 "그게 박근혜 후보의 '소신'인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다.

박 후보의 '유신관'은 일관적이다. 그것이 박 후보의 '소신'이고 '원칙'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꾸준히 유신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밝혀왔다.

관련해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1989년 5월 19일 당대 인기 시사 프로그램이었던 MBC <박경재의 시사토론>에 출연해 인터뷰한 내용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박 후보는 이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생산을 자체적으로 ,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 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야 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 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유신 헌법 제정 등과 관련한 비판에 "집권연장을 위해서 안보를 이용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때 그런 상황이었는가 하는걸 잘 연구를 해보고서 얘기를 해야지, 그냥 그렇게 갖다 붙여서 얘기를 한다는 건 자라나는 청소년과 우리 역사에 죄를 짓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당시 신민주공화당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겠다"고 한데 대해서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며 "만약에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는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요. 지금, 그동안 매도당하고 있던 유신, 5·16 거기에 대해서 나는 이런 이런 소신을 가지고 참여했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그것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어떤 비난을 당장은 받는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것을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고 설득시킬 수 있어야 되고, 그런게 정치죠"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가장으로서의 박정희 씨를 어떻게 평점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버지요? 저는 아버지에 대해선 그리운 마음으로 머리끝까지 차있고, 또 어떻게 평점을 내리고 말고 하는 것보다도 아유, 이렇게 억울하게 그 동안 당하셨는데 이걸 어떻게 벗겨 드려야 돼나 그런 생각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저한테 그런 걸 물으신다는게…"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2007년 "구국의 혁명", 2012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언급한 5.16쿠데타와 관련해 "공산당의 밥"이 되도록 하지 않기 위해 일어난 혁명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5·16혁명도 그런 의미에서 4·19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저는 그렇게 보구요. 또 5·16이 있었기 때문에 4·19때 희생된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목숨까지 버렸는데 4·19후 그 혼란의 와중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다음은 박 후보가 5.16과 유신에 대해 밝힌 인터뷰 내용이다.

- 이왕 아버님을 위해서 말씀을 쭉 하셨는데, 오늘 제가 여쭤본 얘기 중에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죠.

5·16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 인터뷰가 된 것이므로 5·16에 대해 한마디를 더 하자면 4· 19의거는 말하자면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 희생을 무릅쓰고 일어난 혁명인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5·16혁명도 그런 의미에서 4·19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저는 그렇게 보구요. 또 5·16이 있었기 때문에 4·19 때 희생된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목숨까지 버렸는데 4·19 후 그 혼란의 와중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요.

또 더 나아가서 3·1운동도, 6·25사변도, 그때 많은 우리 선조가, 앞서간 분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희생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으셨는데 그것도 5·16때 나라가 공산 당한테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희생이 값진거고 헛되지 않은거지, 만약에 나라가 여차직 했다 하면 그 희생이 다 헛된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전 그런 의미에서 5·16을 생각하고 싶구요. 마지막으로 아까 유신에 대한 얘기가 중간에 끊어져서 말을 못했는데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래야 땔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주국방과 자립 경제를 그 기간안에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또 아버지가 생전에 유비무환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유비무환 정신이 이 자주국방에서와 같이 잘 나타날 수가 없 어요.

뭐냐하면 우리가 그 동안 몇 십년동안 미국에 의존해서 국방을 했는데, 나라를 지켜왔 는데, 그 동안 미국이 우리의 국방을 도와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미국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나라에 의존해서 지켜야 한다고 할 때 그 서러움, 그 허망함이라는건 아버지 시절에 있었던 일로 잘 나타난다고 생각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65년도에 아버지와 존슨 대통령이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 협상을 하시고서 곧 이어서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미국대사로 와있던 브라운씨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 각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단단히 약속을 받은 게 있어요. 그것은 한 국군을 현대화시키겠다는 것, 또 하나는 한국과 사전협의 없이 절대 미군을 뽑아가지 않 겠다는 것,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4년후에 닉슨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그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자 72년까지 뽑아가겠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어떤 협상도 소용이 없었지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뽑아가는 판이었으까.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군대의 사정을 보게되면 그 당시 미국의회 청문회에서도 다 증언이 되었던 얘긴데 그때 우리나라의 군장비가 6·25 당시때 것, 2차대전때 것, 이런 것이 섞여 가지고 완전히 고물부대라는 거죠. 그런 것을 미국에서 뻔히 알면서도 그냥 그 정책에 의거해서 그대로 뽑아가겠다는 것이 그 당시 우리나라로선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1대 1로 대결해도 힘든, 우리가 그땐 승산이 없던 때였죠. 그런데 북한은 그때 중공과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대통령이 그 다음에 포드 대통령으로 바뀌니까 더 이상 추가 철군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몇 년 못가서 카터가 당선되니까 이번에는 또 철군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나왔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 남에게 의존해서 국방을 하게 될 적에는 그쪽의 정책에 따라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변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유비무환 말씀을 아까 드렸지만, 71년도에 닉슨 대통령이 여기서 7사단을 뽑아갈 때 잔여 2사단에 대해서 언제 뽑아간다는 언질을 미국에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미국에게 약속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끊나면 반드시 잔여부대에 대해서도 얘기가 있을거다, 그때, 미리 짐작을 하시고서 71년부터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굉장히 서두르셨어요. 그러나 그 당시의 그런 방만한 체제를 갖고는 빠른 시일내에 방위산업과 자주국방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셔 가지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셨죠. 72년도에. 그것이 유신이죠. 그리고 73년도에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약속 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부족해서 거기에 우리 자체 전력증강 계획을 추가시키셨고, 75년도에는 우리나라의 국방비로는 도저 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방위세를 신설하셨어요.

그래서 75년까지 그렇게 하신 후에 아버지 계획은 1980년도까지는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어서 1대 1로 북한하고 대결할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그런 체제를 갖출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또 경제면에 있어서는 4차 5개년 계획이 1981년도에 끝나는데 그것도 1년 앞당겨서 1980년도까지 4차 5개년 계획을 마무리 지어 가지고 그때까지 자립경제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시겠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말씀이 그때부터 즉 71년부터 그렇게 자주국방을 위해서 미리미리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80년도까지 자주국방을 이루겠다는 계획이 우연히도 카터 대통령이 4, 5년 후에 미군을 마저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그 연도하고 우연히도 맞아 떨어져서 만약에 미리 그런 대비를 안했다면 카터 대통령의 그런 정책이 나왔을 때 상당히 당 황했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생산을 자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 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야 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 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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