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9일 아침 서울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인혁당 사건 사형수 8명의 가족들은 그랬다. "머라꼬?" 누군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통곡을 쏟아내며 주저앉았다. 모두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끝이었다. 가족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18시간만인 그날 새벽 4시, 도예종 씨(51·삼화토건 회장), 서도원 씨(52·전 대구매일 신문 기자), 하재완 씨(43·양조장 경영), 이수병 씨(37·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 씨(39·경기여고 교사), 송상진 씨(46·양봉업), 우홍선 씨(45·한국골든 스탬프사 상무), 여정남 씨(31·전 경북대 학생회장) 등 8명은 그렇게 교수형으로 목숨을 빼앗긴 뒤였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혁당을 재건하여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대통령 긴급조치 4호위반·국가보안법위반·내란예비음모·내란선동죄 등이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사형수들에게 관행적으로 보장되던 '감형탄원'의 실낱같은 희망까지 박탈한 채, 사형 확정 24시간도 안 돼 교수형을 집행한 것은 유신선포 이후 날로 증폭돼가는 '유신반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단언컨대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아니고서는 '사형확정 18시간만의 교수형 집행' 같은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조치는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단호한 모습과 함께 다들 '겁을 내는'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했다.
서대문 형무소 측은 유족들에게 사형수들의 시신을 다음날인 4월10일 인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천주교 측과 함께 희생자 8명에 대한 장례식을 명동성당에서 치르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이튿날 오전, 사형수들의 시신을 실은 장의차 행렬이 명동성당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경찰이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장의차는 성당 안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경찰에 의해 강제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화장터로 이끌려갔다.
시신들은 유족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화장되었다. 중앙정보부의 혹독한 고문으로 사형수들은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고 탈장도 된 참혹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모습 못 보게 하려고 강제 화장 시킨 것이었다고 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과 유족들이 정부에 진상공개를 요구하자 저명한 교수 출신의 황산덕 당시 법무부 장관은 "더 이상 문제 삼으면 반공법 위반으로 처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명동성당 장례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유신독재는 인권 탄압을 중지하라고 그때 악을 쓰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추방되었다. 1974년부터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국내외에 여론을 환기 시키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조지 E 오글 목사도 국외추방을 면치 못했다. 74년 12월 하순 동아일보(당시의 동아일보였다) 광고탄압이 시작되었고 바로 이어 유신반대 데모의 온상이라 하여 서울 문리대가 해체되었다. 미쳐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 집행' 2달 여 전, 박근혜 후보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정권 신임 국민투표' 투표함에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매일경제 |
그토록 제정신들이 아닌 70년대 중반이었던지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놓고, 그것도 장기간 혼동·착각 하는 실수를 한 것도 일견 이해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을 적발했다"며 발표한 내용이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당시 한일 회담을 반대하는 시위가 거세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한 '모조품'이었다.
모두 57명을 적발해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으나, 다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고 13명만이 기소되었다. 오죽했으면 '박정희 정권의 공안 검사'들이 "기소할 만한 가치가 없다"며 기소장에 서명을 회피하는 바람에, 당직 검사가 기소장에 사인을 하기도 한 사건이었다. 기소된 13명중 7명이 반공법상 '고무찬양'등으로 징역 1~3년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6명은 집행유예였다.
이 사건의 관련자였던 박범진 씨(전 민주당·신한국당 국회의원)가 저서에서 "(1차)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다"며 "그 조직에 입당할 때 문서로 된 당의 강령과 규약을 보았고, 북한산에 올라가 오른손을 들고 입당선서를 한 뒤 참여했다"는 기록을 남긴 게 박후보 오해의 발단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차 인혁당 사건이 터진 1964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만12세였다.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관련자들이 사형선고까지 받은 2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고 △(2차 인혁당에) 입당할 때 문서로 된 당의 강령과 규약을 보았으며 △산에 올라가 오른손을 들고 입당선서까지 했다는 박범진 씨의 이야기를 '(2차 인혁당) 조직에 몸 담았던 분들의 증언'으로 알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박근혜 후보는 "그런 것까지 감안해 역사 판단에 맡겨야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박근혜 후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이야기지만, 만의 하나 사실이라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집권 여당의 확정된 대선 후보로서 치명적인 '법률적 무지'에 경악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알다시피 2차 인혁당 사건은 1975년 4월 죄 없는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2007년 1월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사건이다. 교수형에 처해진 8명의 유족에게 국가는 247억 원을 주라는 배상금 지급 판결도 내려졌다.
- 2007년 8월21일의 하급심에서는 원금 245억 원에 이자 392억 원해서 637억 원을 배상토록 했으나, 대법원 판결에서 '신영철 대법관'이 지연 손해금등을 조정해 247억 원이 되었다 -
"1975년의 유죄판결과 2007년 1월의 무죄판결 등 서로 다른 두 개의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는데 아버지는 왜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느냐"는 게 박 후보의 항변이었다. 그게 2007년 무죄판결 이후 박 후보가 지녀온 불만이었다. 2007년 재심 판결 직후 박 후보는 말했다. "법원에서 정 반대의 두 가지 판결을 내렸다. 역사적 진실은 하나밖에 없으니 역사가 밝혀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말인즉은 그럴 듯 하지만 무지의 극치요 비극이었다. 박근혜 후보의 비극은 '재심'의 뜻을 몰랐던 데서 시작되는 듯하다. 재심은 한마디로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이다. 유무죄 확정 판결이 내려졌더라도 중대한 사실 오인 등이 드러났을 때 과거의 판결을 시정하는 비상구제 절차다. 1975년의 유죄 판결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32년 뒤 재심 절차가 이루어졌고, 그 재심에서 억울하게 교수형을 당한 8명이 사실은 무죄였다고 판결한 것이다.
박범진 씨의 '증언'이 나온 것은 2010년이었다. 1차 인혁당사건의 '증언'을 2차 인혁당사건의 '증언'으로 박 후보는 머릿속에 새겨 놓은 것 같다. 그것도 잘못이었다. 급한 마음에 '답'만 외워 마구 주장 할 일이 아니었다. 5·16 쿠데타나 유신도 그처럼 피상적으로 접근해 결론을 내려놓은 게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든다. 1975년 유죄판결 자체에 대한 박 후보의 인식에도 문제가 있다.
사형당한 8명에게 적용된 죄목 가운데 첫 번째는 긴급조치 4호였다. 일련의 긴급조치들은 전두환 정권 때도 여러 차례 위헌 판결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한 적용 법조항이 훗날 위헌 판결을 받았다면 그 사형선고는 당연히 인정받을 수 없는 판결이 된다. 2007년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판결'과 '위헌 결정으로 효력이 없어진 긴급조치위반이 적용된 사형판결'을 서로 대등한 위치에 놓고 '두개의 판결'이라 할 수는 없다. '비중이 같은 두 개의 서로 다른 판결이므로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박 후보의 주장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야기를 정리할 때다. 박근혜 후보는 이제 '재심'의 의미도 알았을 것이다. 2차 인혁당사건을 놓고 '여러 증언도 있다'고도 말 할 수 없게 되었다. 역사와 미래에 맡기자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이찬형은 일제 때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판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가 어느 날 잘못 판단해 어떤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 사람이 무죄라는 것을 안 것은 사형이 집행된 뒤였다. 이찬형은 법복을 벗었다. 엿판과 가위를 들고 전국을 누볐다. 가족도 모르게 3년 동안 전국을 헤맸어도 괴로움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금강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는다. 그가 지금 이 나라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추앙 받는 효봉(曉峯) 스님이다.
한명도 아닌 8명의 억울한 목숨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판사의 잘못이라고 몰아칠 수도 없게 되어있다. 지금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다 없다. 유신의 한복판에서 아버지의 장기집권을 위해 몸을 던지던 딸이 남아있다. 어쩔 것인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 피에타에서는 지난 잘못을 씻어내기 위한 주인공의 처절한 속죄 과정이 눈물겹게 그려지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마를 땅바닥에 대야한다. 그것은 효도하는 길이기도 하다.
▲ 12일 박근혜 후보의 발언에 사과를 요구하며 새누리당사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인혁당 피해자 유족들.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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