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장관, 검찰총장, 국세청장, 지검장, 청와대 수석...."
권력기관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사람들이 10대 재벌사들의 사외이사로 대거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기업 경영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췄다면 기업경영에 대한 감시와 견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재벌들의 `바람막이용' 역할을 하거나 `거수기' 기능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 `권력 출신' 비중 여전히 높아
10일 재벌닷컴 분석 결과, 10대 그룹 상장계열사 사외이사는 지난 6월말 현재 330명으로 작년 같은 시기보다 7명 감소했다.
하지만 검찰 출신 사외이사는 22명에서 27명으로 5명 늘었고 공정거래위 출신은 8명에서 10명으로, 행정공무원 출신은 18명에서 20명으로 각각 증가했다. 1명이었던 관세청 출신은 2명이 됐다.
반면 장관급은 2명이, 금감원 출신과 감사원 출신은 각각 3명과 1명이 줄었다. 국회의원 출신 사외이사와 국세청, 경찰, 판사 출신 등은 숫자에 변동이 없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직군인 `대학교수'는 작년보다 4명 많은 131명(39.6%)으로 집계됐다.
한편 변호사(13명)와 사회단체(0명), 언론인(5명), 외교관(0명) 출신 사외이사는 작년보다 1∼4명씩 감소했다.
특히 경영인 출신은 48명으로 작년보다 2명이, 금융인 출신은 18명으로 5명이 각각 줄었다.
◇ 사외이사로 일하는 고위직 출신들
10대 재벌사에는 권력출신 인사들이 수두룩하다.
장관 출신으로는 이건춘 전 건설부 장관이 GS 사외이사로 일하고 있으며 이환균 전 건설교통부장관(SK C&C), 김대환 전 노동부장관(LG),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장관(대한항공), 김종민 전 문화부장관(한화증권),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SK이노베이션)도 재벌기업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장관은 삼성생명과 SK가스 사외이사로 동시에 이름을 올리는 등 2개 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하는 사례도 있었다.
법제처장을 역임한 남기명(LG화학), 한영석(SK C&C) 전 처장도 사외이사로 일하고 있다.
국회의원 출신 사외이사로는 윤건영(두산중공업), 정의용(한화증권) 전 의원이 있다.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인 현정택, 이윤재 전 수석은 각각 대한항공과 LG의 사외이사 명단에 포함됐다.
이재훈 전 지식경제부 2차관(두산인프라코어), 권태신 전 재정경제부 차관(SK케미칼), 김상희 전 법무부 차관(LG전자) 등 차관 출신 사외이사는 10명이었다.
법조계 고위층 출신 인사들도 대거 재벌기업 사외이사로 포진했다.
검찰총장 출신으로는 정구영 전 총장이 두산엔진, 이종남 전 총장이 삼성생명, 송광수 전 총장은 GS리테일 사외이사로 각각 일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장 출신인 이태운(현대모비스), 오세빈(현대자동차) 전 원장과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변동걸(삼성정밀화학) 전 원장 등도 법조계 고위직을 지낸 뒤 사외이사가 됐다.
고검ㆍ지검장을 역임한 문효남 전 부산고검장(삼성화재), 김진환 전 서울지검장(GS), 신종대 전 대구지검장(롯데칠성), 박상옥 전 서울북부지검장(현대건설), 이훈규 전 인천지검장(SK이노베이션) 등 5명도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이밖에 각 지방국세청장 출신이 10명이나 사외이사 명단에 포함되는 등 세무 관련 고위 공무원의 사외이사 진출도 두드러졌다.
특히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지낸 오대식(두산), 박찬욱(현대모비스), 전형수(현대제철), 이주석(대한항공) 윤종훈(한국공항) 전 청장 등이 사외이사로 진출했다.
◇ 사외이사, 로비창구로 변질 우려
10대 그룹의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의 70%를 넘어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들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그러나 사외이사 문제에서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 이기웅 간사는 "건전경영 등 사외이사제도 도입의 취지는 도외시한 채 검찰과 관계기관 등에 대한 로비 창구로 접근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상장사 사외이사 중 대학교수 비중이 가장 높은 점도 도마에 올랐다.
이 간사는 "교수 출신 사외이사가 많은 것은 거수기로 활용하기 쉽다는 점도 있지만 역시 하나의 중요한 로비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문기고 등을 통해 기업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고, 학계의 이론적 뒷받침을 받자는 것이고, 실제로 대기업을 비판하는 교수는 연구과제 채택이나 학회 발표 기회 등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가 많은 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관계자는 "우리와 달리 경영인 사외이사 비중이 높은 미국 등 선진시장에서는 오히려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양성은 `경영감시'라는 사외이사제도의 도입 목적이 달성된 이후에 강조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이 간사는 "현실적으로 사외이사의 다양성이란 것이 더 많은 영역에 로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성이 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한 데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을 실현한다는 목적이 더 크다"면서 "그런 역할을 전혀 기대하기 어렵게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 "시외이사 진입요건 강화해야"
사외이사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사외이사 진입 요건과 추천과정의 투명성이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권력층 인사가 로비용 사외이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격사유를 명시하고, 직장에서 퇴직한 이후 사외이사 진입까지 일정한 냉각기간을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전관예우를 막기 위해 고위 공직자의 업무 유관기업의 사외이사가 되는 것을 제한하고, 검찰 등 특정 직군 출신의 사외이사 비율이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게 하는 방안도 제시된다.
사외이사가 경영감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기웅 간사는 "그동안 명확한 책임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사외이사들은 사실상 가만히 앉아서 혜택을 보며 로비 창구를 원하는 기업체와 `윈-윈'(win-win)을 할 수 있었다"면서 "1차적 개선을 위해서는 사외이사의 권한과 책임을 명백히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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