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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 고려 불상의 아름다움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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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 고려 불상의 아름다움에 빠지다

2018년 10월 고을학교는 <이천고을>

*강의 마감됐습니다^^

가을 빛깔로 꽉찬 10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0강은 평지돌출형의 낮은 삼국시대의 산성과 고려시대의 마애불과 석불입상, 그리고 고려시대 탁월한 외교가 서희, 안동김씨 중심인물인 김조순과 김좌근, 강화 광성보 전투의 영웅 어재연의 유적을 찾아 <이천고을>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천의 명산 도드람산. 산신령이 효자의 목숨을 구해준 전설을 전하고 있다.Ⓒ이천시

고을학교 제60강은 2018년 10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0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서이천IC-백사면(영원사/육괴정/반룡송/이천백송/김좌근고택)-부발읍(서신일묘역/김조순묘역)-이천시(갈산동석불입상/애련정/안흥지/이천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관고동석불입상/설봉서원/영월암)-마장면(장암리마애보살반가상/이평리석불입상)-대포동석조여래입상-모가면(소고리마애삼존불/소고리마애여래좌상/권균묘역)-율면(어재연생가)-장호원읍(어석리석불입상/선읍리석불입상/신흥사/설성산성)-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이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0강 답사지인 <이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이천의 진산은 설봉산
이천의 지형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습니다. 동쪽으로 연대산이 여주와, 서쪽으로 양각산, 건지산, 대덕산, 마옥산, 노고산, 모룡산이 용인·안성과, 남쪽으로 마이산, 임오산, 팔성산이 충북 음성과 경계를 이루고 중앙에는 이천에 설봉산이, 장호원에 설성산과 백족산, 봉미산, 저명산이 솟아 있습니다.

산지 사이로 이천의 중심 하천인 복하천 지류가 북쪽 또는 동북쪽으로 흘러 여주로 향하다가 남한강으로 흘러들고 장호원에 있는 청미천은 백족산을 끼고 북류하여 음성과 경계를 이룹니다. 하천 유역에는 평야와 구릉지가 발달해 있으며 평야는 충적토양으로 땅이 기름져서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설봉서원은 고려시대 뛰어난 외교관 서희를 모신 서원이다.Ⓒ이천시

설봉산(雪峯山 394.3m)은 이천의 진산으로, 부악산·부학산·무학산으로도 부르는데 칼 모양을 한 날카로운 칼바위와 고깔을 쓴 승려가 바라를 진 형상을 하고 있는 고깔바위가 산중에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 이 일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칼바위를 중심으로 설봉산성 등 산성 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으며 신라시대 성터로 여겨지는 곳에 남천정 터와 봉화대 터가 있습니다.

설성산(雪城山 390m)은 그리 높지 않으나 첩첩 산줄기가 험준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군사상의 요충지로 알려진 곳이며 축성연대 미상의 고성지가 남아있습니다. 설성이라는 명칭은 명을 받고 성을 쌓는데 이상하게도 성이 놓일 자리로만 띠를 두른 듯 백운이 내려 앉아 백운의 자취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설성이라 이름 지었답니다.

도드람산(猪鳴山 349m)은 홀어머니의 병환에 특효가 있다는 석이버섯을 따기 위하여 효자가 절벽에 밧줄을 매고 석이를 뜯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산돼지 울음소리가 들려 올라와 보니 밧줄이 바위 모서리와의 마찰로 거의 끊어져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산신령이 효자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라 하여 ‘돗(돼지) 울음 산’이 되어 세월과 함께 도드람산으로 변했습니다.

마국산(馬國山 445m)은 ‘마한의 산’이라는 뜻으로 마옥산으로도 불립니다. 조선시대까지 산상에 검은색 말 동상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으며 국바위, 병풍바위, 말바위, 구묘바위 등 전설을 지닌 기암괴석들이 많습니다.

노성산(老星山 310m)은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곳으로 전설에 의하면, 노성산·마국산·설성산 사이에 용맹한 말이 나타나자 세 개의 산에 주둔하던 장수가 서로 차지하려 다툼을 벌이면서 이기는 순서대로 말의 머리, 몸통, 꼬리를 차지하기로 했답니다. 노성산 장수가 말 머리를, 마국산 장수가 몸통을, 설성산 장수가 꼬리를 차지해 노성산 정상에 말머리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대덕산(大德山 308.5m)은 산 모양이 마치 황소 등허리와 같이 생긴 큰 언덕이란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고려 때 조정의 절인 고달사에 있던 국사를 비롯한 고승대덕들이 노후에 대덕산에 있던 입석사에 주석하였으므로 고달사에 들린 고려 황제들이 고승대덕들을 뵈려 행차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마이산(馬耳山 473m)은 충북 음성과 경기 안성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달리 망이산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저기 사방을 관망하는 산(望伊山)' 또는 '오랑캐나 적의 동태를 살피는 산(望夷山)'이란 의미로 말의 형상과는 전혀 상관없으며, 마이산 정상 봉수대가 있는 곳과 주변 산록에 망이산성과 봉수대 터가 남아 있습니다.

▲설봉산성은 고대 삼국의 요충지였다.Ⓒ이천시

삼국시대의 산성들
이천에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산성들이 남아 있습니다.

설봉산성은 설봉산의 칼바위를 중심으로 3만여 평의 고원지대에 삼국시대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달리 부학산성, 무학산성, 관고리성이라고도 부릅니다. 산성은 본성과 관측용 부성 2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벽 대부분은 흙으로 되어있지만 군데군데 돌로 쌓은 석축도 보입니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차지하고 신라의 삼국통일 때 요충지였던 곳으로 원토층에서는 백제의 토기들이, 점토층에서는 신라의 토기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은 시기의 한성백제 때 축성되어 신라시대 때 보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산성 곳곳에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평기와, 토기, 자기, 석제 류, 철제 류 등이 출토되었고 인공 주춧돌과 장대지, 제사 터, 군기를 꽂았던 바위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설성산성은 설성산 주능선과 그 동쪽 골짜기 약 2~3만여 평을 에워싸고 있는 포곡식 석성으로 현존하는 이천의 산성 중 가장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험준한 산세와 절벽 등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입니다. 성안에는 우물로 추정되는 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 신흥사에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완전히 메어진 상태이나 석축의 일부와 함께 배수구의 흔적이 보입니다.

설성산성은 신라 산성이라는 것 외에는 정확한 축성 시기나 목적 등이 밝혀져 있지 않으며, 설성이라는 명칭에 관해서는 신흥사에 비치된 <전설기>에 “설성은 신라 제17대 내물왕 시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했다고 전하며, 성을 쌓을 자리로만 띠를 두른 듯 백설(白雪)이 내려 그 자취를 따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설성이라고 하였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더 자세한 전거는 아무것도 없으며, 특히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런 내륙지방에까지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엔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망이산성은 마이산을 중심으로 약 3km 정도 성곽이 펼쳐져 있는데 토축식인 내성과 석축식인 외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봉수대가 있는 내성이 주성으로 보이며 남쪽의 산세는 절벽으로 험준하고 북쪽은 낮은 평원이 전개되는 것으로 보아, 남쪽의 적군을 대비하여 쌓은 성으로 내성은 백제시대에 망이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았고 외성은 통일신라시대에 망이산 북쪽으로 낮은 평원을 이룬 외곽 산봉들의 능선을 따라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습니다.

▲육괴정은 김안국, 강은, 오경, 임내신, 성담령, 엄용순 등 여섯 선비가 시회와 학문을 강론하며 우의를 기리고자 정자 앞에 각각 한 그루씩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이천시

왕건이 하사한 ‘이천’이란 지명-“큰 내를 건너 이로웠다”
이천(利川)은 고려 이전에는 남천, 남매, 황무 등으로 불리어 오다가 왕건이 후백제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하여 복하천에 이르렀을 때 홍수 때문에 하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서목이라는 사람이 인도하여 무사히 건널 수 있었는데 이후 왕건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가상히 여겨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글귀에서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와 ‘이천’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지명의 뜻은 “큰 내를 건너 이로웠다”는 것으로 주역에 의하면 ‘이섭대천’은 대체적으로 “학문과 덕을 쌓고 몸을 기르면 험난한 과정이라 할 수 있는 큰 내를 건너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며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천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 영지였으며 고구려 장수왕 63년 고구려에 속하여 남천현이라 칭하였고 551년 신라 진흥왕 때 남천주로 군주를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 황무현으로 개칭되었고 광주의 영현으로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36년 태조가 이천군이라 칭하였고 고종 44년에 영창이라 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8) 남천군으로 승격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이천현으로 감무를 두었으며 태종 13년에는 현감을 두었고 1444(세종 26) 도호부가 되어 부사가 부임하였고 1894 갑오경장 때 이천군이라 칭했습니다.

1938년 읍내면이 이천읍으로, 1941년 청미면이 장호원읍으로, 1989년 부발면이 부발읍으로, 1996년 이천군이 이천시로 승격되었습니다.

이천의 유적은 읍치구역에 향교가, 그 밖의 여러 곳에는 서원, 고택, 정자가 남아 있으며 특히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인 김조순의 묘역과 그의 아들 김좌근의 고택이 있습니다.

이천향교는 망현산 밑에 자리 잡고 있으며 1401년(태종 원년) 감무 변인달이 부임하여 대성전을 세우고 안흥리에 있던 안흥정사의 생도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학문을 닦게 하고 첫 제향을 했다고 합니다. 이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1444년(세종 26) 이후에는 교생 정원이 90명이나 되었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로 전면의 강학공간에는 명륜당과 동재, 서재 내삼문을 들어서면 배향공간으로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으며 수차례 중건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영월암은 설봉산 기슭에 위치하며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온다.Ⓒ이천시

뛰어난 외교술의 서희 모신 설봉서원

설봉서원은 1564년(명종 19) 이천부사였던 정현공이 유림의 공의에 따라 지금의 이천시 안흥지 주변에 세운 향현사로 원래 서희를 봉향하였고, 1565년(명종 20)에 이관의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1592년(선조 25) 설봉산 아래로 옮겨 설봉서원으로 명명되면서 김안국을 추가 배향하여 오다가 1857년(철종 8) 최숙정을 함께 배향하여 사현이 봉안되었습니다.

서희는 960년(광종 11)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 내의시랑, 병관어사, 내사시평장사, 태보, 내사령까지 이르렀으며,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올렸는데 972년에 여러 해 동안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직접 사신으로 가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993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습니다.

서신일 묘역은 서희의 조부인 서신일의 묘역으로 효양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신일은 이천서씨의 시조로 신라의 아간대부를 지냈으며 사슴으로 변한 신인의 아들을 구한 일로 80세의 나이에 아들 서필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육괴정(六槐亭)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난을 피해 낙향한 남당 엄용순이 건립했는데 처음에는 초당이었으나 수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육괴정이란 이름은 김안국, 강은, 오경, 임내신, 성담령, 엄용순 등 여섯 선비가 모여 시회와 학문을 강론하며 우의를 기리고자 정자 앞에 연못을 파서 연을 심고 각각 한 그루씩 모두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지금은 본당과 이를 둘러싼 담장과 대문으로 되어 있어 정자가 아닌 사당의 형태로 남아 있는데 본당 안에는 엄용순의 자손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엄유윤의 충신정문과 ‘남당엄선생육괴정서(南塘嚴先生六槐亭序)’ ‘육괴정중수기(六槐亭重修記)’등의 현액이 걸려 있습니다.

엄유윤은 1562년(명종 17)에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서생으로 의병을 이끌고 세종의 영릉을 호위하다 삼일대전에 활이 떨어져 여주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습니다. 의관을 수습하여 백사면 경사리 사옥촌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1893년(고종 30)에 통정대부이조참의에 증직과 더불어 정려문이 내려져 육괴정에 걸려 전하여 오고 있습니다.

애련정(愛蓮亭)은 1474년(성종 5) 이천부사 이세보가 세웠다고 하는데 정자 아래 사각형의 연못(方沼)을 파고 연꽃을 심었고 영의정이던 신숙주에게 작명을 부탁하여 애련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김안국, 월산대군, 서거정, 조위, 강경서, 김진상 등이 애련정을 소재로 한 시를 남겼습니다. 또한 여주 영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역대의 국왕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중종이 이곳에서 양로연을 베풀었고, 숙종, 영조, 정조가 방문한 기록도 <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소고리 마애여래좌상은 선이 정교하고 몸에 균형이 잘 짜여 있으며, 앙연좌 위에 결가부좌한 당당한 모습이다.Ⓒ이천시

미국 함대에 맞서며 전사한 어재연의 생가
어재연 생가는 신미양요 당시인 19세기 초 건물로 추정되며 안채, 사랑채, 광채는 모두가 원형 없이 변형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었고 건물의 질도 우수하고 광채는 20세기 초 건물로 여겨지며 사랑채 역시 이때 개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재연은 1823년 이천시 율면에서 태어나 1862년 관계에 진출하여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 장단· 회령부사 등을 거쳐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영의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되어 침공해 온 로저스 제독의 미국함대와 맞서 싸우다가 광성진에서 동생 어재순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김좌근 고택은 김좌근의 아들이며 고종 때 어영대장과 이조판서를 지낸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 관리를 겸한 별장용으로 지은 99칸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담장과 행랑채가 없어지고 안채와 별채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솟을대문과 사랑채, 행랑채가 두 겹으로 안채를 싼 규모 있는 사대부집 전통가옥이었으나 후손들이 건물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당시 신흥재벌에 건물을 팔아 넘겼는데 다행이도 사랑채와 행랑채를 뜯어 옮기던 도중 회사가 부도로 건물 이전이 중단되어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말 나옹선사가 부모님을 천도하기 위해 조성했다.Ⓒ이천시

김좌근은 안동김씨 세도시기 후반의 중심인물로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아들이자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의 남동생으로 영의정에 세 번이나 보직되는 등 순탄한 벼슬생활을 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김조순 묘역은 부인 청양부부인 심씨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으며, 원래는 여주에 있었으나 1841년(헌종 7)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였습니다. 원형 봉분은 화강암 기단 위에 축조되었고 봉분 앞에는 잘 다듬어진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 있는 묘비의 비문은 앞면의 글씨가 순조의 어필입니다.

김조순은 본관이 안동으로 김창집의 4대 손으로 김좌근의 아버지며 순조의 장인입니다. 1785년(정조 9) 문과에 급제, 검열, 규장각대교, 직각,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대제학 등을 지냈고,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의 비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가 되고 영안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 정조가 작고하자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로서 30년 간 보필하였는데 정조의 묘정과 양주의 석실서원, 여주의 현암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권균 묘역은 권균의 가계가 모셔진 곳으로,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와 대리석의 비신용모양의 이수로 이루어진 신도비와 묘비, 망주석, 문인석, 동자상 등의 석조물들은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형태가 나타나는 특이하고도 희귀한 것으로 보입니다. 권균은 세조에서 중종 대까지의 관료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520년(중종 15)에 호조,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23년 우의정이 되었습니다.

▲이평리 석불입상은 무릎 밑이 절단되어 있고 얼굴 등이 마멸되어 불완전한 편이지만 고려시대 이 지방 석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이천시

신라시대 창건한 사찰들
이천에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영원사, 영월암, 신흥사가 남아 있습니다.

영원사(靈源寺)는 원적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638년(선덕여왕 7) 해호선사가 창건했는데 초창 당시의 절은 지금의 절터보다 약간 위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적기>에 의하면 그 후 400여 년이 지난 1068년(고려 문종22)에 혜거국사가 불타버린 영원암을 중창하였는데 그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영월암(映月庵)은 설봉산 기슭에 위치하며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하고 산 이름도 북악이라 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는 없습니다.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어 창건연대가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신경준이 편찬한 <가람고>에 북악사가 보이고 거의 비슷한 때인 1799년(정조 23)에 정조의 명에 따라 편찬된 <범우고>와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전국읍지인 <여지도서>에도 역시 북악사라고 이름이 보입니다. 1774년(영조 50)에 영월대사 낭규가 북악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법호를 따 영월암이라 절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신흥사(神興寺)는 삼국시대에 신라군이 쌓은 것으로 알려진 설성이 둥글게 에워싼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찰의 <전설기>에 의하면 신라 내물왕 때 설성을 축조한 한 장군을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설성사라 하였다고 하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이 527년(법흥왕 14)이므로 연대에 대한 신빙성이 없어 보이며 오랫동안 폐사가 된 채 내려오다가 1700년대 말에 중창하였고, 1944년에 수해로 유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해송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은 높은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는 반가상으로, 넓은 이마에 두꺼운 입술은 둔중한 느낌을 준다.Ⓒ이천시

즐비한 고려 석불과 마애불들
이천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마애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영원사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본래는 영원사 대웅전 우측 약사전 안에 안치했던 것을 1985년 새로 연화대좌를 만들고 현 위치로 옮겼습니다. 영원사 <사적기>에 해호선사가 절을 창건하고, 수마호석으로 약사여래좌상을 조성하여 봉안했다고 하나 표현수법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의 불상으로 보기는 어렵고,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말 나옹선사가 부모님을 천도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머리와 양 손은 얕은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고 옷 주름 등은 선으로 조각되었으며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하며 지그시 감은 듯한 눈과 굵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에서 힘차고 후덕한 고승의 느낌이 듭니다.

영월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안치했던 불상은 없어진 채 쓰러져 있던 것을 대웅전 앞에 복원해 놓았으며 지금의 불상은 1980년 새로 조성한 것으로 두광의 상부와 신광 좌우로 3존의 화불좌상이 있습니다.

연화좌대는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과 역시 8각의 면상, 앙연좌, 연좌의 4부분을 연결해 놓았는데 특히 앙연좌에 새겨진 연잎들은 생동감이 넘치며, 전체적인 조화가 섬세하고, 세련된 조각 솜씨로 미루어 불교미술의 전성기였던 통일신라에서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은 바위 뒷면에 “太平興國六年 辛巳二月十三日…香徒…”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981년(고려경종 6)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높은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는 반가상으로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넓은 이마 두꺼운 입술은 둔중한 느낌을 줍니다. 이 보살상은 관음보살로 조각성은 떨어지지만 10세기에 조성된 기년명(紀年銘) 조각으로 동시대 불상과 비교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습니다.

소고리 마애여래좌상은 선이 정교하고 몸에 균형이 잘 짜여 있으며, 앙연좌 위에 결가부좌한 당당한 모습으로 아미타여래의 구품인 중에 중품중생의 수인을 취한 것으로 보이며 조성연대는 통일신라 말인 9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은 모두 결가부좌한 좌상의 형태로 신라시대의 토우나 미개종족의 신상에서 볼 수 있는 화적(畵的)이고 과장된 표현이 특징이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고 소박하고 장난기 어린 표현이 친근감을 주는데 조성 연대는 대략 고려중기 이후로 추정됩니다.

동산리 마애여래상은 머리는 소발이며 육체가 높직하고, 상호는 둥글고 원만하나 코 부위는 약간 마멸되어 있으며 큰 귀는 양 어깨에까지 늘어져 있고 아미타여래의 구품인 중에 상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으며 조성 연대는 대체로 고려초기에서 중기 사이로 추정됩니다.

어석리 석불입상은 소발로 된 머리 위에 팔각형의 판석을 얹어 놓아 보개를 쓴 형태입니다. 눈은 행인형으로 가늘고 길며, 입술은 작은 편으로 미소를 띠고 있고, 양쪽 귀가 커서 거의 양편 어깨까지 닿아 있으며 법의는 통견의로 어깨로부터 양옆으로 늘어져 발밑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가슴 앞에서부터 무릎에 이르는 옷자락의 U자형 주름이 매우 선명합니다.

자석리 석불입상은 소발형 머리 위에 원형의 판석으로 보개를 들어 얹어 놓은 모습이 어석리 석불입상과 비슷한 형태인데 얼굴이 큰 편이며 동체는 가슴 부분에서 연결이 되도록 두 개의 돌로 조각하여 얹어 놓았는데, 둥근 원통형으로 비대한 느낌이 듭니다. 일설에는 1018년(고려 현종 9) 선읍리에 감무를 두어 아문을 설치하였을 때 시장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건립하였다고 하며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불상으로 추정됩니다.

이평리 석불입상은 무릎 밑이 절단되어 있고 얼굴 등이 마멸되어 불완전한 편이지만 고려시대 이 지방 석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육수는 낮지만 머리는 큼직한 편인데 나발이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길고 풍만하여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으나 마멸 때문에 이목구비는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선읍리 석불입상은 죽곡 마을 앞 시냇가에 묻혀 있던 것을 신흥사 주지가 현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라 하는데 법의의 형태나 몸에 아무런 장신구의 표현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여래상임을 알 수 있고, 대좌의 연화문, 균형 잡힌 불신의 모습과 세련된 표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관고동 석불입상은 미륵골로 불리던 산골짜기 안의 밭 중앙에 있던 것을 1987년 인근에 있는 법왕정사 경내로 옮겨다 놓은 여래입상입니다. 상호는 원만하고 귀는 매우 커서 양 어깨까지 길게 흘러내렸고 목에는 3도가 뚜렷하나 도식화된 느낌이 나며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갈산동 석불입상은 오래 전 쓰러져 목, 몸체, 허리 부위 등이 떨어진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0년경 시멘트 보강으로 현재의 위치에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상호는 원만하나 양쪽 볼이 약간 비대하며 전체적으로 동체가 두상에 비해 가늘고 길어 부조화를 이룬 것이 특징으로, 조성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됩니다.

대포동 석조여래입상은 엉치 부분이 흙 속에 묻혀 있습니다. 상호는 원만하나 양 볼이 약간 비대하고, 두 귀는 파손되었으며 시멘트로 보강한 목에는 3도가 있고, 법의는 통견으로 양팔에 걸쳐 의문이 밑으로 흐르고, 허리 부위에는 요대를 둘렀는데, 그 복판을 묶은 결대의 조각이 특이하며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됩니다.

▲반룡송(蟠龍松)은 이천의 특이한 소나무 두 그루 중 하나로, 하늘에 오르기 전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한 소나무라는 뜻이다.Ⓒ이천시

특이한 소나무 두 그루
이천에는 특이한 소나무가 두 그루 있습니다.

이천백송(利川白松)은 수령이 220여 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며 전라감사를 지낸 민달용의 묘를 이곳에 안치한 후 그 후손들이 묘 앞에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백송은 중국 북경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문 희귀종으로써 발견되는 대로 지정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전국을 통틀어 서울에 통의동, 원효로, 제동, 수송동 등 네 그루가 있고 밀양, 보은, 예산에 각각 한그루, 그리고 이천의 백송 등 모두 8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반룡송(蟠龍松)은 하늘에 오르기 전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한 소나무라는 뜻으로 만년송 또는 만룡송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말 ‘풍수지리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도선대사가 심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도선대사가 팔도의 명당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이곳 백사면 도립리를 비롯하여 함흥, 서울, 강원도 통천, 충청도 계룡산 등 각처에 한 그루씩 모두 다섯 그루를 심었는데 함흥에서는 이성계가, 서울에서는 영조대왕이, 계룡산에서는 <정감록>의 주인인 정감이 태어났고 강원도에 심은 나무는 죽었다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10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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