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 발언을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정치인이기 전에 '한 아버지의 딸'로서 아버지에 대한 평가일 수 있다. 아무리 정치인이라 해도 행동 하나하나에 왈가불가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인지 모른다. 최소한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개인적인 신념에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경험에서 신념을 얻는다. 한 사람에겐 신념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정표이고,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험난한 길을 마다하고 꿋꿋이 걸어간다.
▲ 박근혜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박근혜의 이번 발언은 소신과 신념의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선 경선 선언 과정에서 나온 발언인 만큼 단순히 개인적인 신념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대선 필승 전략 차원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선택은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전직 대통령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더욱이 부정적인 이미지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이 어찌 그녀의 탓이겠는가? 하지만 박근혜는 한 사람의 공인이다. 무엇보다 이번 발언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정치적 발언이다. 유권자에게 던진 첫 번째 메시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권자를 향한 정치적 발언인 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장래 정치지도자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의당 대답을 들어야 한다. 하여 말의 수사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최선의" 선택은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최선의 선택"? 무슨 뜻인가? 참모들의 만류에도 왜 이 표현을 고집했을까? 많은 짐작과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고단수의 정치적 수사든, 순수한 동기이든, 자기 신념을 드러내는 소신 있는 행동이었기에 말의 책임이 따른다. 뭐라 하든 좋다. 그 말은 공중파를 타고 유권자에게 던져졌고, 말을 둘러싼 논쟁이 일고 있다. 이제 말의 책임을 따져야 할 때다. 우리의 고민은 아무도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판단에서 대답을 찾아야 한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굴곡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가치판단이 들어있다. 5.16이 최선의 선택이라면, 4.19는 어떤가. 별 볼일 없다는 말인가? 5.16에 대한 옹호는 한국 근대화로 알려진 역사적 시간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는 박정희의 유신체제까지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민주적 행태까지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아닌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기막히게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5.16을 옹호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도 예사롭지 않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 박근혜의 정치적 기반이 무엇인가? 박정희 유산과 상당부분 일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다르다. 단순히 학연·지연·연고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억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할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적 소신이 역사적 평가를 앞지른다. 이런 기억의 정치가 낡은 지역주의 정치처럼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장밋빛 미래가 주류였던 우리 정치판에, 과거를 지배하려는 정치, 역사의 정치화가 시작되고 있다. 한국 정치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해보지 못한 시도이다.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을까? 친일, 쿠데타의 주역, 유신 독재의 흔적은 대통령 박정희를 괴롭히던 유령이다. 박근혜의 침묵에는 많은 것이 있다. 그녀의 평가 한 마디는 이를 둘러싼 역사적 평가가 숨어 있다.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우리는 흔적을 통해 역사를 해석한다. 깨달아야 할 점은 박근혜 식 기억의 정치는 이 다양한 역사적 해석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근혜의 시도는 대담하고 위험한 것이다. 대담한 이유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정통성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성패를 섣불리 예단하기 힘들지만, 그 시도만큼은 대담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왕족의 후예 밖에 없을 것이다. 위험한 이유는 특권층의 정신상태, 보통 사람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남다른 정신 상태에서 내린 결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는 공감보다 일방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때문에 보통사람과 거리가 먼,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있어야 할,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야 할 과거가 단선적인 역사가 될 수 있다. 성공여부는 누구도 모른지만, 그 성공의 결과는 분명하다. 성공한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이 역사적 평가를 좌우할 수 있다. 정치 지도자의 역사적 해석이 주류를 형성할 것이고, 역사적 평가는 고착될 것이다. 역사가 전횡적으로 한 쪽만을 기억할 수 있다. 한쪽으로 나아가는 역사는 독재의 역사인 것이다. 독재자들은 늘 획일적인 역사를 좋아한다. 물론 단언하고 싶지 않다. 다만 경종이라 생각하자. 획일적 과거, 인격,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큰 적이다. 두려운 건 이런 정신 상태이다. 다양한 역사해석의 공간을 정치적 대상으로 바꾸어 가부(可否)의 문제로만 보려는 태도. 그것이 문제다.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부자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불러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대한 획일적인 사고는 역사 속 숨겨져 있는 잠재력에 눈을 감는다. 우리의 미래가 과거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동시대인들의 경험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정치인의 소신 있는 행동은 늘 유권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정치인의 발언을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욱이 살아 숨 쉬는 경험은 누구도 멋대로 지울 수 없다. 정치인의 강한 신념과 소신은 그래서 국민적 동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인의 일방적인 신념이나 소신이 아니다. 우리의 상식적인 믿음과 맞지 않는 정치인의 소신은 불통일뿐이다. 우리는 이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지 않는가! 참된 민주주의는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찾는 것이다. 정치인의 신념은 국민의 일상적인 신념과 동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통념에 갇혀서도 안 된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신념, 소신 있는 행동이 요구된다.
바야흐로 정치의 시간, 말의 잔치, 정치인의 신념과 소신이 드러나는 때다. 앞길이 훤히 보이지 않을 때 옆 사람의 한 마디에 민감해진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받아들이고 감춰진 미래를 보는 데 있다. 다양성은 이런 미래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개념뿐인 민주주의는 말장난이다. 우리는 소신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 진정성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 어떤 정치인이 그저 말을 위한 말을 내뱉거나 거짓 소신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단호하게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귀 기울어야 할 것은 거짓 선지자의 말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우러나오는 신념이다. 무수한 말의 잔치가 펼쳐지는 지금, 소신이 난무하는 지금, 우리 모두의 신념으로 경청하고 대응해야 한다. 선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선택은 5년을 위한 선택일 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정치인의 신념과 소신에 대한 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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