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선거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공약이라는 공론화 방식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지금 여야 정치권에서는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 주요 정당의 대표 선수로 누가 나올 것이며, 누가 청와대에 입성할 것인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또한 점차 고조되고 있다. 정치학 전공자로서 이번 대선에 거는 별다른 기대 중 하나는 주요 정당의 유력 후보들이 개헌의 방향과 방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이에 대한 유권자들의 평가를 기반으로 개헌을 앞당기자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개헌이 성사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가장 유력한 근거는 여야 할 것 없이 예비후보 대부분이 개헌을 주요한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는 점이다. 내각책임제(문재인), 4년 중임의 분권형 대통령제(김두관), 분권을 전제로 한 4년 중임제(정세균), 결선투표제 방식의 4년 중임 정ㆍ부통령제(김태호), 6년 단임 대통령제(임태희)가 그 예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점은 새누리당의 유력 후보인 박근혜 의원이 개헌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식적인 견해는 아니지만 박근혜 캠프의 홍사덕 선거대책위원장은 "개헌론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가 지난 2007년 대선 이후 4년 중임제 개헌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선 과정에서 개헌론이 불가피하게 쟁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하나 개헌의 필요성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처해 있는 무기력한 임기 말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학계에서 단임 대통령제의 한계로 지적하여 온 문제점들을 총망라하여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자면, 과다한 업적주의(4대강 사업), 권력형 비리의 내재화(이상득 의원을 비롯한 측근 비리), 무소불위의 권력 독점(검찰의 정치화와 민간인 사찰), 심각한 레임덕 현상(한일군사협정 체결 연기) 등이 그러하다. 이처럼, 여야를 떠나 대부분의 후보들이 입을 모아 5년 단임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개헌을 주장하게 된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한 몫하고 있다.
의원내각제, 분권형 대통령제, 4년 중임제, 정ㆍ부통령제 중 무엇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남북평화라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가장 적절한 정부형태인지에 대해서는 정당마다 유권자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5년 단임 대통령제는 국가운영의 민주화와 효율성 양 측면에서 시대착오적 헌정체제라는 사실은 분명해 졌다. 일각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다급한 이 시점에서 굳이 개헌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중들의 삶을 구속하는 제도의 중요성을 무시한 단견이다. 4대강 사업과 같은 단기적 실적주의에 근거한 대형 프로젝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 특성을 반영한 정책이지만 한편으로는 단임 대통령제가 낳은 구조적 산물이기도 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들의 개헌론이 무산된 공통된 이유는 대선이나 총선이라는 최대의 정치 공간을 활용하지 않고 밀실야합 방식으로 추진하였거나 여권 일각에서 임기 중반 일방적으로 제기한 데 있었다. 1990년에 세상을 놀라게 하였던 YS와 JP의 내각제 각서 파문이 전자의 예라면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의 4년 연임제 개헌안 제안이나 임기 내내 이명박 정부의 실세인 이재오 의원이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를 적극 추진하였던 것은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지난 5월 문재인 후보는 안철수 원장에게 공동 연합정부를 제안한 바 있다. 또한 그 전망이 불투명해지기는 하였지만 민주당과 진보당의 선거연합은 여전히 유력한 대안이다. 최근 김두관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즉시 정부와 국회, 시민사회를 아우르는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1년 안에 국민투표로 개헌을 할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문재인-안철수의 연대를 위해서도, 그리고 전체 야권의 공동 정부를 위해서도 개헌 방식과 일정에 대한 구체적이고 조속한 합의는 필수적이다. 또한, 그러한 합의는 권력의 분배라는 정략적 차원을 넘어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방식의 정책 협약이 바람직하다. 4년 중임제가 소신임을 여러 차례 밝혔던 박근혜 후보 역시 현재의 유불리를 떠나 국가의 미래와 원칙의 관점에서 개헌에 대해 보다 적극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2013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1987년 헌정체제의 근간인 5년 단임 대통령제를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다. 다행히 그 어느 때보다도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서 정치 지도자와 국민 모두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동안 개헌 반대론자들은 한국의 빈번한 개헌을 비판하는 근거로 자주 미국의 헌법을 예로 들어 왔다. 미국은 1787년 건국 헌법 제정 이래 15회의 헌법개정(27개의 헌법조항 추가)이 있었다. 즉 한 헌법당 약 14년간 존속한 셈이다. 한국의 경우 1948년 헌법제정 이래 9회의 헌법 개정이 있었으니까 약 평균 6년의 헌법 수명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25년이 된 1987년 헌법은 한국 헌정사나 성문 헌법인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상대적으로 장수한 헌법이다. 조기 레임덕, 승계위기, 중장기 국가비전의 관점에서 87년 체제를 뒷받침 해온 5년 단임제 헌법은 훌륭하게 자기 역할과 수명을 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한국사회의 민주적 성숙도 등을 고려할 때도 헌법 개정에 대한 보다 진취적 입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번 대선이 꼭 개헌의 방향과 시기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역동적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여야 후보 모두 개헌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정립된 제안과 주장을 내놓는 것은 정치 지도자의 의무이자 덕목임을 인식해야 한다.
* 본 칼럼의 내용은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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