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프레시안> 창간 17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최원식 인하대학교 명예교수가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라는 주제로 발제를 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은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의 선행 조건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 없는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는 가능하지 않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북이 궁극적인 '평화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최 교수는 남과 북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상태"인 '남북 연합론'을 제시했다. '남북 연합'이란 '일국가 이체제'도 아닌, '이국가 체제'도 아닌 상태다. 최 교수는 "남북 연합이 통일의 최종 형태가 되어도 무방하다"는 입장이다.
최 교수는 "남북 연합론과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새로 상상하는 것 또한 함께 간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구상하기 위해서 최 교수는 "한반도, 동아시아의 눈으로 세계를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반도의 평화, 그것을 넘어 동북아,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로 가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최 명예교수의 발제문을 싣는다.
1. 러시아 월드컵에 동아시아는 없다
일본 대 벨기에 전에서 한국 모 공영방송 해설자의 편파적 응원에 대한 나라 안팎의 논란이 거셌다.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16강전에 진출한 일본의 패배에 대한 그의 직정적(直情的) 태도가 한국에서 꼭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컨대, 한국에서 일본은 여전히 콤플렉스다. "다른 나라에 대해 습관적 증오나 호의를 갖는 것은 노예근성에 가깝다"는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이 의구한 심리는 상서롭지 않다. 그런데 일본 쪽 사정도 썩 낫다고 하기 어렵다. 최근의 한반도 화해에 불안해 하는 여론이 옹호하는 쪽을 압도한다는 것이고 보면 한국 팀에 대한 일본인의 속내 역시 단순치 않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중국은 어떠했나? 한국 대 독일 전을 보도하던 중국 모 방송국 여성 앵커가 독일 선수복을 입고 나섰다는 데 드러나듯 중국 팀 없는 러시아 월드컵을 대하는 중국인의 심리가 복합적일 것은 쉽게 유추될 터, 요컨대 러시아 월드컵에 동아시아는 없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크게 후퇴했다. 피파(FIFA)의 조정으로 공동개최롤 수용하면서 경쟁하던 한일 두 나라 시민 사이의 우애가 이전보다 한결 진지해진 것을 그때 우리는 실감했다. 6.15선언(2000)도 도왔다. 이 선언 이후의 남북 화해가 한일 사이에도 긍정적으로 작동한바, 한반도문제는 동아시아문제와 커플링(coupling)이다. 한반도문제가 내재화하면 동아시아문제도 내재화로 꺾고 한반도문제가 외재화하면 동아시아문제도 외재화로 꺾는다. 이명박 정권 이후 한국정치가 탈민주화의 경로를 충실히 밟아나가면서 남북도 동아시아도 함께 항상적인 분쟁상태로 함몰했으니, 그 여진이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그대로 드러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 월드컵에 부각된 갈등에 너무 주눅들 필요는 없다. 축구는 원체 전투적이라, 경기장 안팎에 폭력을 야기하는 일은 물론이고 실제 전쟁으로까지 번진 경우도 없지 않았으니 이번 월드컵에 드러난 한중일 세 나라 국민의 가상전쟁을 일반으로 확대할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요란한 표층 아래 잔잔한 우애도 횡단했다. 한국의 탈락을 위로하는 일본인의 목소리와 일본의 선전을 칭찬하는 한국인의 목소리가 종요롭다. 마침 한반도 정세가 판문점선언 및 센토사선언으로 외재화의 긴 터널을 막 벗어나는 중이매, 동아시아에도 새벽빛이 부윰하다.
물론 악마들은 곳곳에 출몰할 것이다. 이번에 각별히 확인한 바는 한반도가 비분쟁 상태로 변환하는 것에 비우호적인 미국 주류의 민낯이다. 하기는 남북관계가 전쟁조차 불사할 대결 속을 더듬었을 때 미국 핵무력이 금기의 영역이었던 서해에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니,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함께 불화할 때 미국의 위상은 두드러진다. 미국의 현전(presence)은 중국의 현전을 불러온다. 불화하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의 대립 속에서 한반도문제의 최고 당사자인 남과 북이 동시에 손님으로 물러앉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모처럼 안팎의 인연이 줄탁동시(啐啄同時)로 나투어 문득 다른 시간으로 들어서니 뭇공덕이 고맙다.
2. 남북미와 동아시아
벌써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만사 불여튼튼, 두 지점에 유의할 필요가 없지 않다. 하나는 동아시아, 다른 하나는 시민이다. 남북미가 주도하는 반전 속에서 자칫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일본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이 부상할 수 있지만, 어떤 배외주의도 금물이다. 분단이 국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분단의 해소 또한 국제적으로 성수될 수밖에 없는 한반도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자. 더욱이 우리는 중일을 껴안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 틈이 생길라치면 중국은 북한과 러시아와 편을 먹고 또한 일본은 한국과 미국과 편을 먹으려는 냉전시대의 대립으로 문득 회귀하려는 인습이 발동하기 때문에도 한국이 앞장서 중일과 튼튼히 연계해야 간신히 이 나쁜 유전(遺傳)으로부터 해탈할 계기가 마련되겠기 때문이다.
또한 두 선언이 기본적으로는 남북미 세 나라 정상들의 결단에 힘입은 덕에 불가피하게 ‘좁은 의미의 시민적 참여’가 제한되었다는 점에도 더욱 주의가 기울여져야 마땅하다. 어렵게 열린 새 국면을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추동하기 위해서도 각 나라의 실정에 맞게 시민적 참여의 독자적 형식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지만, 나라를 가로지른 연대 또한 자연스럽다. 동아시아, 특히 말썽 많은 한중일 세 나라 국민 사이의 화해, 즉 민제(民際, inter-civic)를 다시 일대의 화두로 들어야 할 때다. 민제는 국제(inter-national)의 어머니다. 아무리 정부 사이가 좋다 하더라도 국민 또는 시민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 국제는 모래 위의 집 신세를 면치 못할 터인데, 한중일 세 나라 국민 또는 시민의 우애는 러시아 월드컵이 가리키듯 높다고 하기 어렵다. 동아시아국제주의를 담보할 민제를 더 촘촘히 할 일의 선차성이 새삼 종요롭다.
그동안의 진전, 특히 북미회담의 과정 속에서 중국의 연관은 일종의 구조라는 점이 밝혀졌기에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중국을 지나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북은 물론이고 한국도 중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근리하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란 대사업은 한반도의 분단으로 왜곡된 중국혁명 이후의 사회발전을 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건국 직후 항미원조(抗美援朝)의 명분으로 6.25에 말려듦으로써 신생 중국은 국제적 고립, 특히 처음에는 미국, 뒤에는 소련까지 가세한 위협 속에서 파멸적 결과를 야기하곤 한 급진적 인민동원상태로 질주하기 일쑤였거니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대표적일 것이다. 이 점에서도 한반도 분단의 평화적 해소 과정은 모처럼 ‘굴기’의 문턱에 도착한 중국에도 절호의 기회가 될바, 그럼에도 그 기회가 제공할 다른 우려 역시 깊이 고려되어 마땅하다. 김동춘은 말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에 대한 우려도 있다.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은, 한국이나 북한이 또다시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미나 친중이 아닌, 제3의 길이 과연 가능한 지가 관건이다. 종전선언이 일본 식민 체제의 종식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면, 한반도의 운명은 사실상 식민지 이전으로, 곧 미국과 중국이라는 대국 사이 에 낀 상태로 되돌아갈 우려가 있다.
그의 발언이 최근의 복잡한 정세에 비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점이 걸리기는 해도 한반도가 분열된 경우 취하곤 한 중국의 전통적 기미(羈縻)정책이 부활할 데 대한 염려는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오히려 한중수교 이후가 남북을 조절하는 기미정책에 가까웠다고 할진대 남북이 함께 중국을 정성껏 설득한다면 중국도 새로이 출현할 남북연합과 동행하는 것이 떳떳하고 이롭기까지 하다는 판단을 내리지 못할 이유가 적다고 판단된다.
일본은 더욱 절실하다. 그동안 미국의 등 뒤에서 한반도 문제의 내재화를 방해하던 아베의 일본정부가 정세의 극적인 변화 속에서 허둥지둥하는 모양이 마뜩찮아도 일본을 배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다시 김동춘은 말한다.
올해 안에 남북한이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면, 평화체제로 가는 교량이 될 것이다. 한국 전쟁의 종전은 2차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성립된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우려한 미국의 냉 전 전략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은 채 일본을 국제사회로 황급하게 복귀시켰고, 이런 ‘샌프란시스코 체제’ 아래에서 한국, 북한, 일본은 ‘정상국가’라 보기 어려운 ‘결손국가’가 됐다. 냉전은 식민 지배의 연장이었다. 한반도의 종전은 남북한뿐 아니라 일본도 정상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1951년 9월에 조인되고, 이듬해 4월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료하기 위해 연합국이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이다. 하필 6·25전쟁 와중에 대일강화조약이 추진된 이유는 나변(那邊)에 있는가? 미국은 6.25를 기화로 일본의 우익을 중국 국민당을 대신하여 다시 동아시아 정책의 보루로 삼으려는 것이매, 일본의 전후 개혁은 중도이폐하고 한반도는 휴전선을 경계로 다시 분단된 바, 일본의 패배가 전후 동아시아의 평화가 아니라 냉전체제의 발진으로 이월된 것은 역사의 간지다. 샌프란시스코체제를 바탕으로 태어난 한반도 ‘분단체제’와 일본의 ‘55년 체제’가 어떻게 각 국민국가 안팎의 민주주의를 제약함으로써 지역 전체의 평화를 속 깊이 위협해왔는지는 다시 거론할 바 없거니와, 판문점선언과 센토사선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강제한 동아시아의 왜곡을 치유할 복원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두 선언 이후 일본 또한 이미 이 거대한 변환의 문맥에 껴묻어있는 셈이니, 일본 조야가 이를 더욱 능동적으로 추동하도록 넌지시 옆구리를 찌르는 지역적 연대가 한층 의식되어야 할 것이다.
3. 다른 동아시아
한반도 분단체제의 변혁/평화체제의 구축은 비단 한반도 양측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분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20세기의 동아시아와는 다른 21세기형 동아시아 질서의 탄생을 촉진할 것이매, 동아시아공동체에 대한 토의를 다시 발진할 때다. 솔직히 나는 그동안 공동체론을 회피해왔다. 한반도문제와 동아시아문제가 쌍궤로 불안정한데 공동체론까지 가세하면 그나마 쌓은 지역연대도 그르칠까 하는 노심(勞心)이 가로놓였기 때문이다. 공동체라는 경성(硬性)의 제도보다는 연성(軟性)의 네트워크 형성 즉 민제에 주력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물극즉반(物極則反)! 탈민주화의 끝에서 출현한 두 선언으로 쌍궤가 내재화로 꺾어지는 분기점을 바야흐로 통과했다. 이제 환상 없는 이상주의를 실험적으로 가동할 계제에 어느 틈에 다다른 것이다.
남북연합론과 동아시아공동체론의 관계를 잠깐 짚어보자. 먼저 확인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양자가 별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무엇이 선차적인가? 물론 전자다. 전자가 없으면 후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후관계는 아니다. 동시에, 함께 밀어나갈 구상과 실천이 종요롭다. 말하자면 회통(會通)이다. 회통은 회통이되 전자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후자를 안내하는 작업이기도 한 동시성이거니와, 역도 성립한다. 아마도 실제로는 ‘기우뚱한 균형’(김진석)이기 쉽다. 우리 각자가 서있는 그 실존의 장소에서 그 때에 맞춰, 다른 하나를 의식하며 그 하나의 작업을 수행하면 그뿐이다.
또한 남북연합론에 대해서도 정리해둘 필요가 없지 않다. 나는 남북연합이 통일의 최종 형태가 되어도 무방하다고 피력해 왔다. 이 말은 주로 중일 지식인들 만났을 때 하던 것인데,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은근한 우려를 불식하기 방편으로 비롯한 것이었다. 표리부동한 자가 되어서는 아니되겠기에 나라 안에서도 주장했다. 물론 남북연합을 고정적이고 폐쇄적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남북연합 단계로 오르면 그 과정에서 또 역동적인 상호진화가 따를 것이 거의 분명할 터이기에 짐짓 시치미를 뗀 것에 가깝지만, 한편 치열한 토론의 결과로 정말로 창조적인 남북연합론이 도출된다면 ‘다테마에(立前)’에서 출발해서 ‘혼네(本音)’로 마감하는 도덕적 도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묻어놓기도 하였다.
최근 세를 얻고 있는 양국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그을 필요가 없지 않다 양국체제론자들의 논의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탓에 단정하긴 어렵지만 남북은 일국도 아니지만 양국도 아니다. 분단으로 두 쪽이 난듯이 보여도 남과 북은 분단체제의 드러남으로 연계된 바, 분단체제를 상정하지 않은 양국론과는 애초에 무관하다. 그렇다고 그냥 일국론도 물론 아니다. 정말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不一不二). 요컨대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을 설령 통일의 최종 형태로 삼는다고 해도 그 연합이 두 나라의 단순 병치가 되기는 애시당초 그른 것이매 남북연합론은 주변 4강의 의심을 풀고 내부의 대국주의를 절약할 요체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남북연합론은 일국적 통일론과 양국적 반통일론을 가로지르는 중형국가적 분단해소론이다.
다시 강조컨대 한반도문제와 동아시아문제는 쌍궤다. 전자의 핵으로 되는 남북연합론을 다듬는 일과 후자의 꿈으로 되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새로이 상상하는 일 역시 쌍궤다. 특히 그사이 미뤄진 후자를 한걸음 진전시키는 일이 종요로운데, 왜 경제적으로는 가장 역동적인 동아시아가 공동체 문제에서는 후진인가? 마크 셀던(Mark Selden)은 두 지점에 주목한다. 첫째 “제국 시기와 아시아-태평양 시기에 진행된 일본의 잔혹 행위를 둘러싼 충돌이 해결되지 못한” 것, 둘째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다른 국가들의 충돌이 시작”된 것. 과거의 일본과 현재의 중국이 장애로 된다는 진단이거니와, 양자의 공통점에 주목하면 결국 미국의 존재에 미친다.
일찍이 대영제국의 지위를 둘러싸고 독일과 경쟁한 미국은 두 번의 대전을 통해 20세기의 패자로 등극했다. 이 과정은 한편 ‘미국령 호수’ 태평양에 대한 일본의 도전으로 되는 태평양전쟁을 포괄한 바, 미국은 이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했고 일본은 굴복했다. 2차대전 후 반파시즘 민주연합의 분열 속에서 소련이 미국에 도전했다. 중국혁명과 6.25전쟁으로 부활한 일본 우익을 방패로 중소 대립의 틈에서 소련을 고립시켜 해체로 이끎으로써 미국은 최종 승리했다. 냉전과 열전의 지루한 지속 끝에 일본이 이끄는 경제 기러기 편대의 비행 속에 동아시아가 흥기했다. 이어 개혁 개방의 물결에 참여한 중국이 부흥하면서 바야흐로 일본의 도전에 이어 중국이 ‘미국령 호수’에 진출해 바야흐로 미중 무역전쟁의 전운이 짙다. 과연 중국의 도전은 성공할 것인가? 비록 미국의 선공에 의한 자위적 조치라고 할지라도 전통적인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이탈한 중국의 잇단 ‘굴기’는 리 샤오(李曉, 길림대)의 말마따나 “지식상의 의화단” 운동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할지도 모르매, 미중무역전쟁을 정치경제적 내부 혁신을 통한 중국 개혁개방의 새 기회로 삼는 것이 근리하다는 게 중론에 가깝다.
중국의 버거운 상대 미국은 또 어떠한가? 미국이 하강 끝에 머지않아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은 덜 합리적이지만 트럼프의 등장이 지니는 목하 미국의 처지 또한 간단치 않다. 어느 경제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자.
박태호: 오바마 전 대통령 때는 (...) 미국의 서쪽으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동쪽으론 범대서양무역투자협정(TTIP)를 각각 추진했다.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서비스산업의 주도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트럼프가 TPP추진을 철회하고 영국이 EU에서 탈퇴하기로 하면서 두 개 모두 무산됐다. 미국이 제도를 통해 합리적 슈퍼파워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추진한 대안이 모두 사라진 셈이다. 결국 남은 건 트럼프식 양자해결뿐이다.
트럼프의 등장만큼 미국의 곤경을 잘 보여주는 예는 드물거니와, 푸틴과의 회담에 앞서 “나는 정치를 쫓으며 평화를 위기에 빠뜨리기보다는 평화를 추구하며 정치적 위기를 감수하겠다”는 신통한 말도 한 것을 보면 하강기의 미국 대국주의가 흘러든 패션이 희한한 바 있다. 한 시대는 저물고 새 시대는 동 트지 않은 전형적인 과도기다. 트럼프식 좌충우돌이 한반도에는 내재화의 틈을 열어주기도 하는 이 간지의 때, 미중 무역전쟁 때문에라도 한반도의 내재화가 다그쳐지는 이 역설의 때, 남북연합 추진 운동과 상호진화할 동아시아공동체운동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4. 유원능이의 동아시아공동체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에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제안했다. 판문점선언과 센토사선언 이후의 어떤 교착을 돌파할 묘수인데, 남북, 중국, 러시아, 몽골, 일본, 그리고 미국을 포괄한 총 7개국으로 구성될 이 공동체는 “동아시아끼리만”으로 제한되지 않은 탄력을 갖춘 것이 주목된다. 다만 ‘동아시아’가 걸린다. 이름과 달리 동북아시아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가 동아시아를 대신하는 이 정치적 무의식은 우리 안에 내장된 동북아시아 중심주의의 드러남일 터인데,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와 일본 중심의 동양주의처럼 자칫 패권적 동아시아주의로 경사될 위험을 안을 수도 있기 때문에도 동남아시아를 괄호친 ‘동아시아’는 정중히 사절이다.
센토사선언이 싱가폴에서 성사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동아시아 상상에서 동남아시아는 필수적인 동반자다. 잘나가던 유럽연합(EU)도 민중적 참여의 부재라는 태생적 한계 속에 문제로 된 이때 지역통합의 모범생 아세안(ASEAN)은 그 지진아인 한중일 세 나라를 초청하여 ‘아세안+3’로 일종의 가정교사 역할을 맡아온 점에서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알아차림은 한층 깊어져야 마땅하다. 더구나 유교와 대승불교를 문명자산으로 삼는 동북아시아와 달리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영향이 강력한 동남아시아는 서아시아로 열린 점도 미래다. 불가피하게 동북아시아 중심인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동남아시아와 연계할 다른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바, 아세안+3에 “북조선을 포함하는 ASEAN+4(또는 몽골까지 참여하는 ASEAN+5)”는 마침맞은 현안으로 상정할 만 하거니와, 만약 이 고리가 의식된다면 동아시아철도공동체가 동아시아공동체로 가는 중요한 디딤돌이 될 가능성 또한 높아질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왜 자주 동남아시아를 횡볼까? 두 아시아의 비대칭성도 비대칭성이지만 동북아시아에는 학서(學西)의 우등생 메이지(明治) 일본이 끼친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경향이 유독 강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최근 한국의 지식사회를 보건대, 한때 주춤했던 서구주의가 강화일로다. 아시다시피 1970년대 민족민중운동의 발진 속에서 일종의 네그리뛰드(négritude)운동처럼 비약한 반서구주의가 어느 틈에 그 반동으로 달려간 품새가 상서롭지 않다. 우리가 발디딘 한국, 한반도, 그리고 동아시아는 거의 실종하고 박래품(舶來品)서양의 시각들이 다시 횡행이다. 그 끝에 ‘일본 대 나머지 아시아’의 분열과 이보다 “더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중국 대 나머지 아시아’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를 변형 복제한 한국의 아시아 타자화가 기다린다면 악몽이다. 한반도 문제의 내재화와 동아시아문제의 내재화라는 세계사적 사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한국, 한반도, 그리고 동아시아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일대 회향이 요구되는 것이다.
안팎의 비대칭들로 예민한 동아시아에서 공동체라는 멀지 않은 이상에 크고 작은 여러 나라 또는 준국가들이 함께 오를 공동의 국제/민제의 약속을 점검할 때, 탈아입구의 경향 속에 더욱 유전자처럼 각인된 원교근공(遠交近攻)을 해체하는 일이 종요롭다.
아시다시피 이 책략은 세객 범수(范睢)가 진(秦) 소양왕(昭襄王)을 달래 기존의 근교원공(近交遠攻) 대신 새로이 채택된바, 결국 진의 일통을 불러온 디딤돌이었다. 북진통일이나 남조선해방론도 그 변형이다. 이 말썽 많은 두 담론의 기원은 아마도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병탄한 신라의 통일정책에까지 거슬러 오를 터인데, 다시 생각하면 일제도 이를 충실히 답습했다. 이웃 조선과 중국을 침공할 때는 원교근공이라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으로 확전할 때는 근교원공이었다. 물론 후자에서 ‘근교’는 말만 ‘근교’지 동남아 각국을 서양으로부터 탈취하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으매 실은 ‘근공원공’(近攻遠攻)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때론 근교원공이 긍정적인 경우도 없지 않았다. 서양의 충격이 동아시아를 압박할 때 제출된 한중일 연대론이 드문 예일 터인데, 실패하기도 했고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서양을 몰밀어 타자화하는 이 담론의 이분법은 오늘에 되살리기에는 부담이다. 근교원공이든 원교근공이든 이들은 다 패도시대의 부정적 유산이다. 그 책략을 고안한 세객이란 말하자면 소피스트인데, 어디까지나 자신의 출세를 위해 고객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니 패도를 넘어 평화체제의 빗장을 여는 남북연합운동 또는 동아시아공동체운동은 두 책략의 무덤으로 되어야 마땅하다.
유원능이(柔遠能邇, 먼 이를 부드러이 하며 가까운 이를 잘하게 하다)에 주목하고 싶다. <서경>(書經)이 출전인데, 첫번째는 순(舜)임금의 말씀(卷之一 虞書 舜傳) 중에 나온다. “식재유시(食哉惟時)니 유원능이柔遠能邇)하며, (먹는 것은 때이니 머언 이를 부드러이 하며 가까운 이를 잘하게 하며)”. 두번째는 주(周) 2대왕 성왕(成王)의 유언(卷之六 周書 顧命)이다. “유원능이(柔遠能邇)하며 안권대소서방(安勸大小庶邦)하라. (먼 데를 柔하며, 가까운 데를 能하며, 작으며 큰 모든 나라를 편안히 하며 勸하라.)”
김관식의 두 번역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앞은 사람으로, 뒤는 장소로 풀었는데, 먼 데 제후와 가까운 데 제후를 가리키매, 결국은 같다. 다시 정리컨대 ‘유원능이’란 “'먼 나라를 유(柔)하고 가까운 나라를 능(能)한다”는 것이다. ‘유’와 ‘능’에 대해 스승 주희(朱熹)의 영(令)으로 <서경집전>을 완성한 채침(蔡沈)의 주가 유용하다. “유는 너그러이 어루만지는 것이고(寬而撫之也), 능은 순하게 각근히 하는 것이다(擾而習之也).”
유가사상이 형성된 전국시대 초기에 편찬되기 시작해서 진대에 완성된 <서경>은 특히 위작이 많다. 첫번째로 든 '우서'는 거의 완벽한 위서이고, 두번째 '주서'는 “대체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지만, 설령 양편이 모두 위경이라 할지라도 그냥 폐기할 일은 아니다. 부국강병을 기초로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으로 질주한 천하대란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원교근공에 반대하는 유원능이가 평천하(平天下)의 원리 즉 평화사상의 심법(心法)으로 제출된 점에 주목하면, 요순시대를 일종의 황금시대로 상상한 그 마음의 끝을 짐작할 수 있겠다. 채침의 서가 아름답다. “그리고 수천년 뒤에 태어나서 수천년 앞을 강명(講明)함 또한 이미 어렵다. 그러나 이제삼왕(堯舜과 禹湯文武)의 다스림은 도에 뿌리를 두었고 이제삼왕의 도는 마음에 뿌리를 두었으니 그 마음을 얻은즉 도와 다스림을 진실로 가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원능이는 ‘교(交)’가 어디까지나 ‘공(攻)’에 종속한 원교근공과 근교원공을 여의고 ‘교’가 그대로 ‘교’가 되는 원교근교일 것인데, 껍데기는 버리고 고갱이만 취한다면 지금 이곳의 평화체제 구축에 기여할 “동아시아적이면서 세계적 호소력을 행사할 사상과 감성”으로 다듬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을 터이다.
유원능이를 남북연합과 동아시아공동체 건설의 심법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소국주의의 재평가와 연계된바, 원교근공이 부국강병의 대국주의를 추진할 전략전술이라면 유원능이는 자치를 섬기는 소국주의와 짝할 심법이다. 무엇보다 선차적인 것은 우리 마음 속의 부국강병을 여의고 ‘잘살아보세’의 장기지속으로 잃어버린 공변된 마음의 회복이다. 이 마음이 없으면 남북연합과 동아시아공동체는 고사하고 목하 땅에 떨어진 공공적 신뢰를 재구축하는 일 또한 난망일 것인데, 남 탓하지 말고 나부터 이 간절한 마음의 끝을 찾을 일이다. 채침의 일갈이 사무친다.
“지닌즉 다스려지고(治) 잃은즉 어지러워져(亂) 치란(治亂)의 나누임이 그 마음의 있음 없음 여하에 달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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