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일반적인 기준으로 정치권력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고질이고, 일부 계급의 이익에만 치중한다면 저질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쉽다. 그래서 정치판에서 출세해보려는 자들은 다들 자기가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고 들이대면서 경쟁자는 계급적 이익을 추구한다고 매도한다. 따라서 따져 봐야 할 질문은 누구의 어떤 말과 행동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고 누구의 어떤 말과 행동이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지로 귀착된다. 이 차이를 공론장에서 분별해서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세력에게 정권을 맡기고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을 도태시키는 사회라면 고질 정치가 저절로 이뤄질 것이다.
이제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두 가지를 예로 들어 공동체의 이익과 계급적 이익을 분별해 보기로 한다.
첫째 사례는 5·16과 관련된 박근혜의 최근 발언이다. 박근혜는 2007년에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부르고 최근에는 다시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역사의식이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되자, 변명이랍시고 "나 같은 생각하는 국민도 많다"고 하다가 "민생 챙길 일 많은데 역사논쟁만 하자는 것이냐"고 대들었다. 이와 같은 언행은 박근혜의 사고가 철두철미 계급적 이익에 매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
우선, 어떤 선택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그것이 최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회창은 당시로서 "불가피해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사형에 동조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행위는 최선은 고사하고 애당초 선이라는 요소는 거의 없는 악독한 짓이었다.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들도 "불가피해서" 그랬다고 말했겠지만, 그런 행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악행에 해당한다. 하지만 박근혜에게 이런 구분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지성을 과대평가해 주는 셈이 될 테니까, 이것은 따지지 않겠다.
그렇지만 "불가피"나 "최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특정인의 주관을 거기에 결부시키는 말투는 소통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배째라"에 해당하는 작태가 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5·16의 의미를 두고 논의하는 사람 중에 박정희가 그것을 "불가피한 최선"으로 여겼는지가 궁금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5·16이 "혁명"이었다면 우리가 그 일을 자랑스럽게 현창하고 후손들에게도 본받으라고 가르치자는 뜻이 되는 것이고, "쿠데타"였다면 부끄럽게 기억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뜻이 된다. 어느 편의 뜻이든지, 박정희에게 국한되는 뜻이 전혀 아니고, 오천만 국민 나아가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나 살게 될 무한한 수의 사람들에게 관련되는 뜻인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박근혜는 "나 같은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건 한국말 어법에도 맞지 않는 워딩이지만 ("나처럼" 또는 "나같이" 또는 "나 같은 생각을 가진" 따위로 말해야 맞다), 이 역시 박근혜의 지적 수준을 감안해서 그냥 넘어 가자. 박정희 자식 말고 "아버지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국민이 몇 명인지도 묻지 말자. 대신 이렇게 물어 보자 - 5·16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많을까? 백 명? 천 명? 백 만 명? 천 만 명?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가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박근혜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고 말해야 할 텐데, 이를 어쩌나?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의원이 아닌 사적 개인의 신분으로서, 한 아버지의 딸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버지가 한 짓을 부정하지 못하겠다면 굳이 이렇게 공론장에서 따질 가치도 없다. 일국의 정치를 감당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공개적으로 발언한 말이기 때문에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다. 5·16의 의미에 관해 논쟁을 스스로 불러일으켜 놓고는 기껏 변명이라는 게 "나 같은 생각하는 국민도 많다"는 정도라면, 히틀러, 스탈린, 김일성, 이명박과 다를 바가 전혀 없지 않은가? 지금 열거한 인간들도 자기편에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만 빠져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그들이 저질 정치의 표본으로 악명을 떨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정치권력을 공동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많은 국민"을 고려할 때만 나오는 것이다.
박근혜가 정치인으로서 부적격자임을 보여주는 최근의 결정타는 역사논쟁이 민생과 관련이 없다는 저 무지막지한 언표다. 5·16은 박정희가 만든 1962년, 1969년, 1972년 헌법 전문에 "혁명"으로 지칭되어 들어갔지만, 1980년 전두환이 만든 헌법에서부터 빠졌다. 박정희가 만든 헌법에서도 4·19는 "의거"라는 명목으로 들어갔는데, 전두환은 5·16과 함께 4·19도 뺐던 것을, 1987년 헌법에서는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전문에 포함시키고 5·16은 넣지 않았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고, 이런 역사 위에 현재의 헌법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할 때 "헌법을 준수하"기로 선서해야 한다. 헌법이 뭔지를 모르는 자가 헌법을 준수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헌법의 역사를 모르고 헌법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인가? 헌법을 준수하지 않고 민생을 챙길 수 있을까? 쌍용차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의 민생, 500일이 넘게 투쟁하고 있는 전북고속 노동자와 가족들의 민생, 용산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의 민생, 독점 자본과 국가 권력이 결탁한 탓에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민생을 박근혜는 헌법과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챙기려고 하는 것일까?
박정희는 모내기철이면 농촌에 가서 농민들과 더불어 막걸리 한 잔 마시고 금일봉 전하는 것으로 민생을 챙겼다. 이런 장면을 '대한늬우스'로 보도하는 뒷전에서 노동운동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것이 박근혜가 말하는 "민생챙기기"라는 데 나는 한 점의 의심도 없다. 이명박이 시장가서 떡볶이 먹은 뒷전에 복지예산 빼돌려 건설투기 세력 돌봐준 것과 똑같은 행태가 확실히 예상된다. 대구 가서 텅 빈 시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블라우스 한 장 사는 것으로 때우는 행태는 (관련기사 ☞ "대구 찾은 박근혜, 블라우스 한 장만 사고 갔다") 역사의식 없이 민생을 챙길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둘째 사례는 정두언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다. 새누리당이 떠들어대는 "특권포기"라는 게 허망한 말장난이라는 점은 이미 충분히 거론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할 필요는 없다. 민주당에서도 반대표가 별로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비아냥 역시 충분히 지적되었기 때문에 보탤 말이 없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 사태에 관해 저런 정도밖에 할 말이 없느냐는 것이다. 박근혜 한 마디에 우왕좌왕하는 새누리당의 행태나, 자기들이 분명한 방침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누리당만 공격 대상으로 삼는 민주당의 행태는 조롱당해 마땅한 면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기성 정치판을 조롱만 하면 무슨 문제가 해결되는가?
박주선이든 정두언이든 검찰이 다짜고짜 체포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검찰의 의도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정황은 결과만 봐도 명백히 드러난다. 정두언 체포동의안이 부결되자 불구속 수사로 방향을 바꾸지 않았는가? 구속 수사는 도주의 우려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때에만 필요하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할 때에만 인신구속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두언에 대해 이제는 불구속 수사가 가능한데 왜 그 전에는 구속이 필요했던 것일까?
검찰이 BBK 가짜편지 무혐의처리 결과 발표를 앞두고 여론을 조작할 의도에서 체포동의안을 냈다는 증거는 없다. 검찰 승진 인사 발표가 여론의 초점이 되지 않도록 언론에 화제거리를 하나 던져준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내게 없다. 단,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하다. 월급 받고 기자로 일하는 사람들이 이런 지점을 짚어냈더라면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런 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나라도 얘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언론의 경마식 보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이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나라고 해서 이에 관해 뾰족한 해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 언론의 저질성이 정치의 저질성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만은 아무리 자주 지적해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언론의 저질성이라는 문제는 월급 받는 기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위 "논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정치평론가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할 사항이다. 이번 일의 경우, 논객이라는 사람들 역시 조롱과 비아냥에 재미를 붙여서 덩달이춤판에 똑같이 가담했기 때문이다.
정두언 체포동의안에 민주당도 상당수가 반대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당도 똑같다 식으로 말하고 치우면 모든 문제가 끝나는가? 이걸로 끝난다고 보는 태도는 결국 각자 목전의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결론에 동조하는 태도와 같다. 이런 결론을 맘속에 품고 있으면서, 정치에서 무슨 희망을 보겠다는 것인가?
이번 일을 보면서 나는 국회의 표결은 비밀투표로 하면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의회제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의원들의 표결에는 비밀투표라는 것이 없다. 공약을 내걸고 선거에서 당선된 인민의 대표들이 의사당 표결에서 무기명으로 임한다면, 누가 공약을 지키겠는가? 의회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일정한 수의 인구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대의기구에서 행하는 투표는 반드시 기명이어야 한다. 그래야 책임정치가 이뤄지고, 그래야 저질 정치가 조금이라고 고질로 개선될 여지가 열린다. 의회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 의사당 내의 투표는, 단순히 기명 정도가 아니라 점호식으로 이뤄진다. 의장이 의원의 이름을 호명하면 호명된 의원이 자기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로 찬성 아니면 반대를 공개적으로 딱 부러지게 표명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의 국회에서도 일반 법안 표결에서는 기명투표가 원칙으로 정해져 있다. 단, "대통령으로부터 환부된 법률안과 인사에 관한 안건"(국회법 112조 5항)과 "국회에서 실시하는 각종 선거"(6항)는 예외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의 국회를 저질로 만드는 치명적인 독소조항이다. 이번 표결이 기명투표였다면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고, 나아가 표결 이후에 벌어졌던 무수한 쓸데없는 추측게임과 물타기와 말장난이 아예 설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정치판에서 말이 많은 것 자체는 저질 정치의 증거가 아니라 고질정치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단, 많은 말들 가운데 계급 이익을 은폐하는 언설과 공동체의 이익을 지향하는 언설을 분별하느냐 못하느냐에 저질과 고질의 갈림길이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 가운데 "나처럼 생각하는 많은 국민"말고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많은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을 찾는 유권자가 많아져야 공동체의 이익이 살아난다. "나처럼 생각하는" 국민과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국문 사이의 조화는 오직 역사의식을 매개해야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판에서 역사논쟁이 벌어져야 한국 정치가 고질로 바뀔 희망이 열린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행태에 대해 조롱과 비아냥으로 일관하는 논객들보다는, 소모적인 논쟁을 불식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책에 눈길을 주는 평론가들이 많아져야 정치가 고질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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