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논자들은 이른바 고용 쇼크의 책임이 소득주도 성장 정책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소득주도 성장은 고용과 일자리 정책이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올시다'. 싱거운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소득주도 성장은 말 그대로 ‘성장론’의 하나일 뿐이다.
성장론의 하나? 그렇다면 다른 성장론도 있다는 말? 그렇다. 있는 수준이 아니고 널려 있다. 국가 경제, 즉 파이가 커져야 기업과 국민의 배도 부를 수 있다며 사기를 쳤던 군사독재 정권을 포함해 한국의 역대 정부는 모두 일종의 ‘성장론’을 경제정책으로 삼아왔다.
문재인과 이명박·박근혜의 다른 점과 공통점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결국 일자리도 기업이 만드는 것이라며 '비즈니스 프렌들리',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내세웠다. 기업이 잘 되어야 국가 경제와 국민 소득도 늘어나고 성장도 담보한다는 논리였다. 문재인 정부 정책과 비교하자면 기업 주도 성장론이라 해야 할까?
적어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것만 봐서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그것과 확실히 다르다. 기업이 잘 되도록 해줬지만 기업 이윤과 배만 불려줬을 뿐, 일자리도 늘지 않고 소득도 증가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실제 소비의 주체가 되는 국민의 소득을 높여주는 것이 성장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기업 이윤 대신 소득을 늘려주면 경제도 성장하고 일자리도 늘어나는 것일까? 기업 이윤을 늘려주건 소득을 늘려주건 결과적으로 경제가 성장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성장이 다시 일자리 창출과 기업 투자 증가 ⇒ 소득 증가와 소비 진작 ⇒ 경제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원동력일까?
문재인 정부이건 이명박·박근혜 정부이건 이러한 성장이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가져온다고 믿었다는 점에서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다만 그 성장과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원동력 역할을 무엇이 하느냐라는 점에서 의견이 갈라진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기업 이윤, 문재인 정부는 소득 증가라고 본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 : 성장이 일자리를 만들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성장론’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선 미국에서는 이미 1990년대부터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 즉 경제는 성장하는데 고용과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 신조어가 생겨났으니 말이다.
어? 경제는 성장해도 일자리가 늘지 않는다고? 그렇다. 바로 여기서 ‘성장론’들의 근본적인 문제점 하나가 놓여 있다. 성장이 저절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즉, 경제 성장이 고용 창출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업 이윤이 아니라 소득이 늘어나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이게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 법이다.
"고용 없는 성장은 신자유주의 시대에나 있었던 현상"이라는 반론이 이어질 법 하다. 1980년대 미국·영국 등에 상륙한 신자유주의 정책 자체가 기업 이윤을 위해 봉사해온 시스템이었던 만큼 소득주도 성장론과 비교해선 안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 정책은 적어도 기업 이윤 증가가 소득과 일자리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한 것이다. 하지만 소득 주도 성장은 자동으로 일자리 증가를 가져올까? 최근 '고용 쇼크' 논란이 있는 만큼, 성장이 곧 일자리를 만들어내진 않는다는 말은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박근혜도 기업의 고용형태 자율개선 믿었지만…
성장이 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주장은 성장론자들이 믿고 싶은 주장일 뿐 현실에선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박근혜 정부 역시 ‘고용형태 공시’ 제도를 도입해 기업이 비정규직 규모를 공개하도록 만들면, 부끄럽고 쪽팔려서라도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줄이는 등 자율개선에 나서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는가?
아래 표는 2015년부터 올해까지 고용형태 공시 결과를 바탕으로 작성해본 것이다. 상시 300인 이상을 고용하는 사업체가 각 연도의 3월 현재 고용 규모를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즉, 2018년 자료의 경우 올해 3월 현재 정규직·기간제·용역·파견 노동자 고용 규모를 나타낸 것이다.
<인사이드 경제>의 눈에 띄는 대목은 2가지이다. 먼저, 전체 고용 규모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통계청 자료 하나만 갖고 '고용 쇼크'라고 무작정 주장해선 안 된다는 근거가 여기에도 하나 있는 것이다. 2016년에는 전년 대비 14만 명, 2017년에는 2만 명, 올해에는 11만 명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비정규직 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전체 고용 규모 대비 비중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들 기업은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 부끄럼 없이 공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용형태를 공시하도록 만들면 부끄럽고 쪽팔려서라도 기업들이 자율개선에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기업으로 갈수록 더 극악하다
'300인 이상 사업체라고 다 대기업이라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런 질문이 있을까봐 정부는 친절하게도 이들 공시자료를 기업 규모별로 분류해서 제공해주고 있다.(아래 표) 500인 미만, 1000인 미만, 5000인 미만, 5000인 이상으로 나누어서 말이다. 300인 이상은 몰라도 1000인 이상 사업장이라면 대기업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여기서도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 비정규직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부문이 바로 1000~4999인 사업장이라는 점. 둘째, 기업 규모가 클수록 간접고용(용역·파견) 비정규직 사용이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점. 500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무려 25%에 달한다. 대기업일수록 가장 열악한 형태의 비정규직 사용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자, 이 대목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게 있다. 저런 부끄러운 수치들을 굴지의 대기업들이 아무런 수치심 없이 공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작년 수치를 기입할 때엔 이미 박근혜가 권좌에서 쫓겨나고 문재인 당선이 확실시되던 시점이다. 즉, 대기업들은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작년과 올해 2년 동안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공시 데이터를 입력한 것이다.
빛의 속도로 사라진 문재인의 공약
고용형태를 공시하도록 해서 기업의 자율개선을 유도한다? 기업에 그런 사회적 책임이 생기는 것보다, 차라리 수퇘지가 애를 배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관련 기사 : <인사이드 경제> "기업 '자율 개선'? 수퇘지가 애를 배길 바라지?")
고용을 늘릴 경우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 역시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자본의 속성상 투자할 돈이 있으면 고용을 늘리는 게 아니라 로봇과 기계장치 도입을 늘린다. 자본가들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마지막 수단으로 고용을 늘린다. 노동자 수가 늘어나면 그들의 힘도 늘어나며, 민주노조라도 만들어지면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계급을 상대하려면 당근이 아니라 채찍을 들어야 한다. 인센티브가 아니라 페널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작년 대선까지만 해도 민주당은 이 사실을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문재인의 대선 공약집에 일정 규모 이상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대기업에 '부담금'을 물리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래는 대선공약집 캡처 사진)
그러나 이 공약은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 직후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사라지게 된다. 일단 당선 직후 만들어진 '일자리위원회'의 100일 플랜까지만 해도 비정규직 고용 부담금제는 논의 의제로 분명히 올라 있었다.
하지만 7월에 발표된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설정한 국정과제 내용에서 빠지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작년 10월에 일자리위원회에서 확정된 정부 '일자리 정책 5년 로드맵'에서 사라지게 된다. 아무런 설명도, 해명도 없이 문재인 정부 출범 5개월 만에 대선 공약이 실종되고 만 것이다. 결국은 기업들에 부담이 되니 삭제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설마 소득주도 성장 앞에 생략된 단어가?
사실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관련 정책은 따로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81만 개 좋은 일자리 창출' 공약은 대선 시기에 많은 쟁점이 되지 않았던가. 그 중 핵심은 공공부문에서 정부가 직접 사용자 지위에서 챙기겠다는 것이었고, 민간부문의 경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 창출을 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벌써 까마득하게 잊혀진 얘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다. 문재인 정부 스스로 저 얘기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공약과 정책이 사라지고 있는데 사과 한 마디, 해명 한 줄이 없다. 그렇다면 잊혀지지 않도록 다음 글에서 <인사이드 경제>가 그 약속들을 다시 호출하도록 하겠다.
대신 문재인 정부는 대선 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얘기, 아니 대선 때 했던 약속과 충돌하는 얘기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권의 '규제 프리존법'의 이름만 바꾼 '규제 샌드박스법', 의료 민영화를 야기할 원격 의료 허용 확대, 야당 시절엔 반대했던 서비스산업발전법 등이다.
이거야말로 "규제는 암 덩어리"라고 했던 박근혜 정책의 '시즌 2' 아닌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는 것. 이렇게 해서 기업의 이윤을 늘려줘야 일자리도 늘어나고 소득도 증가할 거라던 박근혜 정권의 얘기가 다시 귓전을 때리는 느낌이다. 규제를 해야 일자리를 늘릴까말까 할 기업들에 규제를 다 풀어준다니?
혹시, 혹시 말이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주어 하나가 생략된 건 아닐까? ‘기업소득 주도 성장’ - 사실은 이게 바로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얘기했던 성장론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개념이다.
청와대 장하성 정책실장은 직접 기자 간담회를 통해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강조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실제 정책은 과거로 향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재벌과 자본을 규제하기보다, '혁신성장' 구호를 외치며 그들에게 선물보따리를 풀어주려 한다. 뭐가 진실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 정부의 말이 아니라 실천을 보아야 한다. 두 눈 부릅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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