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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 성공의 재현인가 악몽의 되풀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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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 성공의 재현인가 악몽의 되풀이인가?

[시민정치시평] "엑스포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문명적이어야"

인류 문명의 극한을 가름하는 엑스포가 한국에 왔다. 지금 한반도 남단 여수에서 엑스포 행사가 한창이다. 한때 만국박람회라 불렸던 세계박람회 또는 엑스포(Expo)는 2-3년 주기로 개최지를 바꿔가며 열리는 세계 최대의 공공 박람회이다. 아무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 산다 해도 단일한 행사로 엑스포만큼 볼거리가 넘치는 행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최초의 엑스포는 1851년 런던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렸고 이후 파리, 비엔나,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면서 현대 문명의 단계를 한 눈금씩 올려 나간다. 에펠탑 같은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세워지고, 증기기관이나 전화기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이나 햄버거 같은 현대문명의 아이콘도 엑스포를 통해 세계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미 이때부터 하루에 수십만 명의 인파가 행사장에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현대 문명을 한발 앞서 체험해보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 흥분이 느껴진다.

인류문화의 진보를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세계적 축제의 장에 한국이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속에도 조선은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엑스포에 참가하였다. 세계 속에 한국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엑스포라는 장을 활용한 것이다. 전해오는 기록을 살펴보면 25평의 자그마한 전시관을 얻어 당시 한국의 특산품을 한가득 쌓아 놓았고 때때로 국악을 연주하였다고 한다.[사진-1]

사진 1- 시카고 엑스포 조선관, 1893 사진-2 여수 엑스포 한국관, 2012

구한말의 비극 속에서 세계 엑스포 역사에 어렵게 이름을 올린 조선은 가마, 짚신, 연, 도자기, 호피, 인삼 등을 볼거리로 내놓았다. 그러나 새로운 문물과 지식의 각축장 속에 이런 것들을 내놓았으니 현지 언론의 반응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한국 제품을 "싸구려 폐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파견된 조선인들이 돈이 없어 굶주림에 빠졌는데 호텔 주인의 호의로 연명했다는 기사도 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처럼 아득한 과거로 느껴지지만 불과 서너 세대 전의 일이다. 지금 여수 엑스포의 주빈국 한국관에 가득한 최첨단 IT 기술과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거대한 영상 디스플레이 앞에 서면 분명 역사의 진보가 느껴진다.[사진-2]

흥분과 감회는 대강 여기까지이다. 여수 엑스포장에는 새로움과 도전의 감동도 있지만 되풀이되는 아픔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세계 엑스포를 개최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1993년 대전에서 엑스포를 주최한 바 있으니 19년 만에 이 국제적 행사를 또다시 연 셈이다. 지난번의 경험과 그간의 달라진 국격을 생각하면 이제는 좀 더 성숙하게 과제를 풀어나갈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지난번 대전 엑스포의 악몽이 되풀이될 것 같은 우려와 근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하드웨어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고, 행사가 개최된 지 단 이 주 만에 관람방식이 예약제에서 대기제로 바뀐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임기응변식 행사 진행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지 오래되었다. 무엇보다도 황당한 것은 인기 가수를 총동원해서 인기몰이를 나서겠다는 조직위원회의 태도이다. 목표로 했던 1000만의 입장객 수를 채우지 못할 것 같아지자 조직위원회가 다급해진 것이다. 이러한 초조함의 배경에는 사업의 승패를 입장객 수나 수입액으로 재단하려는 행정당국의 근시안적 태도가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국민의 혈세가 투여되었으니 조직위원회와 행정당국도 가시적 성과에 매달릴 만도 하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엑스포의 본 목적을 되새기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며 여기서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사실 누가 뭐래도 엑스포의 핵심은 국제관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박람회의 본래 취지도 그러하다. 따라서 승부를 걸려면 국제관에 걸어야 하고, 이번 엑스포의 문명사적 의의도 바로 이곳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 대형수족관이나 대기업 홍보관이 여수 엑스포가 던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부대행사가 엑스포의 주인공이 될 수는 더더군다나 없다. 이번 여수 엑스포가 내 건 슬로건인 '바다와 환경', '재생 에너지 문제'같은 문제를 세계 각국이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과학문명을 통해 실현하고 있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진지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곳도 당연히 국제관이다.

사진-3 여수 엑스포 국제관 (멕스코, 프랑스 터키)

여수 엑스포의 국제관에 참여한 105개국 중 46개국은 독립적인 전시공간을 마련했고 나머지 국가는 공동 전시공간에 참여했다.[사진-3] 120년 전 한국처럼 토산품을 낸 국가도 있고 최첨단 기술을 선보인 국가관도 있다. 소박한 어선 모형부터 로봇 물고기나 만년설 빙하 체험까지 국가마다 전시 기술에서 확연한 기술력과 상상력의 차이를 드러내지만 그래도 이번 세계 박람회의 주제인 바다와 물의 문제를 나름 진지하게 풀어나가려 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떠나는 세계여행"이라 하지만 막상 국제관 앞에 서면 막막하다. 손에 지워진 불친절한 지도 한 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천문학적 예산은 어디로 가고 손바닥만한 안내서는 세계로의 여행이라는 흥분을 도리어 감퇴시킨다. 사람들은 입소문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뭐를 봐야 할지 막막해한다. 답답한 마음에 사람들이 몰리는 수족관이나 공연장을 향하지만 곧 식상하게 될 것이다. 결국 엑스포의 의미는 국제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엑스포의 취지나 의미를 여러 국가들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보다 친절한 안내와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직 폐막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 있어 서두른다면 그간의 실점을 만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1993년 대전 엑스포를 기점으로 과학한국의 입지가 확보되었다고 믿고 싶고, 2012년 여수 엑스포를 통해 대양을 향한 인간의 상상력이 더 다채로워지기를 기대하고, 나아가 바다와 환경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해결의 실마리도 여기서 도출되기를 꿈꿔 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보다는 걱정과 우려가 점점 앞서게 된다.

▲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의 오늘날 모습: 꿈돌이랜드(위)

▲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의 오늘날 모습: 우주탐험관(아래)

여수엑스포가 막 개최되어 전 국민이 흥분에 들떠 있을 때 슬픈 소식을 하나 접하였다. 6월 1일 자로 대전 엑스포의 상징이었던 꿈돌이랜드가 소리소문없이 문을 닫게 된다는 것이다.[사진-4] 아마도 인접한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1993년 대전 엑스포의 자랑거리였던 최첨단 전시장이 하나둘씩 멈춰 서면서 폐허화된 것처럼, 2012년 여수 엑스포의 명물인 빅오도 얼마 후 멈춰선 시간이 늘어나고, 곳곳을 뒤덮은 화려한 디지털 화면들도 하나둘씩 꺼져가면서 여수 엑스포 행사장도 언젠가 흉물로 전락하면서 기억 속에서 아득히 사라지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대전 엑스포의 악몽은 여전히 진행행이다. 꿈돌이랜드는 엑스포가 끝나자마자 적자를 거듭했는데 결국 이 자리에 대기업의 테마파크가 들어선다고 한다. 지역 시민단체와 주민들은 대형 쇼핑센터로 전락할 것을 벌써부터 우려하고 있다. 엑스포 공원도 운영주체가 벌써 몇 번씩이나 바뀌면서 중장기적인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언제든 아파트나 상업센터로 뒤덮일 기세이다.

한국의 엑스포 도전역사는 슬프게 시작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살펴보면 약소국과 후진국의 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끝도 결국 슬프지 않을까 우려된다. 폐허화 된 대전 엑스포를 보노라면, 슬픈 역사의 되풀이가 망령된 기우만은 아닌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대전과 여수는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다. 여수 엑스포에서 수많은 인파와 어수선한 볼거리에 지쳤다면 대전 엑스포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대전 엑스포의 현장에서는 을씨년스러울 정도의 호젓함을 느끼면서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과 드라큘라의 백작이 살만한 괴기스러운 궁전을 동시에 실견할 수 있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덕분에 인류 과학 문명의 한계와 함께 한여름 더위를 날릴만한 공포체험도 가능한 아주 색다른 여행지가 마련된 셈이다. 이것이 여수 엑스포의 내일이 아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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