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의원은 19일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의 방어논리인 '연좌죄론'을 반박하면서 "박근혜 의원이 단순히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고 난 뒤에 청와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지 않느냐"며 "임명장도 주고 정치적 행위를 했다. 나이가 어리지도 않아 20살 훨씬 넘었는데 유신통치의 장본인이었고 그건 누구도 부인 못 한다"고 말했다.
내로라하는 '반독재투사' 출신으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던 이재오 의원이 유신 체제에 대해 극심한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이 의원은 지난 2004년 박 전 대표와 같이 야당인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을 때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박 대표는 유신 잔당이 아니라 유신 그 자체이며,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독재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말한바 있다. 이 정도면 박근혜 공격에도 '진정성'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전 대표는 퍼스트레이디 시절에 무슨 일을 했을까?
"총화의 정신이 흐려진다"며 새마음운동 추진
▲ 좌측 상단, 여학생들로 부터 군대식 사열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새마음의 길 |
1977년 1월 3일 저녁 MBC TV는 신년특집프로그램 '대통령 영애 박근혜양과 함께'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물질주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무너진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을 되찾고 튼튼한 복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자는 새마음 갖기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요"라고 말했다.
이 '바람'은 즉각 실행됐다. 불과 16일 후인 그해 1월 19일 최태민을 본부장으로 새마음갖기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다. 3월 17일에는 박근혜와 당시 내무장관 김치열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새마음갖기범국민궐기대회가 열렸다. 박근혜는 격려사에서 "정신문화의 기반이 다져지지 않아 우리 고유의 전통인 총화의 정신이 흐려지고 있다"면서 "충효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새마음갖기운동이 어느 단체나 지방에 국한되지 않고 국민전체의 국민철학으로 심어져 나갈 때 이 땅은 이상적 복지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발족식을 필두로 그해 내내 인천경기, 경남, 대전충남, 대구경북, 부산, 강원, 충북 등 전국에서 차례로 '새마음갖기궐기대회'가 열렸다. 수천에서 수만명까지 학생, 시민들이 동원된 이 행사에 박근혜는 꼬박꼬박 참석해 격려했다. "물질만능주의를 추방하고 정신문화를 함양하자"는 문구가 빠지지 않았다.
그 해 5월 박근혜가 AFKN(주한미군방송) '목사와의 대화'에 출연한 것이 눈에 띈다. 박근혜는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급속한 산업발전이 이룩되면 물질주의의 병폐를 시정하기 위해 일종의 정신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새마음운동 정신속에서 생활해나간다면 그것이 우리나라의 정신혁명의 바탕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새마음 행사에 동원
박근혜의 1977년은 그해 12월 30일 KBS, MBC, TBC 등 당시 공중파 TV방송 3사가 저녁 7시 30분 프라임타임에 동시에 방송한 소년특집프로그램 '대통령 영애 박근혜양과의 대화'에 출연한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자리에서도 박근혜는 "새해에는 국민여러분과 함께 더욱 조용히 알차고 구체적으로 새마음갖기를 실천하여 결실을 맺어보겠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1978년에 박근혜는 구국여성봉사단총재와 새마음봉사단 총재가 됐다. 이 해에도 전국 시도별로 '노인 새마음갖기대회' '중고생 새마음갖기대회'등이 계속 열렸고 시도별, 직능별, 연령별 지부 조직이 속속 발족했다.
▲ 박근혜의 첫 저서 '새마음의 길'ⓒ새마음의 길 |
이 책이 박근혜의 공식적인 첫 저서다. 그 때 박근혜의 나이가 지금 손수조 새누리당 부산 사상당협위원장과 동갑인 28세였다.
유신의 마직막 해인 1979년 새마음운동의 규모는 더 커졌다. 그 해 2월 현대그룹 발족식에는 정주영 당시 회장 뿐 아니라 당시 상공부, 건설부, 동력자원부 장관, 서울시장까지 참석했다.
새마음 교육원에서 새마음요원 배출, 연예인 새마음봉사대 창설 등 그야말로 전국이 '박근혜의 새마음'으로 뒤덮혔다.
같은 해 5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명예총재에 추대되면서 새마음운동은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자신이 명예총재로 추대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이 "요란하게 기세를 올리는 것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실천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청와대 내부에서도 우려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5공 출범으로 막 내린 '새마음 광풍'
▲ '새마음'행사장에 운집한 사람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있다ⓒ새마음의 길 |
1975년 12월 '박지만 때문이다'는 풍설과 함께 대마초 파동이 터지고 박정희 정권은 두발, 치마길이, 양담배 등에 대한 전면적 단속과 더불어 일종의 '정화운동'에 돌입했다.
결국 박근혜의 새마음운동은 이 후속조치였다. 보기에 따라선 유신정신 함양을 위한 국민정신개조운동을 진두지휘하며 '유신의 안주인'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다. 단순한 '영애'가 아니었단 말이다. "정치적 행위를 했다", "유신독재의 장본인이었다"는 이재오 의원의 주장을 꼭 과장으로 치부하기도 힘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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