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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생도들, 전두환 그 대목도 존경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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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생도들, 전두환 그 대목도 존경했나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62> 전방 병력 빼내 감행한 쿠데타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말하고 썼다. 읽고 또 퍼 날랐다. 육사생도들을 사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2·12쿠데타와 광주학살이 주축이 되는 전두환 씨 스토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5년 전 서울의 한 여고생이 '광주' 이야기를 쓴「그날」이라는 시가 새삼 가슴을 쳤고, 전 씨의 동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쓴「29만 원 할아버지」라는 시도 인터넷에서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다.

재산이 29만 원 밖에 안돼서인지 추징금 1600여억 원을 내지 않은 상태인데도, 손녀는 억대의 혼인 예식을 치르고, 귀빈골프를 즐기면서 재벌 못지않은 초호화 생활을 하는 분의 이야기가, 또 그런 분을 가장 존경한다는 하나회 출신 국회의장이 등장한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열을 돋웠다. 전두환 씨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면서도, 이 나라 경찰의 공식 경호까지 받으며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음을 본보이고 있다. 세상 일이 이렇게도 굴러갈 수 있다는 사실은 맥 풀리는 일이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의 죄상이야 다 아는 일이지만, 요즘 그를 논하는 그 많은 말과 글 가운데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이야기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육사생도들을 사열한 게 6월8일이니까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도 그렇다. 다소 뒤 늦은 감도 있으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로 그 빠진 이야기를 그냥 빼놓고 갈 수는 없다. 누군가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다.

▲ 지난 8일 육사생도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전두환. ⓒjtbc화면 캡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상에는 이런저런 쿠데타가 참 많았다. 물론 그런 쿠데타는 대부분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주범은 반란수괴(反亂首魁)에 해당한다. 요약해 말하자면, 전두환 씨의 12·12쿠데타에는 그런 여느 쿠데타와는 성격이 매우 다른 측면이 있다. 그야말로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매우 질 나쁜 쿠데타였다.

이 나라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다. 그 휴전선에서 제자리를 굳게 지키며, 한시도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군인들이 슬며시 자리를 비우고 떼를 지어 서울로 갔다. 명령에 따른 출동이었다. 국권찬탈(國權簒奪)에 걸림돌이 되는 군 내부 상급자를 제압하고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게 바로 12·12쿠데타였다. 그게 바로 전두환 소장과 그의 일파들이 감행한, 상상도 못할 악질 쿠데타였다.

적과 대치중인 전방에서 병력을 빼내 정권을 빼앗은 쿠데타는 일찍이 별로 없었다. 지난 8일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이 나라 국토방위의 간성이 될 육사생도들이 분열(分列)을 하며 전두환 씨 일행에게 경의를 표한 것은, 그 '전방을 비운 악행(惡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것으로도 비쳐질 수 있는 행위였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누구보다도 그러도록 시킨 육군사관학교 교장이나, 틀림없이 보고 받았을 국방부장관이 깨달아야 한다. 책임을 져야 한다.

1979년 12월12일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서는 운명을 걸고 승부수를 던진 날이었다.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전두환 소장이 계속 '권력'을 향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눈치 채고 있었다. 따라서 정 총장은 전 소장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발령키로 했으나 정보가 미리 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거꾸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전두환 소장은 그 날 12월12일 초저녁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의혹이 있다'며 부하들을 시켜 참모총장을 연행토록 총장공관을 습격했다. 몇 발의 총소리가 났으나 정 총장은 쉽게 체포되었다. 하극상이었다. 이 무렵부터 전두환 소장은 경복궁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장세동 단장실에 뜻 맞는 장군들을 모아놓고, 쿠데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정 총장 체포가 곧 쿠데타임을 직감하고, 장세동 대령에게 전두환 소장 체포를 명령했으나 장 대령은 거부했다.

전두환 소장의 사전계획에 따라 서울 주변의 공수부대는 서울로 진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26사단 등 수도권의 사단장들에게 쿠데타 진압 병력을 요청했으나, 국방부 장관의 명령이 없으면, 그 병력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은 겁에 질려 이미 국방부 청사 담을 타고 넘어가 미8군 벙커로 숨어버린 뒤였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런 숨 가쁜 상황 속에서, 전방을 지키던 노태우 소장의 9사단 병력 2개연대가 소리 없이 자리를 비우며, 전차를 앞세우고 서울로 진격해 들어갔다. 서울은 금방 손쉽게 확실하게 점령되었다. 장세동 단장실에서 전두환 소장 일파는 만세를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有故)' 이후 최규하 씨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라 전체는 전후방 모두 초 비상상태였는데도 그랬다.

훗날 밝혀지지만 북한도 초비상을 걸어 놓고 남측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 날 1979년 12월12일 9사단 지역에서 병력이 빠져나가 사실상 방어불능 상태였음을 알아 차렸다면, 북측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12·12쿠데타는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상황을 거쳐 '성공'했다. 전두환 씨가 그 두목이었다. 그 무렵 외신들은 30경비단장실에 있던 장군들을 가리켜 '권력에 굶주린 장군들(power ̵hungry generals)'이라고 썼다.

전두환 씨는 일찍이 정치군인의 길에 눈을 떴다. 대위 때인 1961년 5월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육사교장 강영훈 장군 때문에 생도들의 혁명지지 퍼레이드가 방해 받고 있다"고 밀고해, 강 교장을 연금토록 한 뒤, 생도들을 부추겨 지지 퍼레이드를 유도해 냈다. 그 때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들어 훗날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1963년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해 배타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도 국토방위 보다는 자기 회원들만의 요직 독식과 출세를 위한 것이었다.

12·12쿠데타와 '광주의 살육'이 그에게는 지울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죄업이지만, 한 때 감옥에 간 것을 빼놓고 그는 지금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들은 죽어서도 국립묘지에 묻히게 되어있다. 그런 대목도 이 나라 현대사의 슬픈 단면이다. 그 단면에서는 전두환 씨를 감싸고 있는 이 나라 주류사회인 상류 기득권층의 따뜻한 손길이 감지된다.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가 일으킨) 구국의 혁명'이라 한 5·16쿠데타 과정에서 전두환 씨는 쿠데타를 확실한 성공 국면으로 각인 시킨 육사생도 지지 퍼레이드를 만들어 냈다. 그에게는 또 12·12쿠데타 이후의 '박근혜를 보살핀 고마움'도 있다. 전두환 씨를 가장 존경한다는 하나회 출신 강창희 의원이 박근혜 의원의 지원을 받아 이번에 국회의장이 된다. 그 강창희 의원이 주요 멤버인 7인회(박근혜 의원 지지 '원로' 모임이다)에는 저 '유명한' 갈봉근·한태연 씨와 함께 유신헌법을 만든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있고, 박정희 정권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낸 김용환 씨도 있다.

요컨대, 5·16쿠데타-유신-5공-박근혜로 이어지는 질긴 인연에는 도도히 흐르는 '일맥상통(一脈相通)'이 있고, 그 중간쯤에 박근혜 의원과 전두환 씨의 얼굴이 있다. 과거 회귀의 기운이 강력하게 느껴진다. 전두환 씨가 본보이고 있는 떵떵거림에는 그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12·12쿠데타가 있던 1979년 말부터, 광주의 살육이 있던 1980년 5월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어느새 우리나이로 33세 안팎이 된다. 그 때 초등학생쯤은 되었어야 '사태'를 짐작하리라고 쳐도, 지금 40세는 넘어야 당시의 일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전두환 씨 측은 괴로운 그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한시 바삐 더 가슴 펴면서 더 떵떵거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역사에 올려진 죄업들은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건 보통 죄업이 아니다. 가해자들은 사람들이 잊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반성하고 용서를 빌면서 참회의 길을 걸어가는 게 옳다고 본다.

광주의 살육이 벌어진지 10년이나 20년 뒤에 태어난 어린 학생들이 쓴 '전두환 씨 관련' 시가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했다. 어린 학생들은 이리저리 좁은 '통로'를 헤매면서 어느새 '진실'을 찾아냈다. 알아 버렸다. 서두에서 말한 두 학생의 시 몇 대목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를 끝내고자 한다. 가해자들도 읽어야 한다. 느껴야 한다.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올라타불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놈이 좀 갑시다 허잖어 (……)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요 요말이 떡 나오데 //그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재, (……) 저짝 언덕까정 달려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그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2007년 당시 서울경기여고 3년 정민경 양의「그날」중에서

<우리 동네 사시는/ 29만 원 할아버지/ 아빠랑 듣는 라디오에서는 맨날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큰 집에 사세요?/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셨으면/ 할아버지네 집 앞은/ 허락을 안 받으면 못 지나다녀요?/(……)// (……)/ 왜 군인들에게 시민을 향해/ 총을 쏘라고 명령하셨어요?/(……)// 29만 원 할아버지!/ 얼른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세요/ (……)> -서울 연희초등학교 5년 유승민 군의 「29만 원 할아버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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