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에 대한 경찰 재수사가 새로운 내용을 전혀 밝혀낸 것 없이 요식행위로 끝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성폭력 피해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은 지난 2004년 동생의 권유로 드라마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영(가명) 씨가 배우들을 관리하던 관리자 등 12명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가영 씨는 성폭력 피해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으나, 오히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언어 성희롱, 모욕 등 2차 피해를 입고 2006년 법적 대응을 포기하고 고소를 취하했고, 결국 이를 비관해 2009년 8월 28일 자살했다. 이후 죄책감에 시달려온 동생마저 언니가 사망한지 6일 만에 자살했다. (관련 기사 : 단역 배우 어머니 "국가는 없었다")
피해 자매의 어머니 장연록 씨와 그를 돕던 문계순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 등이 1인 시위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찰 수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오다가, 올해 3월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이 사건의 재수사를 요구한다는 내용의 청원을 올려 37만 명이 이에 동의하면서 경찰의 재수사가 확정됐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중 3명은 어머니를 상대로 명예훼손 등 억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9년 만에 장례를 치르는 어머니의 눈물
두 자매의 어머니는 28일 두 딸의 장례식을 9년 만에 치르는 심경을 밝히며 눈물을 흘렸다.
"큰 딸은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 18분 18초, 건물 18층, 유품지갑 속에 8000원, 승화원 8호실에서 이승을 떠났습니다. 억울함을 숫자로 남기고 저승으로 갔습니다. 둘째 딸도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소개했던 언니를 따라 6일 뒤 같은 방법으로 갔습니다. 2개월 뒤 아빠도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습니다. 엄마는 강하니까, '우리 원수 갚고 20년 후에 만나요'라는 둘째 딸의 말만 이 뇌리에서 메아리 쳤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하늘이 부끄러워 모자를 쓰면서 몇 달을 지냈습니다. 병원을 다니라는 막내의 부탁이 있어 병원도 다녔습니다. 자살이라는 대한민국의 금기어, 그 오명 때문에 부모형제, 친척들은 쉬쉬했습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억울해서, 아파서, 못 견뎌서, 자살했습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보는 것도 아까우리 만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일초만이라도 목소리 한번 듣고 싶습니다.
'보물 1호'는 여성 장관을 꿈꾸며 대학원을 다녔고, '보물 2호'는 최고의 연기자를 꿈꾸며 예술대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우리 딸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튼튼하게 생겼네", "588(성매매업소 밀집 지역) 가면 하루 30명 상대해도 돈 벌고 자가용 끌고 산다", "강간당한 장면을 묘사해봐라", "12명 상대한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얼굴 좀 보자" 등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냈습니다. 어떻게 경찰이 대질 심문을 한다면서 가해자와 함께 옆에서 웃을 수 있나? 이들이 혈세를 받는 경찰이 맞나? 내 딸을 살려내라. 강간이 없는, 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두 자매의 추모 장례식은 이날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여성가족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등의 지원으로 거행됐다. 이 사건을 지원하고 있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이날 중구구민회관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치유 : 방관자에서 조력자로'라는 주제로 '이후포럼'을 개최했다.
"여전히 피해자를 모욕하는 내용의 경찰 재조사"
이날 토론회 발제자로 참석한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지난 6월로 활동이 종료된 경찰개혁위원회 개혁위원을 지냈고, 이 사건에 대한 경찰 재조사의 문제점에 대해 폭로했다. 신 교수는 "지난 5월 경찰이 이 사건에 대한 2차 조사 결과를 가져왔다. 전혀 재조사가 되지 못했고, 피해자를 모욕하는 내용도 상당 부분 있어서 당시 내가 그 자리에서 매우 화를 냈는데 경찰은 현행법상으로 할 만큼 했다는 태도였다. 그나마 그런 수준의 재조사 관련 보고서도 현장에서 회수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오늘 토론회 발제를 맡아 경찰 측에 여성인권진흥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재조사 관련 자료를 요청했지만 받지 못했다. 재조사 결과는 국회에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왜 제출해야 하냐는 답변을 받았다"며 경찰의 재조사가 당장의 비난 여론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신 교수는 특히 경찰이 여전히 재조사에서도 성폭력 피해를 호소한 큰 딸이 정신질환 때문에 일관된 진술을 하지 못한 것을 조사 실패의 주요한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고 문제제기했다. 그는 "보고서의 한 페이지 넘는 분량이 피해자의 진술이 얼마나 엇갈렸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며 "그 자체가 피해자를 모욕하는 내용들이었으며, 경찰 조사가 완수되지 못한 책임을 여전히 피해자에게 돌리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사라진 사건"
신경아 교수는 이처럼 경찰이 14년 전 첫 번째 조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난 4월 진행된 2차 조사에서도 실패한 이유에 대해 성폭력 사건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모든 폭력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크게 소리를 내고 가해자가 부끄러워야 한다. 그런데 왜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에서는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가해자가 활개를 치고 공권력조차 가해자를 편드는 것인지 의문이다. 단역배우 자매 사건에서 피해자는 정신질환 때문에 피해 사실에 대해 의심 받고, 안희정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똑똑한 전문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 사실을 의심 받는다. 도대체 성폭력 피해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냐?
또 이 사건은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사건이다. 많은 분들이 두 자매의 존재를 알고 이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다가 자살했는지 안다. 심지어 실명까지도 안다. 하지만 12명이나 되는 가해자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고, 얼마나 반성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어보았나? 나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가해자에 대해 들은 것은 그들이 피해 자매들의 어머니를 협박하고,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했다는 것뿐이다."
신 교수는 12명의 가해자들이 경찰 조사에 매우 불성실하게 임했으며, 경찰은 이를 방조했으며, 2차 조사에서는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인데다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가 생전에 고소를 취하했다는 이유로 다수의 가해자가 조사에 불응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가해자들에 대해선 심지어 경찰 보고서를 봐도 모르겠다. 12명이나 되는 가해자가 혐의를 부인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경찰이 사실 관계를 입증하겠다며 따져 물은 사람은 피해자였다. 경찰은 2차 조사에 일부 가해자가 출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사 자체를 진행하지 않았다. 강제 체포하지 않았다. 결국 가해자는 12명에 이르지만 두 차례에 걸린 조사에서 가해자와 가해행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가해자가 피해 자매들의 어머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에서는 큰 딸의 성폭력 사실에 대해 사실상 인정했다. 법원은 지난해 2월 이 사건에 대해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라고 규정하며 어머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큰 딸의 일기장 등에 성폭행과 관련된 매우 자세한 기록 등 이를 입증할 충분한 자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1차 조사 경찰 3명 중 1명이 해외 거주로 재조사에 불응"
신경아 교수는 재조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중요한 이유로 1차 조사를 맡았던 경찰에 대한 조사마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 사건의 1차 조사에 3명의 경찰이 책임자로 일했으며, 이중 가장 긴 시간 조사를 수행한 경찰은 여자 경찰이었다. 하지만 이 여경은 퇴직하고 현재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이 여경은 해외 거주를 이유로 경찰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고, 나머지 2명의 경찰은 모든 책임을 이 여경에게 떠넘기며 자신은 수사에 깊이 관여하지 않아서 모른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1차 조사에 대한 재조사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로 남았는데, 이렇게 조사를 끝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신 교수는 두 자매의 자살은 성폭력 사건 때문이 아니라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있었던 2차 성폭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경찰이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경찰은 재조사를 통해 어느 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대단히 심각한 정도의 2차 피해가 발생했다. 경찰 수뇌부에서 이 문제에 대해 누군가는 사과해야 한다고 개혁위원회 회의에서 주장했지만 동의를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경찰 측은 아직 재조사가 진행 중이며, 주어진 조건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박창호 경찰청 성폭력 대책과장은 본지와 전화통화에서 "신 교수의 발언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이며, 경찰이 출석을 하지 않는 가해자를 강제로 구인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을 문제 삼았다는 부분도 당시 수사기록, 진료기록 등에 대한 요약을 한 내용이지 특정한 입장을 담은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또 신 교수가 여성인권진흥원을 통해 요청한 재조사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개인정보를 담고 있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들, 여성가족부 장관 등 다른 기관이나 관계자들에게도 구두로만 보고한 뒤 회수했다"고 말했다. 그는 "관련자 20명 중 17명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이므로 아직 수사 결과를 예단하기에는 이르다"고 주장했다.
"방송사도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한편, 두 자매의 죽음은 보조출연자들의 노동조건과도 연관된 문제라는 점에서 신 교수는 방송사들도 책임 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방송 현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 그들이 성차별과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계순 위원장은 "보조출연자들은 파견근로자로 촬영 현장에서 인권유린, 성추행,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야외 촬영을 하면서 화장실조차 제공이 안 되는 열악한 작업 환경, 고용 불안, 파업 사업주로부터의 임금 착취 등에 시달리고 있다"며 "방송사들이 파견업체 선정 과정 등에서 충분히 이런 문제를 개선시킬 힘을 갖고 있지만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고 보조출연자들이 직면한 현실에 대해 증언했다.
정현백 장관 "두 자매의 죽음이 2차 피해의 심각성 알렸다"
한편 이날 장례식은 여성부, 여성인권진흥원 등이 경찰의 2차 가해에 의한 희생자를 지원하고 사과한다는 의미에서 지원을 하게 됐다.
변혜정 여성인권진흥원 원장은 "이 추모행사 자체가 사회적 치유라고 생각한다"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조력, 함께 함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가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현백 여성부 장관은 "(피해 자매의) 어머님이 계시기에 이 자리가 있었고 이 자리가 빛이 난다고 생각한다"며 "두 자매의 중심을 중심으로 수사나 재판 과정 또는 의료, 언론 보도 때문에 발생하는 2차 피해의 심각성에 대해 인식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두 자매의 죽음이 큰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두 자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지, 배려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송보경 예술문화예술연합 코디네이터는 "조력자가 해야할 가장 큰 일은 조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성폭력 피해자이며 조력을 받았던 입장에서 저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아픈 모습으로 영영 남는 게 아니라 잘 살겠다고. 때로는 다툼이 있고, 심심하고, 귀찮고, 부족함이 있는 삶을 회복해 잘 살겠다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마치 공기와도 같이 늘 그 자리에 있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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