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
3) 박정희 정부 시기 (1961~1965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 미국은 그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자로 변하여 "친공 혹은 반미감정의 증거"가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쿠데타를 승인하며 한일회담을 서두르도록 촉구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961년 6월 13일 열린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케네디 (John Kennedy) 대통령은 한국의 발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 한일 간의 지속적인 반목이라고 결론 내렸다. 버거 (Samuel Berger) 주한미국대사 지명자에게 서울에 가면 한일관계 개선에 집중해달라고 지시하고, 케네디 자신은 일주일 후 미국을 방문한 이케다 (池田) 일본 수상에게 한일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1961년 10월부터 제6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는데, 박정희는 1961년 11월 케네디의 초청으로 워싱턴으로 향하다 도쿄에 들러 이케다와 회담하며 한일수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은 1962년부터 한일협정을 "미국 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제6차 한일회담이 이른바 '대일 청구권'이라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 문제로 1962년 3월 중단되자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이 "비현실적으로 높게 (unrealistically high)" 8억 달러를 청구하고 일본은 "비현실적으로 낮게" 7000만 달러를 제공하려 하기 때문에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파악하면서, 한국보다 일본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은 보상금 규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미국에 알렸지만 일본은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1962년 5월 케네디는 요시다 (吉田) 전 수상에게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는 일본 안보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한국 안보를 지켜왔다. 한국이 일본과의 밀접한 경제관계 없이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다. 이제 일본이 역할을 해줘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그 무렵 5.16 쿠데타 이후 '제2인자'로 행세하며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10월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 (大平) 외무상 및 이케다 수상을 만났다. 그리고 워싱턴에 도착해 러스크 (Dean Rusk) 국무부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오히라 및 이케다와 대일 청구권, 어업문제, 평화선, 독도문제 등에 관해 주로 논의했다. 재일동포 지위와 문화재 반환 등도 얘기했지만 이들은 사소한 문제다. 청구권과 관련해 오히라는 1년에 2500만 달러씩 12년 동안 3억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난 3억 달러는 충분하지 않고 12년은 너무 길다면서 3억 달러 이상과 차관을 포함해 모두 6억 달러를 요구했다. (중략)
오히라는 3억 달러까지 줄 수 있지만 '보상금 (reparations)' 명목은 될 수 없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축하하는 (congratulatory in 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명목으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3억 달러는 충분하지 않고 보상금 3억 달러 이상과 차관을 포함해 6억 달러가 되어야 한다고 거듭 요구했다. 차관이 아닌 돈의 명목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전체 금액에 보상금이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진다면 '보상금'이라는 말을 고집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러스크는 한국과 일본이 될수록 최대한의 노력을 해달라고 강력하게 촉구해왔다며, 한일수교는 두 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종필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일본에 들러 오히라와 다시 만나겠다고 대꾸하며 독도 문제에 관해 보고했다.
일본이 최근에 독도 문제를 협상 주제로 들고 나오기 시작했는데, 김종필은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미루자고 했다. 독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러스크가 묻자, 김종필은 "갈매기가 들르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김종필이 오히라에게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다고 하자, 러스크도 그 해결책을 떠올렸다고 대꾸했다. 오히라는 김종필의 제안에 만족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케다 수상에겐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 게 일본의 유일한 해결책이냐고 김종필이 묻자, 이케다는 대중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 연기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독도 폭파를 한국이 제안하고 일본이 거절했던 셈인데,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 내용과는 정반대다.
김종필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와 다시 만나 두 번째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한일협정의 기초가 된 문서다. 주요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차관 1억 달러로 청구권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자금의 명목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은 '독립 축하금'으로 건네고 한국은 '보상금'으로 받았다고 서로 편리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내용이 한국에 알려지자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케네디가 1963년 11월 암살당하고 들어선 존슨 (Lyndon Johnson) 행정부 역시 "한일협상의 조기 타결을 가장 급선무"로 삼았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의 주미대사들을 부르기도 하고 러스크 국무부 장관이 일본 수상과 한국 대통령을 만나기도 하면서 다그쳤다. 그 이유는 1964년 5~7월 작성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가안보위원회 (NSC)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요즘 동북아의 가장 급선무는 한일협정이다. 이는 병력을 감축하는 것보다 미국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장기적 방법이다. 미국은 아직도 2000만 인구의 한국에 매년 3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은 장기간에 걸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나라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일본이다. 한일협정이 맺어지면 6억 내지 10억 달러의 다양한 일본 자금이 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중략)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남한에 38억 달러 이상의 경제원조와 28억 달러 이상의 군사원조를 쏟아 부었다. 우리의 모든 원조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여전히 미국의 불안정한 의붓자식 (this nation is still an unstable U.S. stepchild)이다. (중략) 우리는 1965년 한국에 대해 3억 5000만 내지 4억 달러의 원조를 계획하고 있는데,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 지불을 계속할 수는 없다."
1964년 10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1월부터 미국 방문을 추진하는데, 미국은 이를 이용해 한국 정부를 더욱 압박할 수 있었다. 정권의 정통성 확보 및 유지를 위해 국민의 지지보다 미국의 승인과 지원을 더 중시했던 박정희는 미국 방문 이전에 한일협정이 서명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일본 정부에 합의문 작성을 서둘러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반해 일본은 한국처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한국과의 수교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라 외상은 주일 미국대사에게 미국의 압력이 일본에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으니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지 말고 한일협상을 "일본인들의 방식으로 일본인들의 페이스에 따라" 추진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일본은 한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망언까지 곁들이며 '피해 보상'이 아닌 '독립 축하' 또는 '경제 협력'의 명목으로 돈을 주겠다고 배짱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의 수교에 큰 관심을 보여 왔는데 미국은 이를 이용해 일본을 압박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 일본과 중국의 관계개선을 허용하지 않던 미국이 일본에게 한일협정을 먼저 타결하면 중국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접근에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고 암시한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는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미국에게 한일협정을 6월까지 체결할 수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주일 한국대사에게 친서를 보내 6월 15일까지 한일협상을 매듭짓도록 지시하면서 성사를 위해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이에 한국의 협상대표들은 일본 측에서 문제 삼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합의문 끝에 "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쟁점은 무엇이든지 추후 협상의 주제가 될 것"이라는 문구를 덧붙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본과 협상하면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국내적으로 처리하자고 제안해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미루게 된 배경이다.
1965년 6월, 한국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이동원 외무부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한일협정에 서명했다. 그는 5개월 뒤 미국을 방문해 국무부 관리들에게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큰형 (the big brother)이다. 두 동생들이 과거에 서로 다투었는데, 앞으로 동생들이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집안일 (family matters)에 관해 얘기할 수 있도록 형님이 이끌어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한국을 '의붓자식'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한국은 미국을 '큰형'으로 받들고 싶어 했고, 한국정부는 국민의 깊은 반일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 가족이 되기를 바랐던 셈이다. 굴욕적이고 졸속적으로 처리된 한일협정과 관련해 미국의 오만함이나 일본의 무례함을 비판하기에 앞서 한국의 종속성과 비굴함을 먼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pbpm@hanmail.net
이재봉 교수는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1996년부터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년 현재 '남이랑북이랑' 공동대표,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함석헌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두 눈으로 보는 북한>, <이재봉의 법정증언>,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등이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