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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섬으로 초대! 붉은 달의 섬 자월도(紫月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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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섬으로 초대! 붉은 달의 섬 자월도(紫月島)

2018년 9월 섬학교

*강의 마감됐습니다^^

굴은 달이 차고 기우는데 따라 여물기도 하고 야위기도 한다/ 섬사람들도 굴처럼 살이 올랐다 야위었다 한다/ 섬사람들은 달의 자손이다/ 달이 바닷물을 밀었다 당겼다 하며 바다 것들을 키우면/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고동과 소라와 굴들을 얻어다 살아간다/ (강제윤 시 <자월도>)

▲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자월도 앞 무인도Ⓒ섬학교

9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75강은 붉은 달의 섬, 자월도(紫月島)입니다. 9월 1(토)-2(일)일 1박2일 일정으로 떠납니다. 풀등으로 유명한 이작도의 모섬인 자월도 또한 이작도나 승봉도 못지않게 백사장이 아름다운 섬입니다. 관광지로 이름난 인근 섬들과 달리 자월도는 여름 피서철을 제외하고는 한적한 해변을 즐길 수 있습니다. 최고점 178m 밖에 안 되는 국사봉 트레일도 걷기 편안합니다. 늦은 휴가를 다녀오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조개 캐기 등 갯벌체험도 해볼 수 있습니다. 쾌속선으로 한 시간이면 도달하는 가까운 인천의 섬이지만 아득히 떠나왔다는 느낌을 주는 섬. 섬 여행은 여권 없는 해외여행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자월도. 초가을 섬으로 초대합니다.

▲자월도 너른 해변은 더없이 평화롭고 한적하다.Ⓒ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인천 앞바다의 비경 <자월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한국의 서해, 중국의 동해인 황해

지금은 신도심이 인천의 중심이 되어버렸지만 대체로 사람들의 인천에 대한 인상은 어둡다. 잿빛 하늘과 낡고 오래된 건물들, 인천의 구도심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인천의 색채는 '우울'색이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 항구도시지만 인천은 오랜 동안 경계지대가 주는 활력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나그네는 시간 따위는 결코 흐르지 않을 듯한 인천의 옛 시가지나 희뿌연 인천의 바다가 항시 그립다. 유년과 청년기 20여 년을 인천 언저리에서 살았었다. 나그네는 낡아 빛바랜 인천에서 자주 위로 받는다. 나그네의 어머니가 사는 석남동은 인천에서도 변두리다. 경인고속도로가 마을을 가르고, 여전히 낯설기만 한 인천의 신도심보다는 김포나 강화 쪽에 더 가깝다.

어머니 사시는 석남동 거북시장에서 12번 시내버스를 탄다. 24번도 있지만 연안부두까지 가는 최단거리 노선버스는 12번이다. 경기만 인근 서해의 섬으로 가려는 사람이라면 좋든 싫든 인천을 피해갈 도리란 없다. 자월도(紫月島)로 향한다.

서해는 한국의 방위에서는 서해지만 중국의 방위에서는 동해다. 만물은 상대적이다. 국제적 명칭은 황해다. 서해는 평균수심 44m, 최대수심 103m의 얕은 바다다. 우리 동해의 평균 수심은 1684m, 태평양의 평균 수심은 4071m. 세계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의 수심은 1만1034m에 달한다. 그 깊은 바다가 우물이라면 서해는 접시물보다도 얕다.

▲주저앉고 싶을 때 섬에 가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섬들은 일어‘섬’이기도 하다Ⓒ섬학교

서해 바다가 수심이 깊지 않은 것은 서해가 육지였기 때문이다. 서해 밑바닥의 땅은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시대의 암반이다. 그 당시 서해 지역은 호수가 있는 육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구가 생긴 이후 지구에는 4번의 빙하기가 찾아왔다. 오늘날과 같은 서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만5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따뜻해진 때문이다. 빙하가 녹으면서 넒은 들판에 태평양의 바닷물이 들어와 서해가 됐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수십만 전부터로 추정되지만 그들은 끝내 한반도에 정착하지 못했다. 현재의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5천 년 전 청동기 시대, 단군왕검 때부터였을까. 충북대 고고미술 사학과 이융조 교수는 "우리 조상들은 2만5천 년 전 좀돌날 몸돌이란 석기를 사용한 구석기인들이었을 것"(<과학동아> 2004년 4월호)이라고 주장한다. 후기 구석기 좀돌날 문화기(2만~1만 년 전) 시대 사람들이 우리 조상의 원형일 수 있다는 것이다.

2만5천 년 전은 마지막 빙하기가 최고점에 달한 시기였다. 그때까지도 서해 대부분은 육지였다. 1만5천 년 전에야 서해 전역이 바다가 됐으니 우리 조상들은 중국으로부터 걸어서 서해 땅을 건너 왔을 것이다. 태곳적 선인(仙人)들이 바다를 건너 다녔다는 신화는 그저 근거 없이 꾸며낸 허황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육지의 큰 호수보다 얕은 바다, 서해.

그러나 서해의 수심이 얕다 해서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모든 바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얕아도 바다는 바다다. 서해니, 동해니, 동지나해니, 지중해니, 태평양이니 하는 이름들은 그저 인간이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하나로 연결된 한 몸의 바다. 수심 몇 미터에 불과한 얕은 바다도 수심 1만 미터의 바다와 한 몸이다. 작은 가시에 손가락 하나를 찔려도 온몸이 바르르 떨리고 아프다. 얕은 바다라 해서 얕잡아 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수만 미터 깊은 바다 속의 작용이 수심 몇 십 미터에 불과한 서해까지 밀려온다. 도시 하나쯤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쓰나미(지진 해일)나 폭풍 때문에 발생하는 폭풍 해일은 멀고 깊은 바다로부터 시작된다. 해일은 일본이나 동남아, 인도양 섬나라들만의 일이 아니다. 1088년 이 땅의 해일 발생이 처음 기록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해일만 44회에 이른다. 바람은 잠잠한데 배가 일렁인다. 수만 리 먼 바다 깊은 곳으로부터 전해온 파장 때문이리라. 한 순간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바다.

▲달뿐일까! 자월도에서는 석양도 유난히 붉다.Ⓒ섬학교

붉은 달의 섬

자월도는 인천항에서 32km 해상에 위치한다. 주변의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승봉도 등 4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를 아우르는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의 중심 섬이다. 면적이 7.06㎢이니 8.48㎢의 여의도보다 조금 작다. 해안선 둘레는 20,4km, 동서 길이 6km의 길다란 섬이다. 자월1, 2, 3리 세 개의 마을에서 400여 명이 살아간다. 이곳 또한 어느 농어촌처럼 노인 가구가 대부분이다. 고려가 망하면서 공민왕의 후손들이 숨어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진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소홀도(召忽島)’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붉은[紫] 달[月]의 섬, 자월. 자월도라는 지명은 숙종 37년 1711년 <비변사등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조선시대 남양부 소속이었던 자월도는 남양부 호방(재무 담당 관리)이 세금을 걷으러 다녔다. 세금을 걷어 돌아가려 했으나 여러 날 풍랑 때문에 돌아가지 못했다. 불안한 마음에 달을 보니 검붉은 달이 희미하게 보여 자월(紫月)이라 부른 데서 유래 했다고 전한다. 육지에서 온 관리의 속이 검붉게 타들어 갔던 것일까. 정확한 유래야 알 길 없지만 자월이란 이름은 아무래도 소홀도보다 애틋하다.

▲섬도 육지다. 내륙에 대비되는 해륙. 그래서 섬들도 농사가 많다.Ⓒ섬학교

자월도의 관문인 달바위선착장에 열녀 조형물이 서 있다. 조형물은 열녀바위의 전설에서 비롯됐다. 옛날 한 어부가 이 섬에서 어로를 하고 살았다. 어느 해 겨울, 어로를 나간 어부는 사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부의 아내는 불안하고 걱정스러워 남편을 찾아 헤매다 달바위 포구까지 왔다. 그곳에서 놀랍고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지네가 사람을 물어 죽인 뒤 촉수를 꽂고 즙을 빨아먹고 있지 않은가. 아내가 순간적으로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남편이었다. 그녀는 기막힌 슬픔에 몸을 가눌 길이 없었다. 통곡을 하던 어부의 아내는 마침내 달바위에서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일설에는 어부를 죽인 것이 큰 뱀이라고도 전해진다. 오늘의 우리는 진실을 알 길이 없다. 섬에는 유독 지네나 독사가 많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예전에는 섬에서 지네나 뱀에 물려 희생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지금이야 해독제가 있지만 당시 작은 섬에 의술을 알고 해독제를 처방해 줄 의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어이없는 죽음도 흔했을 것이다. 어부의 전설은 전설이 아니라 현실이었을 것이다. 뱀이나 지네 독에 감염돼 죽었을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어로를 나갔다 조난당한 어부의 시신이 떠밀려 왔을 것이다. 어부의 시신에 수도 없이 많은 지네들이 달라붙어 그 즙을 빨아대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지네의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내는 끔찍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어부의 죽음도 안타깝고 아내의 죽음 또한 애절하다.

옛 시절에는 남편이나 연인의 뒤를 따라 여자가 죽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하지만 안타까움과 애절함이 반생명적인 관습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열녀를 칭송하는 것은 순장을 미화하는 것과 같다. 열녀를 권하는 사회는 사악하다. 열녀의 신화는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 보던 봉건 사회의 악습이다. 열녀의 조형물이 비극적인 어부 부부의 삶과 죽음을 애통해 하는 기념물이 아니라 어부를 따라 죽은 아내의 정절을 칭송하고 열녀를 미화시키는 형태로 조형화된 것은 분명 지각없는 짓이다. 탁상행정이 관광 상품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일 것이다. 씁쓸하다.

달바위선착장에서 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는 길, 장골해안을 따라 걷는다. 장골해변은 1km, 폭 400m, 고운 모래밭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해변에서 굴을 깨고 조개, 낙지, 게 등을 잡는다. 섬의 텃밭처럼 소중한 해변이다. 장골해변 오른편의 바위섬은 독바위인데 썰물 때면 건너갈 수 있다. 장골이란 지명은 세금으로 싣고 오던 곡식을 빼돌려 팔던 장터[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해적들이 세곡선을 습격해 가져온 쌀을 매매하던 곳이었던 데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근처에 해적섬을 유명했던 이작도가 있으니 속단할 수는 없지만 장골은 잔골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작은 골짜기 아래 마을이라 작은골, 잔골이었다가 장골이 됐을 것이다.

오늘은 장골해변에 할머니들이 굴을 깨러 나왔다. 반찬거리도 하고 굴을 팔아 가계에도 보태기 위해서다. 할머니들은 자기 노동의 양만큼 굴을 수확해 간다. 바다가 죽지 않는 한 바다는 변함없이 사람들에게 먹이를 준다. 굴은 달이 차고 기우는데 따라 여물기도 하고 야위기도 한다. 섬사람들도 굴처럼 살이 올랐다 야위었다 한다. 섬사람들은 달의 자손이다. 달이 바닷물을 밀었다 당겼다 하며 바다 것들을 키우면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고동과 소라와 굴들을 얻어다 산다.

▲방목되어 살고 있는 자월도 염소 가족Ⓒ섬학교

비열하고 애틋한...

해발166m, 국사봉은 구릉처럼 낮지만 자월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면사무소 옆길을 따라 국사봉에 오른다. 길의 초입에서 막태골과 국사봉 양 갈래 길이 나온다. 마을이라야 두어 가구에 불과한 막태골, 거기도 노인들만 산다. 산자락의 계단식 밭은 묵정밭이 된지 오래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이 땅의 농경문화도 끝나가고 있다. 섬이라 해도 예전에는 섬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농사였다. 육지와의 소통이 쉽지 않은 까닭에 바다에서 나는 것들은 큰 소득이 되지 못했었다. 이제는 육지뿐만 아니라 섬에서도 땅은 더 이상 대접 받지 못하고 황무지가 되어간다. 머지않아 이 땅에서는 '농경' 자체가 문화유산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산 능선에서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흑염소 가족을 만난다. 아비 염소가 두 녀석의 아기 염소를 이끌고 간다. 어미는 줄에 매어져 있으니 아비와 새끼 염소들은 멀리 가지 않는다. 육친의 정을 이용한 방목. 염소는 풀과 나무의 생살을 뜯고, 사람은 염소를 팔아 목숨을 연명한다. 부모 자식 간, 암 수간의 정을 이용한 사냥법은 바다의 어로에서도 흔한 일이다. 고래잡이에도 많이 이용되던 수법이 아닌가. 조선 순조 때 김해 바닷가에서 유배자 김려가 목격했던 원앙어 사냥법 또한 그러했다.

"원앙어는 일명 해원앙이다. 생김새가 연어와 비슷한데 입이 작다. 이 원앙은 암수가 반드시 따라 다닌다. 수컷이 가면 암컷의 꼬리를 물고 가서 죽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낚시를 하면 반드시 한 쌍을 잡는다. 이곳 사람들은 말하기를 '원앙어를 잡아 눈깔을 빼내어 깨끗하게 말려서 남자는 암컷의 눈깔을 차고, 여자는 수컷의 눈깔을 차면 부부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라고 한다." (김려 <우해이어보>)

생이란, 생명이란 이토록 자주 비열하다. 그래도 생이여! 내 따뜻한 살이 네 주린 속 채워주는 밥이 되고 피가 되는 생명이여! 눈물겹지 않은가.

섬학교 제75강 <붉은 달의 섬 자월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월 1일(토)>
08:00 인천 연안부두 집결(배 출항시각 변경 가능성 있으며 추후 공지합니다!)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자월도행 개찰구 앞에 모입니다.
-각자 자유로운 교통수단을 이용, 도착하시기 바랍니다.
-대중교통안내 : 서울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동인천역까지 약 1시간 10분 소요. 1번출구로 나와 연안부두까지 택시로 약 20분 걸림. 장거리이므로 충분한 여유시간을 갖고 오시기 바랍니다. 용산역에서 구로역 사이에서 동인천역 급행을 타시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여객터미널 주소 : 인천시 중구 항동 7가 88번지
-아침식사는 각자 자유식으로 합니다.
-제75강 여는 모임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오시는 길

08:30 인천 연안부두 출항
-자월도 도착
-숙소 도착(화이트하우스)
-해변 및 목섬 산책
-점심식사(해물칼국수)
-휴식
-자월도 걷기(8km)
면소재지-자월3리-가늠골삼거리-국사봉-달바위선착장-큰말
-저녁식사 겸 뒤풀이(꽃게탕 또는 생선회요리)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9월 2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국밥)
-자월큰말, 장골해수욕장에서 놀기
-자월도 출항
-인천 도착
-점심식사(밴댕이무침)
-인천종합어시장 장보기
15:00 제75강 마무리모임. 해산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섬학교 제75강 <붉은 달의 섬 자월도>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9 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3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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