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우던 개 백구가 못난 주인 만나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 개를 죽인 셈입니다. 산골 깊은 곳에서 살다보니 화실을 비우고 객지로 나들이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홀로 남게 된 백구를 어찌 해야 할지 곤란합니다. 5~6일 씩 장기 출타를 하면 개를 어디다 맡겨 놔야 하는데 백구는 워낙 묶여서 지내기를 싫어합니다. 번번이 남의 개를 맡아 달라고 하기도 싫어서 망설여집니다. 자유를 줄 것인가,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인가, 고민합니다. 여긴 깊은 산골이고 20가구밖에 안 되는 곳이라 풀어 놓고 키우는 개가 많습니다. 뉘 집 개인지 다 알고 지냅니다. 개들은 친구도 많고 애인도 많은 동네입니다. 나는 개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개밥을 한 푸대 까놓고, "실컷 놀다가 배고프면 와서 먹고 집도 지켜라." 이렇게 일러두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백구는 여느 때처럼 반가워하며 달려오지도 않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겁니다. 지난번에는 산에서 멧돼지 덫에 걸려 밤새 낑낑거리는 놈을 풀어준 적이 있었으니 또 산으로 들로 찾아서 헤맸습니다. 그러다 목격자를 찾았는데 그 개는 갑자기 토하더니 죽었답니다. 그래서 땅에 묻어주었다니 주인 없는 사이에 매장까지 한 것입니다. 백구는 들개처럼 이리저리 해매고 다니다 뭘 잘못 먹었나 봅니다.
이번 붓그림은 개띠 새해를 맞아서 개의 품성을 다시 생각하며 그렸습니다. 개는 역시 인간을 잘 섬기는 품성이 있습니다. 사실 나도 백구처럼 누구에게나 섬기며 사는 순박한 품성을 갖고 싶었습니다. 남들에게 유순하지 못한 삶을 살아와서 그런가 봅니다. 물론 개처럼 맹목적으로 주인에게 충성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왕이 신이고 신이 왕인 시대에는 충성의 방향이 나의 밖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이 성숙한 민주화 시대에는 봉건적 권위주의를 거부합니다. 민주화시대는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만큼 개인의 양심과 영혼을 존중하는 문화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맹목적인 애국주의, 위선적인 이데올로기에 염증을 느끼는 고통의 시대를 겪었습니다. 이제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섬길 수 있는 님은 없는지요. 자기 안에서 님을 찾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섬기는 내 안의 애인 하나쯤 두고 살 수 없나요.
섬기는 마음은 그리운 마음입니다. 누구나 본성에 이성(異性)적 그리움 -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를 향하는 그리움을 안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의식 속에 이성성의 원형(archetype)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은 무의식에 잠재한 원형적 여성성이 자기를 순화시키며, 반대로 여자는 자기 안에 원형적 남성성이 자신을 안심시킵니다. 이것이 내 안에 계신 님입니다.
이 님을 키우고 섬기는 겁니다. 본성을 외면하지 않고 키우면서 승화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감성은 무조건 계몽해야 할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감성의 한 복판에서 이성과 영성에 이르기까지 조화를 이루는 세계, 이것이 계몽주의를 넘어선 문화 시대의 화두입니다.
내 님은 어디에 있나? 내 곁에 이성의 애인이 다 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찰떡궁합의 이성을 만나면 그래도 행운이지요. 그러나 이성이 근원적인 외로움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보통 사랑이란 자신 속에 있는 이상형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속에 '사이버 애인' 하나를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충성은 한자 忠자 그대로 마음 한 가운데에서 애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내 안에 애인 하나 섬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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