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병헌이 출연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드라마는 구한 말, 강대국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황폐해진 조선 민중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구한 말의 곤고(困苦)함은 중화적 질서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이다. 1000년간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지면서 동아시아는 요동치게 된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흔들리자 민중도 흔들린다. 우리의 '국난(國難)'은 늘 국제 질서의 위기와 함께 온다. 100여 년 전 조선은 이런 패권 국가들이 서로 부딪치는 최전선이었다. 지식인은 그 '황폐'에 절망하며 시대를 기록한다. 지식인의 이름은 이인직, 그가 기록한 보고서는 <혈의 누>였다.
이인직이 <혈의 누>를 쓰기 전 상황은 이러했다. 1884년 12월 일본의 힘을 업은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청의 원세개가 개입하자 정변은 3일 만에 실패하게 된다. 이후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는다. 톈진조약의 핵심은 두 나라 모두 조선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894년 6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파병을 일본에 알렸으나, 일본은 곧 청군에 대항할 군대를 보낸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거하고 김홍집을 위시한 친일내각을 구성해 갑오경장을 추진한다. 일본의 독주로 청과의 갈등은 더욱 격화된다. 결국 양국 간 전쟁이 벌어진다.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은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분기점이었고, <혈의 누>의 배경인 평양성전투는 청일전쟁을 판가름하는 승부처였다.
이인직이 <혈의 누>를 <만세보>에 연재한 때는 1906년이었다. 1906년은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1905년 보호국화한 지 불과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혈의 누>는 청일전쟁(1894)의 한고비였던 평양성전투에서 부모와 헤어진 어린 옥련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문학평론가 임화는 <혈의 누>를 청일전쟁으로 인한 "굴곡 많고 다면적인 역사적 운동이 옥련이라는 소녀의 기구한 운명 위에 교묘히 표현되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혈의 누> 전체 이야기는 청일전쟁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혈의 누>는 가족과 헤어진 어느 여인(최 씨 부인)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여인은 청군과 일본군 사이의 평양성전투를 피하려다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다. 소설에는 청일전쟁 난리 통에 딸을 잃은 어머니의 모습이 절절히 그려진다.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두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풍도해전, 성환전투 등 연이은 패전은 청군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청군은 평양 성안의 백성들을 향해 야만적 수준의 직접 징발을 일삼는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은 제 목숨을 보전하기도 힘들어진다. 물자의 강제 갹출, 조선 여인에 대한 폭력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평양성을 벗어나 피난을 간다. 이 여인도 그런 피난민 중 하나였다.
수많은 백성들을 피해자로 만든 전쟁의 상처는 너무 컸다. 우리는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조선의 고난을 이인직은 소설 속 김관일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떨어진 꽃과 같이 간 곳마다 발에 밟히고 눈에 걸리는 피난민들은 나라의 운수런가. 제 팔자 기박하여 평양 백성 되었던가. 땅도 조선 땅이요 사람도 조선 사람이라.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싸움에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가."
소설이라는 문학 양식은 근대세계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교통도 통신도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동쪽 구석의 사람과 서쪽 구석의 사람이, 북쪽 끝의 사람과 남쪽 끝의 사람이 동일한 운명 공동체임을 깨닫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이인직은 소설을 통해 이것을 수행한다. <혈의 누>는 평범한 한 여인이 겪는 고통을 정밀히 묘사함으로써 남들의 '전쟁'과 한 여인의 '고통'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 한다.
'우리나라는 어쩌다 약한 나라가 되었는가'가 <혈의 누>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었다. 이인직은 조선을 어떻게 보고 있었던가. 조선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국가 자체가 민중 수탈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에서 조선에 대한 그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평안도 백성은 염라대왕이 둘이라, 하나는 황천에 있고, 하나는 평양선화당에 있는 감사이라. 황천에 있는 염라대왕은 나이 많고 병들어서 세상이 귀치않게 된 사람을 잡아가거니와, 평양선화당에 있는 감사는 몸 성하고 재물 있는 사람은 낱낱이 잡아가니, 인간 염라대왕으로 집집에 터주까지 겸한 겸관이 되었는지, 고사를 잘 지내면 탈이 없고 못 지내면 온 집안에 동티가 나서 다 죽을 지경이라."
조선의 신분제가 만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도 이인직은 최 씨 부인 친정아버지의 머슴 막동의 입을 통해서 신랄히 비판한다.
"나라는 양반님네들이 다 망하여 놓으셨지요. 상놈들은 양반이 죽이면 죽었고, 때리면 맞았고, 재물이 있으면 양반에게 빼앗겼고, 계집이 어여쁘면 양반에게 빼앗겼으니, 소인 같은 상놈들은 제 재물, 제 계집, 제 목숨 하나를 위할 수가 없이 양반에게 매었으니, 나라 위할 힘이 있습니까."
이인직이 본 조선은 국가가 앞장서 백성을 수탈하는 그런 나라였다. 아무런 죄가 없어도 관리들이 뇌물을 받기 위해 죄를 만들어 씌운다. 이런 조선의 모습은 이인직의 또 다른 소설 <은세계>의 주제였다. <은세계>는 강릉 부자 최본평을 이미 죽은 부모에게 불효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죽이는 이야기다. 부도덕한 조선은 개혁되어야 했다. 개혁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인직이 생각한 것은 서구에서 도입된 사회진화론이었다. 다윈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동양에서 적자생존에 따른 국가주의적 부국강병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만든 이는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였으나, 조선 땅에 전파시킨 이는 일본 망명 시기 가토의 영향을 받은 량치차오(양계초)였다. 사회진화론은 당시 개화에 우호적인 대다수 지식인의 세계관이 되었다. 우승열패가 인간 사회의 진리다. 힘을 가진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게 된다. 외세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 힘을 키우기 위해서 새로운 문물을 배워야 한다. 힘이 없는 나라의 국민들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널리 알림으로써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워야 한다. <혈의 누>의 목표는 당대 조선인에게 시대적 경각심을 주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회진화론적 관점은 이완용의 비서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했다. 망설이던 이완용을 부추겨 조약에 서명하게 만든 것이 이인직이였다는 일본 측의 전언도 있다.
<혈의 누>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평양성전투 때문에 피난 가던 도중 김관일의 가족은 서로 헤어지게 된다. 딸 옥련은 일본 군의관의 양녀가 되어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생각한 아버지 김관일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어머니 최 씨 부인은 두 사람의 생사를 모른 채 집으로 돌아와 기다린다. 일본에 간 옥련의 양부가 사망하자 양모의 학대가 시작된다. 집을 나와서 죽기를 작정하던 그녀는 우연히 조선 유학생 구완서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미 미국에 와 있던 김관일은 신문에 난 기사에서 옥련을 발견하고 딸을 찾아간다. 옥련과 아버지 김관일은 다시 만난다. 조선인이 서구문물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소설의 주된 플롯이다.
<혈의 누>는 서구식 문명에서 희망을 본다. 소설에는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대한 호감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옥련의 어머니는 산속에서 낯선 조선 남자를 만나 봉변을 당할 뻔하지만, 일본 헌병에 의해 구조된다. 그녀의 사정을 들은 일본군의 인간적인 모습이 소설에 표현된다.
"규중에서 생장한 부인이 그러한 난리 중에 그러한 풍파를 겪었다 하는 말을 듣는 자 누가 불쌍타 하지 아니 하리요. 통변(통역-필자주)이 말을 전하는 대로 헌병장이 고개를 기울이고 불쌍하다 가이없다 하더니."
또한 전쟁 통에 고아가 된-비록 오해였지만-7살 여자아이를 일본 군의관은 서슴없이 양딸로 삼는다.
타자에 대한 호감은 종종 자제심을 잃고 질주한다. 세상에 절망하는 이인직과 같은 지식인은 자신의 장소를 비하한다. 비하의 감정은 모멸의 감정으로 증폭된다. 자신에 대한 모멸은 힘센 타자에 대한 강렬한 동경으로 변주된다. 이러한 모습은 이인직 이후 이광수에게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강한 나라, 강한 민족을 꿈꾸었으나 절망한다. 그 절망은 타자에 대한 의탁을 합리화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들은 중요한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 그 하나는 강한 국가를 계속 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윤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인직이 동경한 그 타자는 힘만 셀 뿐 윤리적 기반 위에 서 있지 못한 타자였다. 윤리적 행위 양식은 관계의 거래비용을 감소시킨다. 누군가가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으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너를 위한 거야"라고 말해본들, 행동의 진정성은 이해받지 못한다. 진정성을 이해받지 못하기에 작은 어긋남은 거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인공적으로 설계한 만주국이 당시로써는 상당한 수준의 행정력과 복지를 갖춘 국가였지만 만주국과 일본에 대항하는 저항은 거대하고 꾸준했다. 윤리적 일관성을 갖추지 못한 존재의 값싼 인심은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일본을 동경했던 조선의 지식층이 기대했던 바와 다르게 일본은 지극히 비윤리적이었다.
<혈의 누>에서 일본의 비윤리성은 완벽히 은폐되어 있다. 일본군의 '엄한 군율'이란 속설도 물자 부족에 시달린 청군에 대비해서만 그럴듯할 따름이다. 소설에는 청의 잘못만을 일방적으로 부각하지만, 이홍장은 집을 불태우거나 강간을 자행한 병사에 대해 사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의 군령이 엄했던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지만 역사학자 조재곤의 논문 '청일전쟁의 새로운 이해'는 이렇게 적고 있다.
"관내 각 군현의 인사권간여와 현지징발, 배상금의 미지급, 일종의 군용수표인 대용증권발행 등이 큰 문제였다. 그것도 예산문제로 시가의 1/3만 지급하면서 민심은 이들로부터도 벗어나게 되었다."
소설에 나타난 정의로운 일본은 근대화를 염원하던 이인직의 상상일 뿐이다. 일본의 비윤리성은 전쟁에 대한 전국민적 열광에서도 드러난다. 평양성전투의 승리 이후 일본은 극단적인 애국주의(징고이즘)로 빠져들었다. 일반인들의 광적 애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열광은 언제나 보편적이다. 이라크전쟁이 개시되자, 부시의 지지율은 한때 90%에 육박했다. 문제는 이런 흥분상태의 대중과 다르게 행동하는 깨어있는 지식인과 지식대중이 존재하는가이다.
일본근현대사 전문가이자 도쿄대 교수인 가토 요코의 책 <근대 일본의 전쟁논리>(박영준 옮김, 태학사 펴냄)는 이런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가토 요코는 '안에서는 데모크라시 밖에서는 제국주의'라는 일본만의 독특한 흐름이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일본 정부의 바깥에 존재하던 일군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근대적 가치관을 주장하던 자유민권주의자의 대부분은 전쟁을 앞장서서 지지하게 된다. 인류의 윤리적 보편성에 호소하는 반전운동의 부재는 이후로도 이어져 2차대전까지 이어졌다. 근대 일본의 정신적 국부라 할 수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조차 전쟁을 지지했다. 이들은 청일전쟁을 '문명 대 야만'으로 인식했다. 그는 일본을 '문명' 청과 조선을 '미개' 인식했다. 그는 문명이란 군사력만이 아니라 윤리의 관점에서도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청일전쟁에서 가장 윤리적인 행동을 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빨리 망하기를 기원한, 바로 그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일본군이 뒤에 처지거나 부상당한 청군들을 무참히 참살한 것에 비해 조선인은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풍도해전에서 익사 직전의 청군 수십 명을 구조한다. 일본군에 의해 왕궁이 점령된 상태에서도 조선 정부는 성환전투에서 전사한 청군과 일본군의 장례를 지역 군수들에게 당부한다. 동학농민군은 논산에 들어온 패잔 청군을 수용하여 장성까지 보호 동행해 주었다. 동학군은 자신을 진압하러 온 적에게조차 인도주의로 대했다. 일본군의 잔병이 원주에 도착하자 관리가 앞장서 부상 병사를 보호하자, 일본 병졸들이 모두 감읍했다고 전한다. 민중 상호 간 연민에 기초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 동학과 동학에 경도되어 있던 조선 백성은 남달랐다.
"그 정도야, 뭐"라고 침소봉대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문명국 일본군의 행동은 완전히 달랐다. 일본군은 풍도해전에서 바다에 빠진 영국 병사만 선별적으로 구조한다. 반면, 물에 빠진 청군을 향해 총격을 가한다. 일본군은 패잔청군에 대해서도 수색 살해했다. 평양전투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청군을 수색 살해했는데 그 수는 무려 1500명에 달했다. 살해 방법은 주로 칼로 목을 베는 참살이었다. 일본의 잔혹한 비윤리성은 결국 뤼순대학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인직은 조선의 '미개한' 문명에 절망했다. 그는 일본을 동경했고, 조선을 일본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강한 상대로부터 당한 좌절은 크고 강함을 선망하게 만든다. 그의 염원은 소설 <혈의 누> 곳곳에 스며있다. 옥련의 정혼자 구완서의 바람을 소설은 이렇게 적고 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 같은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비스마르크-필자주)같은 마음이요."
동아시아 국제시스템에서는 크고 강한 나라가 조공무역 체제를 통해 이웃의 작고 약한 나라와 상호소통하고 상호 원조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강한 나라가 제국주의를 전면화해 약소국을 침탈한다는 것은 당시의 지식인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식인들은 조선이 약해서 당한다고 생각했기에 강함을 무한히 동경했다. 그런데 만약 그 강함 속에 윤리가 부재하다면? 이인직이 제대로 보지 못한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이인직이 보지 못했던 것은 국가공동체의 윤리성이었다. 힘만 넘치고 윤리적 토대가 부재할 때 국가는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범용한 민족주의는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제국주의가 된다. 국가의 윤리적 토대를 보편적 인권의 기반 위에 설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의 열정이 국경을 넘어서자 이웃 나라들은 반발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아버지 요시다 쇼인은 평소 열강과의 교역에서 상실한 손해를 조선이나 만주에서 보상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대 삼한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조선 복속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한 국가의 정신적 지주의 말에서 그 어떤 윤리적 보편성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일본이 자랑한 근대화가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조선 문명은 미숙해서가 아니라, 너무 조숙해서 오히려 발전이 더딘 특이한 경우다. 이 점에 대해서 사회학자 김상준의 책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 펴냄)의 글을 인용해본다.
"조너선 이스라엘의 '급진계몽주의' 3부작이 명쾌하게 밝힌 것처럼 스피노자는 급진계몽주의의 원조이자, 태두요, 열쇠였다. '일관된 민주주의'는 급진 계몽사상의 주요 구성부분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스피노자의 급진적 사상형성에 중국, 조선이라고 하는 극동의 '선진적 타자'의 발견이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극동의 선진적 타자의 핵심은 윤리성에 있다. 개인적 윤리가 아닌 공동체 전체의 윤리적 고양이 선진적 타자의 핵심이었다. 조선조 수백 년 동안 소빙하기까지 닥쳐왔음에도 대규모 아사(餓死)가 없었던 것은 윤리공동체의 상호부조적 대응 덕분이었다.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이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폭력의 순화가 문명의 수준을 결정한다.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지도자 페르디난트 라살은 한 여자를 두고 벌인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던 때였다. 러시아 문호 푸시킨 역시 결투로 사망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중요하다. 강한 나라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목표가 되고 강한 나라만이 목표가 될 때 누구도 잘 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국가공동체의 '윤리적 고양'이 국가의 목표에서 배제될 때 국가의 토대는 약화된다. 토대가 흔들리면 국가의 정당성은 무시로 의심받게 된다. 이인직이 정작 보지 못한 것은 당시 퇴색되어버렸다고는 해도 국가를 보편 윤리의 기반 위에 두고자 했던 바로 '조선'이었다.
패권교체기 변방의 지식인은 분열증을 앓게 된다. 분열증은 상대를 과도하게 강하게 우리를 과도하게 약하게 느끼게 만든다. 지식인은 결국 정서적 도피를 택하고 이것을 합리화한다. 조선은 '헬조선'이기에 빨리 망해야 한다. 망할 조선이기에 강한 자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인직 류 지식인들의 이런 모습과 대조적으로 강한 상대에게 맞선 수많은 민초들이 있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는 조선이 '헬조선'임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선'을 구하고자 나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좋은 나라를 사랑하기보다는 부족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부족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한반도 역사에서 늘 민초들의 몫이었다.
한 신문은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지난해 낸 두 권의 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청계 펴냄),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청계 펴냄)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1894년 6월 갑오왜란 때 침입했다가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한 백성들의 무장봉기와 고종의 아관망명으로 일시 퇴각했던 일본군은 1904년(갑진년) 2월 다시 침입해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다. 일제의 전면 침공에 국군과 민군(의병)이 힘을 합쳐 전국 각지에서 6년간 처절한 '국민전쟁'을 벌이며 저항했다. 그때 패배했다고 대한제국 국군을 오합지졸로 깔보아선 안 된다. 1901년 이미 한국군은 일제 외에 아시아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3만 대군의 '신식 군대'였고, 을사늑약(1905년) 이후 3만 국군과 민군이 합쳐 조직된 국민군은 14만1815명에 달했다. 청군과 러시아군을 이긴 일본군에 맞서 싸움을 싸움답게 해본 군대는 훗날 미군을 제외하고 대한제국의 국민군밖에 없었는데 이런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2017년 8월 5일 자 <중앙일보> '[책 속으로] 구한말 일제와 6년 전쟁, 왜 역사에서 사라졌나' 중)
이인직은 <혈의 누>를 통해 '헬조선'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정작 보여준 것은 자신의 분열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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