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적대 관계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눈에 띄게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의혹이나 불만이 제기되지만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1948년부터 70년 동안 굳어진 적대 관계가 하루아침에 끝나고, 1993년부터 25년 동안 꼬인 '북핵 문제'가 순조롭게 풀릴 수 있겠는가.
북미 관계가 정상화하면 북일 관계도 정상화할 것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의 사례에서 보듯, 미국과의 수교 이전에 일본과의 수교가 먼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북일 수교가 이루어지면 적어도 수백억 달러의 일본 돈이 북한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에 앞서 북한과 일본은 냉전 종식 직후인 1990년부터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몇 년 동안 진행했지만, '북핵 문제'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자 문제 등으로 끝을 보지 못했다.
머지않아 이루어질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내다보며 1965년 이루어졌던 남한과 일본의 수교 과정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연재가 그랬듯, 한일 수교에도 미국이 왜 개입하고 어떻게 압력을 행사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한반도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일본의 강제점령 또는 식민통치를 당하고 20년이 흐른 1965년 남한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국민의 반일감정이 가시지 않은 터에 서둘러 하느라 '졸속 협상'이란 비판이 나왔다.
일본이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차관을 포함해 모두 8억 달러를 건넸으니 '굴욕 외교'라는 비난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강요와 다름없는 압력 때문에 "양키 입 닥쳐"라는 시위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이같은 졸속적이고 굴욕적 협상 과정에서 '독도 폭파' 얘기가 나왔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의 협상대표가 한 망언이 아니라, 한국의 협상대표가 제안한 것이었다. 독도 영유권 문제가 협상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김종필은 1961년 박정희와 5.16쿠데타를 일으킨 뒤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그 부장이 되어 1년 반이 지난 1962년 10월 일본에 건너가 한일협정의 기초를 마련했던 이른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에 합의하면서 독도를 폭파해 없애버리자고 제안했다. 오히라는 당시 일본 외상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4년부터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른바 '6.3 사태'다.
요즘 횡령과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받고 있는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나도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는데, 그가 데모를 해봤다고 내세우던 게 바로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였다.
2. 한일협정에 관한 정부문서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연구
미국 국무부는 1980년대부터 1960년대 외교문서를 비밀 해제해 공개하기 시작했다. 한일회담이 시작됐던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2~1960)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1994년 출판됐다. 케네디 행정부 (1961~1963)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1996년에, 존슨 행정부 (1964~1968)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2000년에 출판됐다.
이 가운데 2000년 출판된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Part 1, Korea'에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 (U.S. Efforts To Encourage Nor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이라는 별도의 항목 아래 약 40건의 문서가 실려 있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왜 그리고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한.일 두 나라는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외교통상부는 1995년부터 1950~60년대의 외교문서들을 공개하기 시작해 2005년까지 약 160권에 이르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들을 모두 공개했다. 2005년 1월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하자 일본 정부가 반발했다. 한국의 친일 보수신문들도 거들었다. 일본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우려한 것이다.
남한이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자 북한은 4일 후 2005년 1월 21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당시 남조선 당국은 일제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북한은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100만여 명의 학살만행, 840만여 명의 강제련행, 20만여 명의 일본군 '위안부' 등 중대 인권피해 문제"에 대해 "별도의 사죄와 함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조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강조해오던 터였다.
한일협정에 관한 연구는 박정희가 1979년 죽은 뒤부터 발표될 수 있었다. 1980년대엔 이재오의 <한일관계사의 인식 : 한일회담과 그 반대운동>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1964~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앞장서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1984년엔 "분단 40년, 그 고난의 벽을 깨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사>를 펴내기도 했다. 2018년 7월, 친구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 전도사 노릇을 한 게 명예스럽다고 말한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이기도 하다.
1995년엔 민족문제연구소가 한일협정 30주년을 맞아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는 책을 펴냈다.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의 글을 포함해 10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이종원 일본 동북대학 교수가 "기밀 해제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미국정부의 외교문서" 등을 활용하여 쓴 '한일회담의 국제정치적 배경'이란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실 한일회담은 한국과 일본의 2국간 교섭이라기보다는 미국을 포함한 3국간 교섭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 미국은 자신의 동아시아 정책의 필요에 따라 한일관계의 재구축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한일 양국정부도 교섭의 상대방보다는 미국의 정책과 의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치 경제적인 힘의 원천인 미국이라는 세력을 서로 자신에 유리한 방향으로 동원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도성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1995년 "서울의 외무부 본부는 물론 동경의 주일대사관까지 수도 없이 드나든 끝에" 정부 서고의 관련 자료들을 입수하여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 5.16에서 조인까지>라는 자료집을 펴냈다. 이 가운데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내용의 자료들이 몇 가지 제시되어 있다.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은 2016년 펴낸 <협상의 전략>에서 한일협정도 다루고 있다. '쉽게 타협하면 역사가 복수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일본에 유리한 청구권 협상과 미국의 압력," "미해결 과제로 남은 독도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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