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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나라를 살린다

[최창렬 칼럼] 노무현·문재인이 진보? 노회찬이 진보다

서구에서 보수와 진보는 국가의 시장 개입 정도를 가지고 나눈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는 분단과 안보 논리로 심히 왜곡됐다. 쿠데타 정권은 성장주의와 안보 논리를 명분으로 독재를 합리화했고, 근대화 이데올로기는 군부와 재벌과 관료의 동맹을 바탕으로 성장지상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면서 민주주의를 원천적으로 배제했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요구를 반(反)정부 운동의 프레임을 씌우고, 친북 용공으로 조작하기 일쑤였다.

진보정치는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성장했다. 민주주의의 배제와 억압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진 권위주의 정치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그들은 성장의 희생양에 불과했다. 군사정권은 진보를 국가를 전복하는 반자유주의 이념의 굴레를 씌웠다. 그러나 진보는 물리적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세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987년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기원을 맞았으나, 정부 수립 이후 체질화된 사회 전반의 보수 이데올로기는 진보의 정치세력화를 허용치 않았다. 진보세력은 민주주의 성립의 최소 조건인 주기적 선거가 확립된 이후인 2004년에 와서야 비로소 정치세력으로서 원내에 진출했다. 지역구 2석에, 비례대표 8석으로 10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처음 도입된 1인 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힘입은 결과였다. 당시 비례대표 8번이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었다. 민주노동당은 13%의 정당득표를 했으나, 10석에 그쳤다. 표심이 비례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선거제도의 결함 때문이다.

노회찬의 죽음 이후 정의당의 지지율이 창당 이래 최고를 기록했지만, 진보정치가 갈 길은 험난하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등 거대정당은 진보정당의 약진을 바라지 않는다. 민주당의 상대적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 역시 보수정당의 범주를 벗지 못한다.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의 구분에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을 진보정권으로 지칭하지만, 사회적 소수의 이익을 대표하고 시민사회에서의 균열을 반영해 낼 수 있는 진보정당의 본령과 친화적이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이른바 '제이노믹스'의 양대 축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다. 두 정책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전자가 분배에 중점을 뒀다면, 후자는 성장에 무게를 두고 있다. 성장과 분배가 상호보완적인 선순환을 할 수 있을 때 사회 갈등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교과서적 얘기일 뿐이다.

경기지표와 고용지수의 악화 등 경제난은 보수적 경제정책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을 떨어뜨리고 노동생산성을 하락시킨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자영업자와 젊은 계층의 지지도 하락했다. 최저임금 인상이 자영업자를 한계 국면으로 몰고 간다는 주류 경제이론의 분석이 원인이다. 그러나 이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사회구조적인 원인 분석은 아예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평균 연봉 1억 원이 넘는 은행의 카드 수수료와 자영업자를 옥죄는 높은 임대료 등은 자영업자와 젊은 피고용인들의 갈등의 원인에서 아예 배제되어 있다. 사회적 '을'만이 경제난(經濟難)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진정한 진보정당이 필요한 이유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보수정권에서 자행되었던 헌법 유린과 군의 정치개입 및 사법부의 재판거래 등 반민주적인 헌법 유린 행위들에 대한 정치적 사법적 단죄 이외에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는 시동도 걸기 전에 좌초할 위기에 있다. 여소야대 국회의 한계라는 정치 공학 외에, 사회적 격차 완화에 필요한 입법을 압박할 시민의 조직화의 동력도 바닥을 드러냈다. 집권당이 보수야당을 제외한 야당들과 연대와 협치를 통해 사회구조의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의지도 능력도 발견할 수 없다. 진보정치는 과거와는 비교와 안 될 정도로 대중성을 확보했으나 현실 정치에서 그릇된 관행을 깰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제도를 바꿔야 한다. 우선 공직선거법의 개정이 절실하다. 소선거구와 단순다수제의 지역구 의원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선거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은 원천적인 한계에 봉착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의 도입은 물론 비례대표 의석을 획기적으로 늘림으로써 유권자의 지지가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독일의 경우처럼 전체 의석의 반을 비례대표로 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3분의 1 수준으로 확대해야 한다. 집권당과 제1야당의 결단만 남았다.


한국당도 지난 서울시의회 의원 선거에서 25%의 정당득표를 했지만, 110석 중 불과 6석 밖에 얻지 못했다. 정의당은 10% 정당 득표에 불과 1석이었다. 이를 후년 치러질 21대 총선에 대입하면, 정의당은 겨우 4석을 얻는다. 그러나 중앙선관위가 제안한 연동형 비례대표 제도에서는 31석을 차지할 수 있다. 교섭단체를 훌쩍 넘음으로써 사회적 소수와 약자의 의견을 반영해내고, 갈등을 정당 체제 내에 수렴함으로써 정당 체계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

정치자금법의 개정도 절실하다. 예비후보자는 선거 전 120일 전에 등록하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후원회를 통한 정치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압도적으로 기득권 정치인과 거대정당에 유리한 정치자금법도 고칠 때가 됐다. 현행법은 2004년에 개정된 것이다. 진보가치의 추구 없이 한국 사회는 한 발도 나갈 수 없다. 벌써 촛불 에너지도 일상의 정치 패러다임과 정치 문법 속에 묻혔다. 선거 논리와 정치 공학만 난무하는 현재의 정치판을 바꾸려면, 제도의 개선을 통한 진보 가치의 실현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대정당의 정당 이기주의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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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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