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노회찬 의원이 별세한 지 나흘째인 26일, 고인을 기리는 낮은 자들의 슬픔이 추도식이 열린 연세대 대강당을 무겁게 채웠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주인 잃은 카카오톡 프로필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문구가 묘비명처럼 무대에 내걸렸다.
늘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래서 더 아련하게 다가오는 노 의원의 생전 육성 연설이 1700석 대강당을 가득 메운 평범한 시민들 가슴에 꽂혔다.
지난 2012년 고인의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 장면이 담긴 영상에는 "한 달에 85만원 받는 '투명인간',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을 호명하는 걸출한 진보정치가의 신념이 생생했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서울시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서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는 새벽 4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그 버스와 4시 5분 경에 출발하는 그 두 번째 버스는 출발한 지 15분만에 신도림과 구로 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 되고 버스 사이 그 복도 길까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바닥에 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이 탑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강남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이 버스에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을 해야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일 이 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 분이 어쩌다가 결근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 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흘러서, 아침 출근시간이 되고, 낮에도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고, 퇴근길에도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누구도 새벽 4시와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서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에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지금 현대자동차, 그 고압선 철탑 위에 올라가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물 세 명씩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용산에서, 지금은 몇 년째 허허벌판으로 방치되고 있는 저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그 다섯 분도 역시 마찬가지 투명인간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었습니까?
강물은 아래로 흘러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 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 여러분.
진보정당의 공동 대표로, 이 부족한 사람을 선출해주신 것에 대해서 무거운 마음으로 수락하고자 합니다. 저는 진보정의당이 존재하는 그 시각까지, 그리고 제가 대표를 맡고 있는 동안, 저의 모든 것을 바쳐서 심상정 후보를 앞장세워 진보적 정권 교체에 성공하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모든 투명인간들의 당으로 이 진보정의당을 거듭 세우는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넣겠습니다."
30년 전 용접공과 구로동 미싱사로 만나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의 길을 고인과 함께 걸어온 심상정 의원은 단상에 올라서도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로 추도사를 이어가던 심 의원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번뇌의 나날로 날밤을 새웠을 대표님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하자, 어두운 객석에서 누군가는 흐느꼈고 누군가는 "미안해요"라고 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을 손수건에 적신 심 의원은 "우리 대표님이 '나는 멈추지만 당은 앞으로 나아가라' 말씀하셨지만 저는 노회찬 없는 정치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노회찬의 꿈이 제 꿈이고 우리 정의당의 꿈이고,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라고 믿는다"며 "우리 대표님이 이루고자 했던 꿈을 여러분과 제가 꼭 이루겠다"고 했다.
이정미 의원도 "저는 노회찬의 꿈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많은 분들이 노회찬 없는 정의당을 어떻게 할 것인지, 누가 노회찬을 대신할 것인지 묻지만, 분명히 말씀드린다. 그 누구도 노회찬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어떤 이도 노회찬을 대신할 수 없으므로 정의당 모두가 노회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의원은 "노회찬이 그랬던 것처럼 거대 재벌 권력에 맞서는 기백을 잃지 말고, 일하는 사람들과 약자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투혼이 돼야 한다"며 "노회찬이 헌신했던 약자와 일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정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이젠 정치제도 개혁에 함께 해달라. 그럴 때 노회찬은 분명히 우리 정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달변인 유시민 작가도 이날만은 미리 써온 편지조차 간신히 읽어 내릴 정도로 슬픔에 북받친 모습이었다.
"우리에게 다음 생이란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생이 또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만나는 세상이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곳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되면 좋겠습니다."
노 의원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챙겼던 KTX 해고 승무원 김승하 씨도 "KTX 승무원의 해고 투쟁 4526일, 그 시작과 끝에 함께 해주신, 저희들에겐 항상 따뜻한 삼촌 같으셨던 분"이라며 고인을 기렸다.
까까머리 학창시절부터 고인과 인연을 맺은 부산중학교 친구 김봉룡 씨, 경기고등학교 친구 장석 씨, 고인이 노동운동을 일군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동지 임영탁 씨, 지역구인 경남 창원 주민 배정란 씨도 고인을 향한 애도를 저마다 시(詩)로, 추억으로, 회한으로 표했다.
노 의원과 함께 14년 전 진보정치의 새 역사를 열었던 권영길, 천영세, 단병호, 김혜경, 조승수 전 민주노동당 의원, 노회찬의 비극을 딛고 진보정치의 미래를 열어갈 차세대 주역들도 추도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산자여 따르라"를 외쳤다.
장례 마지막 날인 27일, 국회 영결식이 엄수되면 노회찬(1956년 8월 31일~2018년 7월 23일) 의원은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된다. 노동자 전태일이 영면한 곳, 노회찬의 분신과 같던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 오재영 보좌관이 지난해 3월 먼저 자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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