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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압승', 구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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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압승', 구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분석] 위기의 야권, 여전히 혈로는 'PK'다

2012년 4월 12일 현재 차기 대선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박 비대위원장은 2004년 17대 총선, 2012년 18대 총선에서 두 번이나 새누리(한나라)당을 궤멸적 위기에서 구해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현대 정치 25년 동안, 정치 9단이라 불린 YS도 DJ도 이런 괴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이같은 이유로 야당 지지층 사이에선 "12월 대선도 해보냐 마나 아니냐. 그냥 박근혜가 빨리 5년을 하고 나가는 게 낫겠다"는 식의 공포감이, 여당 지지층 사이에선 "선거의 여왕이 '좌빨'들을 맥도 못추게 만들었다. 게임은 끝났다"는 안도감이 번지고 있다.

하지만 11일 총선 결과를 뜯어보면 박 위원장의 아킬레스건이 드러난다, 거꾸로 말해 야권에도 '혈로'가 보인다는 말이다. 관건은 PK(부산 경남)이다.

뒤집히기 직전까지 갔던 부울경…야권, 10년 전 盧보다 10%p 높은 득표

▲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손수조 부산 사상 후보.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총력을 쏟아붓다시피해 부산과 울산 경남에서 야권에게 3석만 넘겨주고 방어막을 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PK지역은 사실상 뒤집혀지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투표율이 2~3%포인트만 높았어도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른다. 5%포인트 내의 표차로 패배한 야당 후보들이 부산과 경남 울산에서 아홉 명이나 나왔다. 경합 선거구에서 3%포인트만 이쪽 저쪽으로 움직였으면 새누리당이 대패할 뻔 했다.

마지막 '깔딱고개'를 넘느냐 마냐에서 여야의 역량 차이가 드러난 것이지만, 총선에선 한표라도 지면 지는 것이지만 대선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경남에서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둔 것으로 생각하지만, 기억과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29.85%, 울산에서 35.27%, 경남에서 27.08%를 얻었다. 이 밑천으로 수도권의 승리와 호남의 전폭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꺽은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함께 부산에서 얻은 비례대표 득표율은 40.2%에 달한다. 울산은 41.52%, 경남은 36.14%다. 10년 전에 비해 10%p나 올라간 수치로, 어떤 후보를 내느냐에 따라 새누리당과 대선에서 맞장 승부가 가능할만한 수준이다.

수도권을 보면 야권연대 득표율이 서울에서 48.72%, 경기에서 48.75%, 인천에서 47.39%다. 결국 전국 전체로 따지면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합이 46.75%가 나오고 새누리당과 자유선진당의 합이 46.03%가 나온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일대일 구도에서 야권이 범여권을 근소하게 리드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번 총선에서 여러 잡음이 나왔지만 야권연대의 유지는 필수적이다.

물론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에 이 수치가 대선 때까지 그대로 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야권이 최악의 결과물을 얻은 상황에서도 전체판세는 팽팽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昌vs反昌'구도처럼 '朴vs反朴'구도가 형성된다면?

이번 총선을 보면,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정치인의 역량을 측정할 때 사용되는 정성적 변수인 충성도와 확산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확산성을 볼 때 "박근혜 표는 최대한 다 나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번 총선 구도가 'MB심판론' 대 '미래론'으로 형성되면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이끄는 새누리당이 미꾸라지처럼 심판론을 피해간 측면이 있다.

하지만 8개월 후 18대 대선이 '박근혜 vs 反박근혜' 구도가 되면 결과는 모를 일이다. 일각의 무조건적 박근혜 지지는 조건반사적 박근혜 비토론을 배태하기 마련이다.

지난 2002년 16대 대선의 경우 현재의 박근혜 대세론 수준의 이회창 대세론 속에서 전개됐다. 하지만 여권은 구도를 이회창v反이회창으로 끌고 갔다.

민주당의 국민경선도,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표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극적 단일화도, 철저하게 '이회창을 이길 사람'을 뽑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야당 후보인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심판 선거로 구도가 짜인 것이다.

그러면서 '차별과 특권 없는 세상'이라는 노무현 후보의 슬로건은 타고 난 엘리트인 이회창 후보와 극명한 대조 관계를 형성해 유권자들에게 시대정신으로 승인 받았다. 이 과정에서 한 치라도 삐끗했으면 이회창 후보가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됐을 것이다.

10년 전의 스토리에서 누가 더 많은 교훈을 얻느냐에 따라 8개월 후 대선의 승패도 갈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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