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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갑산 자락! 장곡사, 우산성, 모덕사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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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칠갑산 자락! 장곡사, 우산성, 모덕사 찾아간다

2018년 8월 고을학교는 <청양고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8월, 제58강은 충청남도 청양고을을 찾아가 칠갑산 자락에 기댄 특이한 사찰구조로 들어앉은 장곡사와 그곳에 전해지는 많은 보물들을 감상하고, 우산성과 모덕사를 둘러보며 최익현의 충정과 채제공의 영정도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칠갑산 자락의 유서 깊은 고찰 장곡사Ⓒ청양군

고을학교 제58강은 2018년 8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8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청양IC-장평면(윤남석가옥/도림사지삼층석탑/장곡사)-화성면(평택임씨재실/임동일가옥/임찬주가옥/임석주가옥/상의사)-청양읍(영모재/장승리고분군/점심식사 겸 뒤풀이/청양향교/청양삼층석탑/석조여래삼존입상/우산성)-정산면(정산향교)-목면(두릉산성/모덕사)-청양IC-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청양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8강 답사지인 <청양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칠갑산 자락 협곡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지천구곡

청양의 산줄기는 남동부에 계봉산, 앵봉산 등 칠갑산의 지맥들이 연이어 있고 북서부에는 법산, 문박산, 백월산 등이 솟아 있습니다. 물줄기는 지천천이 군의 중남부를, 잉화천이 군의 동부를 지나며 남류하여 금강으로 흘러들고 무한천이 군의 서부 경계를 이루며 북류하고, 신양천이 북부 중앙을 북류해 예당저수지로 흘러들고 있습니다. 특히 지천은 협곡과 아름다운 산수를 이루는데 흐르는 물굽이가 기묘하고 기암괴석이 아름다워 지천구곡이라 부릅니다.

▲협곡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지천구곡Ⓒ청양군

청양군과 정산군이 합쳐져 청양군으로

청양은 충남의 중앙에 위치하여 동쪽은 공주시, 서쪽은 보령시, 남쪽은 부여군, 북쪽은 예산군과 인접하고 있으며, 1읍 9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청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한시대 마한에 속했으며 지천유역의 고리도평에 구로국이 무한천유역의 용천들에는 사로국이 있었습니다. 백제시대는 열기현, 고량부리현, 사시량현의 3개현이 있었고 신라시대는 웅진도독부에 속해 열기현이 열성현으로, 고량부리현이 청정현으로, 사시량현이 신량현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청정현이 청양현으로, 열성현은 정산현으로, 신량현은 려양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1413년(태종 13) 청양현, 정산현으로 나뉘었고 1895년(고종 32) 청양현과 정산현은 각각 군이 되었습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청양군과 정산군이 합쳐져 청양군이 되었습니다.

청양지역에는 삼국초기의 고분유적도 발굴되었습니다.

장승리고분군은 2002년 충청문화재연구원이 실시한 청양우회도로 축조 및 포장공사를 위한 문화유적 발굴조사 때 발견된 유적으로, 주로 4세기의 백제시대 분묘와 사비백제시대(536~660년)부터 통일신라 중, 후기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조성된 석식분과 석곽분입니다. 발견된 유구는 총 63기로, 청동기시대의 석관묘 3기와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분묘 51기를 비롯하여 매납유구 1기, 구상유구 1기, 석축유구 1기 그리고 조선시대의 숯가마 2기, 기와가마 2기, 토광묘 3기 등입니다.

▲최익현의 충절을 기린 사당 모덕사Ⓒ청양군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이 이어져 온 백실마을

청양지역의 산성은 우산성, 두릉산성, 두률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산성(牛山城)은 우산의 상단부에서 중단부에 걸쳐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약 965m이고, 남벽과 동벽이 만나는 곳,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부분은 다른 곳보다 높은데 아마도 전투 시 장수가 올라서 지휘하던 장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동남쪽 모서리와 동북쪽 모서리는 성벽의 바깥으로 사각형 모양의 성벽을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雉城)을 시설하였고 3개소에 문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성 안에서는 몇 개의 건물터와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백제 토기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와조각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 쌓아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릉산성(豆陵山城)은 계봉산에 쌓은 누에고치식 산성으로 ‘두릉윤성(豆陵尹城)’ 또는 ‘계봉산성(鷄鳳山城)’으로도 불리며 산 정상에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입니다. 성의 둘레는 560m, 동서와 남북의 너비는 130∼40m, 높이가 4∼5m입니다. 남쪽 벽에는 문터가 있고 서남부에는 주위를 잘 살펴볼 수 있는 높은 대(臺)가 있으며, 동쪽 벽 가까이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이 상당수 발견되어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泗泌城) 북쪽의 방비에 중요한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릉산성이 있는 백실마을은 백제부흥운동, 임진왜란 때 의병운동, 일제 강점기의 끊임없는 저항운동으로 잃어버린 주권을 찾기 위해 자존심을 걸고 저항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마을입니다. 그야말로 백제 멸망 후에 백제의 혼을 살리기 위한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을 이어오는 마을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두률성(豆率城)은 백제 부흥군이 36일간 나, 당연합군에 항거한 성으로 길이가 충남에서는 제일 긴 4.5㎞에 달하며 상단의 넓이는 5~10m이며 성내 칠갑산 정상에서 백제시대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절터인 도림사지에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청양과 정산에 읍치구역

청양에는 청양과 정산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청양향교(靑陽鄕校)는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 이곳에 이미 향교와 문묘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조선 중기 이후의 것으로 1874년(고종 11)과 1904년 등 여러 차례 수리하였습니다. 전학후묘의 건물배치로 공자를 비롯한 27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 서재의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에 봉안된 공자상은 1628년(인조 6)에 참판 강선여가 진향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로부터 받아온 것으로 운곡면 광암리 자택에 모셨다가 1891년 청양향교 대성전에 안치하게 되었는데 국내에 찾아보기 어려운 진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산향교(定山鄕校)는 읍치구역의 서쪽 1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창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학후묘의 건물배치로 공자를 중심으로 27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을 비롯하여 7동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고택은 평택임씨 집성촌에 있는 재실, 임동일가옥, 임석주가옥, 임찬주가옥, 그리고 윤남석, 방기옥가옥이 남아 있습니다.

재실은 안채, 아래채, 문간채, 헛간채가 모여 ㅁ자형 배치를 보여주는 이 지방 1800년대 전후의 전형적인 형태로 건물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의장의 세부수법이 당시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안채와 문간채의 부엌상부에는 음식과 제기를 보관했던 다락공간이 만들어져 재실의 기능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임동일가옥은 19세기 말 송암 임용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간채가 끼워져 있어 전체적으로 ‘ㄷ’ 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채 좌측면에 있는 하인들이 거처하던 방 좌단에 ‘강다리’라고 부르는 독특한 부재를 걸쳐 결구하여 추녀를 받치도록 한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전통 목조건축 양식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임석주가옥은 1900년대 초 임석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그의 호를 따 송운고택이라고도 불리는데 안채 등 건물구조와 양식은 물론 담장 등 전통양식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임찬주가옥도 1900년대 초 임찬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그의 호를 따 삼전고택이라고도 불리는데 안채, 사랑채, 곳간채 등 건물구조, 양식은 물론 담장 등 전통양식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백제시대에 쌓은 산성인 우산성Ⓒ청양군

유서 깊은 윤남석 고택

윤남석가옥은 안채, 사랑채, 별채, 행랑채, 곳간 등으로 구성된 조선후기에서 1900년 초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특히 2층으로 건립한 별채는 한옥기법과 일본식 건축기법이 어우러진 호서지방의 부농가 주택으로서 시대적인 특징과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흔치 않은 형식의 가옥입니다. 1900년대 초 이 지역을 방문했던 많은 명사들이 머물렀다 간 명소일 뿐만 아니라, 은산별신제 행사 때 사용하는 꽃가마 등을 사랑채에서 제작했다는 유서 깊은 고택입니다.

방기옥가옥은 조선후기에 건축된 양반집으로 안채의 좌우에 앞채와 옆채가 서로 연결된 ‘ㄷ’자형의 평면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앞채에는 창고와 사랑방이 있고 그 사이에 부엌이 있으며, 사랑방은 안채보다 더 튀어나와 어긋나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문밖에는 오래된 목조고건물이 있는데, 이곳에서 노비들이 거주하면서 주인집을 외부에서 보호하였습니다.

충신과 현인을 기리는 사당들

충신과 현인을 기리는 사당으로 모덕사, 영모재, 표절사, 두촌사와 채제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상의사가 있습니다.

모덕사(慕德祠)는 면암 최익현의 영정을 모신 사우(祠宇)로 1914년에 건립되었습니다. 현판은 고종이 내린 글 가운데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慕卿宿德)라는 구절에서 ‘모(慕)’자와 ‘덕(德)’자를 취한 것입니다. 최익현은 본관은 경주이고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이항로의 제자로 1855년 문과 급제 후 벼슬이 현감에 올랐으나 대원군의 시책을 비판하여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일본의 죄상을 16개 항목으로 적어 항쟁하며 태인, 순창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군과 싸웠으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 74세로 순절하였습니다.

영모재(永慕齋)는 함평이씨 좌찬성 이관과 아들 이효원을 향사하는 사당으로 1668년에 이해가 건립하였고 1882년에 고쳐지었습니다. 이관은 함평이씨가 청양지역에 처음 들어온 시조이고, 이효원은 선조 말년 대·소북의 정권쟁탈이 치열할 때 소북의 입장으로, 대북이 집권하면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이곳에서 청빈한 생활로 산수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330여 년이 지났으나 건립 당시의 원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뒤쪽에는 이관과 이효원의 묘소가 있습니다.

표절사(表節祠)는 선조 때의 충신 양지를 향사하는 사당으로 1891년에 온양에 지었으나 허물어져 1959년에 후손들이 모곡리에 옮겨지어 위패를 모셨습니다. 양지는 본관이 남원이며 눌재 양성지의 후손으로 조상의 덕으로 벼슬에 올라 적성현감을 거쳐 삭녕군수가 되었으습니다. 임진왜란 때 삭녕에 와 있던 경기도 관찰사인 심대의 종사관으로서 일본군에 대항해 싸우다 순절하였습니다. 1796년(정조 20)에 이조판서로 중직되었고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두촌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임정식의 사당입니다. 임정식은 고향에서 모병하여 조헌의 막하에 들어가 향병 100여 명으로 청주에서 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고 금산 눈벌전투에서 순절하였습니다.

화려하고 정교한 채제공 영정

상의사(尙義祠)에 있는 채제공 영정(蔡濟恭 影幀)은 비단 바탕에 채색한 초상화로 관의 앞이마에서 위로 5개의 골이 진 금관을 머리에 쓰고 국가 중대한 의식 때에 신하가 입는 예복인 조복을 입고 앉아있는 좌상으로, 두 손에는 홀을 쥐고 있으며 얼굴은 약간 옆으로 돌렸는데, 초상화로서는 드물게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채제공은 자가 백규(伯規) 호가 번암(樊岩) 시호는 문숙(文肅)으로 1743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정조를 도와 실학정치를 꽃피웠습니다.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면서도 포용적인 사상 정책을 전개하였고, 문장과 시에 능하여 조정의 편찬 작업에 여러 차례 참여하였습니다.

채제공의 영정은 현재 4본이 알려져 있습니다. 나주 미천서원(眉川書院) 소장의 흑단령본(黑團領本)은 분실되어 지금은 사진만이 전하며 1791년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단령(團領)의 부좌상(趺坐像) 1본이 수원시에 소장되어 있고 흑단령본 1본이 부여(扶餘)의 도강영당(道江影堂)에 소장되어 있으며 금관조복본(金冠朝服本)이 상의사에 있는 영정입니다.

이 영정은 그 중 가장 화려하고 정교하며 화면 오른쪽에는 ‘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兼兵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 弘文館提學 世孫左賓客 奎章閣提學 知實錄事 樊巖 蔡濟恭 伯規甫 六十五歲眞(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세손좌빈객 규장각제학 지실록사 번암 채제공 백규보 육십오세진)’의 표제에 채제공의 65세 때 관직명이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1784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서 깊은 사찰 장곡사와 정혜사

청양의 사찰은 유서 깊은 장곡사와 정혜사가 있으며 일명사지(逸名寺址)에는 삼층탑과 삼존불이 남아 있습니다.

장곡사는 칠갑산 남쪽 기슭에 있는 가람으로 850년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하였으며 다른 사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하 대웅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약사여래기도 도량으로 유명합니다. 경내에는 미륵불괘불탱,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등 2점의 국보와 상대웅전, 하대웅전, 철조비로자나좌상 및 석조대좌, 금동약사여래좌상 등 4점의 보물과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미륵불괘불탱은 야외에서 법회를 거행할 때 본존불상 대신 법당 앞에 높이 거는 불화로 미륵불은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 년 뒤에 인간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입니다. 1673년(현종 14년) 승옥 스님의 지도 아래 철학(哲學) 등 5인의 스님이 삼베에 안료로 채색하였습니다.

상대웅전은 고려시대에 처음 건립되어 조선 말기에 고쳐지었는데 석가여래를 주존불로 모시는 것이 보통이나, 이곳에는 2기의 석조대좌 위에 철조약사여래좌상과 철조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는 상대웅전에 모셔져 있는데 석조대좌는 화강암으로 된 사각형 대좌이고 불상은 대좌에 비해 작은 편이나 단정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았고, 왼손에는 질병과 무지의 병까지 고쳐준다는 약사여래에서 볼 수 있는 약단지를 들고 있습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및 석조대좌도 상대웅전에 모셔져 있는데 비로자나불좌상이 높은 석등대석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는 곱슬머리이고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쳐있고, 수인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토제(土製) 불상이었으나, 1960년 8월에 겉의 진흙을 제거하여 철조 불상으로 변했는데 현재 몸 전체에 석회가 칠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신라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건립되었고 주존불로 금동약사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금동약사여래좌상은 하대웅전에 모셔져 있는데 약사불은 질병과 무지(無知)의 병가지 치료해 준다는 불상으로 약단지를 들고 있으며 머리는 곱슬머리의 형태가 뚜렷하고 앞에는 장엄구가 있습니다. 1959년 불상의 내부 조사에서 1346년(고려 충목왕 2)에 조성된 사실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나왔습니다.

설선당은 스님들이 거처하던 승방으로, 하대웅전과 거의 같은 때인 조선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본래 정면 4칸 측면 3칸의 ‘ㅡ’자형이었으나 건물의 남쪽과 서쪽으로 2부분을 증축하여 현재는 ‘ㄱ’자형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설선당 남쪽 1칸은 부엌으로 맞배집을 고쳐지은 부분이고, 여기에 동서로 서익사(西翼舍) 3칸을 잇대어 늘려 지었는데 서익사는 민간주택 구조를 취한 요사(寮舍)입니다.

정혜사(定慧寺)는 841년(신라 문성왕 3)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송월 선사가 다시 세운 이후 1907년(순종 원년)에 큰 화재로 절의 전부가 불에 타서, 이듬해 월파 스님이 다시 지었습니다. 오세창이 전서로 쓴 ‘정혜사(定慧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대웅전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목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칠성각 앞의 우물은 백제 성왕이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현재에도 ‘은산별신굿’을 할 때 이 우물물을 떠다가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도림사지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인데, 도림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조선 중기까지 법등이 꺼지지 않았으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어 현재는 초석과 축대 및 3층 석탑만이 남아 있고 주변에서 ‘道林寺’라는 명문이 양각된 평와(平瓦)가 간혹 발견되기도 합니다.

청양삼층석탑(靑陽三層石塔)은 청양읍 일명사지(逸名寺址)에 있던 것을 ‘석조여래삼존불입상’과 함께 군청 뒤뜰로 옮겼다가, 1961년에 현재의 용암사 경내로 다시 옮긴 것입니다. 조성 수법이 간략하고 소박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은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불상입니다. 본존불은 당당한 체구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머리카락은 소발(素髮)이며 바로 뜬 눈, 긴 코, 두툼한 입술 등의 묘사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얼굴 전체에는 고졸(古拙)한 미소가 번지고 있어 부드러운 느낌이 듭니다.

좌 협시보살은 원래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허리 부근까지 절단되었던 것을 붙여 놓았으며 광배는 거의 없어졌고 보관도 약간 떨어져 나갔습니다. 얼굴은 본존의 얼굴과 비슷하면서도 더욱 부드러운 느낌이 들며 양미간에는 큼직한 백호공이 있습니다.

우 협시보살은 이와 대칭적으로 허리를 오른쪽으로 약간 틀고 있으며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은 여원인의 형상을 취하였고 옷 주름 등의 세부 묘사는 왼쪽 협시상과 거의 동일하나 다만 얼굴이 더욱 둥글고 앳된 느낌이 듭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8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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