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의 슬로건은 '그대, 우리의 꿈이어라'이다. 그러나 지난 3월 12일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를 시작으로 네 개 이상의 학과에서 터져 나온 미투 고발 이후로 부산대는 학생들에게 깨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이하 예영과) L교수의 성추행 사태를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L교수의 성추행 및 음담패설에 대한 입장은 학부생 179명의 동의를 받아 학생 자치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의 공동성명문으로, 지난 3월 발표되었다. 예영과 재학생은 약 200여 명이다. 다음은 해당 성명문의 주요 항목이다.
'L교수 매뉴얼은 존재했습니다.'
'L교수의 행각은 명백히 위계에 의한 성추행입니다'
'L교수는 학생과 교수 간 부적절한 음담패설을 수업 중에 일삼았습니다.'
'비대위는 L교수에게 성추행 사실인정과 공개 사과를 요구합니다.'
'SNS를 통해 미투 폭로한 피해자에게 언론 측의 사적인 연락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대위는 1차 성명문 당시 해당 교수의 실명을 밝혔지만, 명예훼손 등 법적 문제에 직면하면서 그의 실명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학부생 모두는 L교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술을 마실 때는 L교수의 옆자리에 앉지 말라'는, 일명 'L교수 매뉴얼'은 여자 신입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진 사실이었고, 남학생들 역시 매뉴얼대로 술자리에서 L교수의 양옆을 지켰다. 수업 중 'VR이 발전해서 혼섹이 가능하게 됐다. 여러분도 구애 받지 않고 할 수 있으니 좋지 않냐'는 발언을 내뱉어도 그는 제지받지 않았다. 학과를 창설한 교수. 그것이 그의 폭력을 지우는 면죄부였다. '아름다움(美)'을 가르치던 그는, 본인이 말하는 미학의 개념에 스스로 대적하며 계속해서 성희롱과 추행을 일삼았다.
피해자가 다수임을 자각한 비대위는 진술서를 수집했다. 실명의 진술서는 익명으로 전환되어 대학본부에서 조직한 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에 넘어갔다. 수집된 진술서는 총 20건이었다. 피해자들의 학번, 나이, 사건이 일어난 연도, 성별은 모두 달랐지만, 그들 모두는 L교수에게 당했던 고통스러운 일을 힘들게 털어냈다. 이야기를 듣는 비대위원들의 마음도 같았다. 피해자들이 요구한 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했다. L교수의 파면과 진정성 있는 사과. 단 두 가지였다. 진술서는 20건이었지만, 사건은 20번만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여러 번의 피해를 겪기도 했으며, 진술서로 작성되지 못한 피해 제보도 여러 건이었다. L교수가 한문학과 교수이던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는 분께 전화가 오기도 했다. 그 역시 본인이 당시에 겪은 L교수의 성추행 및 성희롱 사건들을 토해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진술서를 쓰지는 못하지만 그때부터 지속되는 악행을 끝낼 수 있길 바란다는 전화였다.
행위자인 교수의 태도는 계속 바뀌었다. 사건 초기, 사건을 제기한 정황이 의심스럽다고 말한 L교수는 비대위의 연락은 받지 않았으나 같은 날 언론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사위 초반, 본인의 모든 행위를 인정하겠다며 '무조건적이고 원천적인 사과'를 하겠다고 밝혔으며 조사위는 처음에는 사건의 중대성을 인지하지 못해 잘못된 발언을 내뱉었다고 L교수의 입장을 전했다. 사과문을 쓰겠다고 말한 그는 계속해서 태도를 바꾸더니 4개월이 지난 지금의 입장은 '사과문을 미루고 싶다'는 것으로 굳어졌다. 더군다나 학교의 인권센터와 조사위는 '사과는 L교수의 자유이기 때문에 강요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사과를 간절히 원했지만, 사과를 받을 수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부산대 본부에서 조직한 조사위원회도 문제투성이였다. 증거가 없는 성추행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료를 요청했으며, 자료 제출 이후에도 재차 '확실한' 증거를 요구했다. 조사기관이 아닌 피해자가 증거를 찾고, 제시해야하는 이상한 구조였다. 성추행의 기본 전제가 피해자가 느낀 불쾌감임에도 불구하고 '중요 부위가 아니어서 안 된다'는 발언을 했고, '경찰조사를 하면 원만한 결론을 내기 힘들게 된다'고 이야기를 하며 경찰조사를 진행하려는 피해자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우회적 압박을 제기했다. 법률 안의 균형성을 언급하며, L교수 사건이 파면이나 해임으로 결론난다면 강간에 이르는 더 심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에게는 어떤 징계를 내려야하냐는 이야기를 하며 이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에 대한 우려로 해당 사안에 대해 더 낮은 수위의 징계를 내려야 한다는 기이한 결론을 도출해내기까지 했다.
조사위와 학교가 대비해야하는 경우의 수를 언급하며, 기사를 내는 경우 학교가 힘들어진다는 발언을 피해자에게 직접 내뱉었다. 1차와 2차 가해가 모두 학교에서 발생한 것이다. 피해자를 만나 가해자의 진심을 전하고 싶다며, 가해자의 반성하는 모습을 전하지 못해 무력감을 느낀다는 말을 비대위에 전하기도 했다. '의도성이 없었다'는 가해자의 진술을 조사기관의 가치판단과 동일시하며 조사기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발언들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더욱이, 사건 초반 좋은 마음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캠페인이 결과적으로는 피해자들에게 좋은 효과를 가지고온 선례가 거의 없다는 발언들을 통해 비대위의 활동을 제지하는 일도 이어졌다. 해당 2차 가해와 가해의 발언들에 대한 문단이 길어지는 이유는 6차에 걸친 조사위 동안 계속해서 해당 발언들이 이어졌고, 비대위원이 해당 발언의 문제점을 현장에서 짚었음에도 재고되지 않고, 수용되지 않았다.
조사위와 징계위를 거친 결과는 총장의 직인 하에서 결정된다. 6차례에 걸친 조사위에서도, 두 차례에 거쳐 진행된 간담회에서도 비대위는 꾸준히 파면을 이야기했다. 1000여 명의 사람들의 파면 동의 서명이 담긴 종이와 마음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대가 내린 결과는 해임이었다.
부산대는 학생들에게 '그대, 우리의 꿈이어라'라고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학교 측의 해임이라는 선택으로 L교수는 복직이 가능해졌고, 퇴직 급여를 모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복직이 가능하다는 점은 다시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가능성을 열어둔 것과 같다. L교수가 아닌, 또 다른 이니셜의 교수 역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부산대는 우리에게 끝나지 않는 악몽이 될 지도 모른다.
L교수는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며 '사과에 대해 고민을 할 시간'을 달라고 인권센터에 요청한 상태다.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사과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부산대가 학생들이 학교의 꿈이길 바래왔던 것처럼 비대위는 학교에게 우리가 믿고 지탱할 수 있는 꿈이 되어달라고 지난 4개월 간 외쳐왔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꿈 꾼 '파면'과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사과' 중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산대의 꿈은 일방적이며 폭력적이다.
징계 결과를 받기까지 비대위는 끊임없는 질문들에 부딪혔다. 내부적으로 비대위의 활동 방향을 스스로 묻는 질문부터, 외부에서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영웅행세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들에도 계속해서 부딪혀왔다. 비대위는 영웅이 아니고, 영웅이고 싶은 사람들도 아니다. 영웅은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인물이다. L교수의 추행 대상은 정해져있지 않았다. '스승'이라는 지위 하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다. 따라서 부산대의 학생들은 위험에 빠진 사람들이다. 비대위는 스스로가 영웅이라 믿어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위험에 빠져있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에 가깝다.
이러한 위험을 없애는 것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 긴 시간이 걸리고 그 길 또한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여태 바로잡지 못한 폭력의 화살이 우리 모두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그 화살에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우리 앞의 폭력에 다 같이 맞서면 조금씩 덜 다칠 수 있을 것이다. 비대위는 영웅이 아니지만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다. 부산대는 우리의 꿈으로 남지 못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꿈이 되어줄 수 있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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