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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충실한 '용병'이었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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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충실한 '용병'이었던 박정희

[베트남 전쟁] <3>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

4. 미국의 무리한 파병 요구와 남한의 지속적 파병

1964년 9월 남한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고, 1964년 10월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제는 미국이 먼저 공식적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했다.

1964년 12월 브라운 (Winthrop Brown) 주한미국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존슨 대통령의 뜻이라며 공병이나 건설부대 또는 수송이나 의료부대 등을 베트남에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박정희는 필요하다면 2개 전투사단을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미국은 아직 전투부대를 원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1000명을 요청했어도 한국은 2000명 규모의 건설지원단을 편성해 1965년 2~3월 베트남에 보냈다. '비둘기부대'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파월 장병들의 수당을 한국 정부를 통해 지급해달라고 요구했고, 미국은 수당을 미국 정부가 지급한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용병(傭兵)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남한의 제2차 파병이 이루어지던 1965년 3월부터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울러 남한의 전투부대 파병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병을 원하지만, 남한 정부가 한일협정 비준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데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국회에서의 논란이 정부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만 조금 파병했을 뿐 다른 나라들은 파병 요청에 응하지 않은 터에 남한에게만 추가 파병을 요청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특히 남한만 전투 병력을 보내면, 남한은 미국의 '괴뢰나 하인 (puppet or vassal)'으로, 그리고 남한군은 미국의 '용병 (mercenaries)'으로 사용된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나중에 1만 8000명 규모의 사단 병력까지 요청할 계획을 세워놓고, 1965년 4월 남한에 우선 4000명의 연대 규모 전투부대를 2개월 안에 파병해달라는 뜻을 전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존슨이 한국의 파병을 직접 그리고 거듭 요청했다. 박정희는 굴욕적 한일협상에서 빚어진 어려운 국내정치 상황을 극복하는 데 미국의 신임을 이용하기 위해 1964년 9월부터 미국 방문을 추진해왔다. 미국은 한일협정 체결 이전엔 워싱턴 방문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거부하다가, 한국이 서둘러 1965년 6월 도쿄에서 일본과의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자, 박정희의 방문을 수락한 터였다.

존슨은 1960년대 전반기 미국 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 또는 '가장 급선무'였던 한일협정이 성사된 터라 박정희에게 부담 없이 파병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예 1개 사단 규모의 전투 병력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거듭 요청했다. 이 제안은 1965년 8월 국회 동의를 얻어, 10월 1만 8000여 명의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파병으로 이어졌다. 제3차 파병이었다.

미국은 1965년 7월부터 북베트남에 대공세를 펼치면서 1965년 말까지 18만여 명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보냈다. 그래도 승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이 다급해진 터에 1965년 12월 박정희가 먼저 이후락 비서실장이나 김정렬 주미한국대사 등을 통해 미국에 한국의 추가 파병이 필요한지 물었다. 병력을 더 보낼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에 브라운 대사가 박정희를 만나 1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더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존슨 대통령은 브라운 대사에게 한국의 추가 파병을 확보하는 게 '극도로 중요한 사항'이라며 "적절한 대가를 주고 추가 파병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할 것"을 지시했다. 1966년 1~2월 한미 간의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에 얼마나 무리하게 요청했으면 브라운 대사가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항의하다시피 했겠는가.

"나는 지금 갑자기 한국 정부에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요구한다는 생각에 섬뜩해진다. 우리는 한국에 소수의 의료지원단을 요구해서 수백 명을 지원받았다. 훨씬 큰 비전투부대를 요청해서 2000명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전투사단을 요구해서 2만 명을 지원받았다. 당혹스러울 만큼 짧은 기간에 우리는 더 많은 전투 여단과 사단을 요청했는데, 약 3만 명을 지원받을 것 같다.

이제 한국인들이 이에 대한 결정을 굳힐 시간조차 갖기 전에, 우리는 그들에게 1만 명을 더 보내달라고 요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언제 끝날 것인가? (중략) 이렇게 되면 거의 6만 명의 한국군들이 남베트남에 머무르게 되는데, 한국을 빼고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참전국인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중략) 나는 이에 반대해주길 강력하게 권한다"

박정희 정부는 1966년 2월 1개 연대와 1개 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할 것을 공표하고 3월 국회 동의를 얻었다. 사단 병력인 '백마부대'는 1966년 8월까지, 5000명의 연대는 10월까지 보내기로 했다. 제4차 파병으로 약 4만 5000명의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진주하게 되었다.

1966년 10월 제4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인 11월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북베트남을 봉쇄하려면 60~70만 병력이 필요하다는 웨스트모어랜드 (William Westmoreland) 주 베트남 미군사령관의 말을 전하며, 한국의 추가 파병을 넌지시 요청했다. 박정희는 최근에 제대한 병력으로 1개 전투사단을 만드는 것은 즉시 쉽게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러스크 국무부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대사에 전문을 보내 늦어도 1967년 4월까지 한국군 1개 사단 추가 파병을 확보하는 게 '극도로 중요한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1967년 중반까지 미국 전체 인구의 0.25%가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한국이 그 정도로 기여하려면 약 7만 2500명을 파병해야 한다는 논리를 덧붙였다. 이에 브라운은 대략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박정희는 존슨에게 1967년 5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반대세력을 의식해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가 지금 추가 파병을 결정하면 분명히 선거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 제1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제2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제3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제4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이제 제5차 파병을 요청하려 한다.

한국인들은 이런 요청이 언제 어디서 끝날지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왜 이런 압력을 받지 않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사령관도 동의했는데, 선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다. 박정희도 아마 선거 후에 그런 요청을 받게 되길 기대할 것이다."

1966년 12월 한국은 미국에 제대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포함해 민간 의료지원단 및 건설지원단 등을 베트남에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한미 간에 연례 장관급 회담을 시작하거나 특히 국무부 장관이 대통령선거 전에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의 지도력을 공개적으로 치켜세워 주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나아가 한국에 대한 재정지원을 추가 파병과 연계하며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미국의 이런 집요한 요청과 압력에 박정희는 1967년 2월 3개 해병대대를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국회에서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병력 교대'로 가장하면서, 언론에는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놓고 100만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어서 베트남에 추가로 파병할 수 없다고 했다.

1967년 3월엔 존슨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베트남에서 한국군처럼 잘 싸우는 군대는 없다고 추켜세우며 추가 파병을 거듭 요청했다. 또한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1967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가 이기자, 그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6~7월 서울을 방문한 험프리 부통령은 박정희에게 추가 파병을 결정하면 과학기술 및 경제 지원을 후하게 하겠노라고 회유했다. 결국 1967년 7월 3000명의 해병대대가 베트남으로 떠남으로써 제5차 파병이 이루어졌다.

제5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인 1967년 8월 존슨은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아시아인들이 미국인들보다 베트남의 위험에 더 가까이 있는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동맹국들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이었다.

이에 박정희는 1967년 9월 포터 (William Porter) 주한미국대사를 만나 존슨의 추가 파병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비무장지대에서의 남북 충돌이나 북한의 침투활동 등 국내문제 때문에 추가 파병이 어렵지만 베트남에 1개 사단 정도 더 보낼 수 있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포터는 11월까지 한국의 국내정치 문제 때문에 박정희와 협상하면서 그에게 '어떠한 실질적 압력 (any real pressure)'을 행사하기 곤란하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또한 한국이 5만 명의 파월장병을 그들의 꿈을 이루는 '요술 방망이 (Alladin's Lamp)'로 간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파병 대가로 지나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이에 번디 (William Bundy) 국무부차관보는 '요술 방망이의 함정'을 피하라면서 미국이 여전히 '최대한의 추가 파병 (maximum additional ROK troop contribution)'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러스크 국무부장관은 존슨 대통령이 바란다면서 한국의 추가 파병을 '최대한 긴급하게 (with maximum urgency)' 추진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미국의 압력에 한국정부는 1967년 12월 '1개 소규모 사단 (one light division)'을 베트남에 보내겠다고 합의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파병 대가로 미국이 군사 및 경제지원을 하기로 한 1966년 3월의 합의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1966년 3월 제4차 파병 협상 과정에서 브라운 대사가 약속한 내용을 서면으로 정리한 이른바 '브라운 각서 (Brown Memorandum)'를 미국이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67년 12월 호주에서 두 대통령이 만나, 미국은 한국이 원하는 구축함을 비롯한 군 장비를 늦어도 1968년 1월까지 한국에 보내기로 하고, 한국은 미국이 원하는 베트남 추가 파병을 한 달 앞당겨 1968년 3월까지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원 30여 명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1.21 사태'와 원산항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장병 80여 명이 탄 정보함정 푸에블로호 (USS Pueblo)가 북한 초계정에 나포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베트남에서 이른바 '구정 (Tet) 공세'가 전개되었다.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음력설을 맞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인민해방군이 100곳 이상의 남베트남 도시를 기습하고 심지어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미국대사관까지 공격한 것이다.

존슨은 1968년 2월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과 한국이 "베트남에 강하게 남아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의 추가 파병을 넌지시 원했다. 박정희는 답장을 통해 북한의 공격행위에 대해 단호한 행동을 촉구했다.

미국 관리들은 박정희가 "나중에 삼수갑산에 갈지라도 (apres moi le deluge)" 북한을 보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거의 비이성적으로 사로잡혀 있다"고 판단하며, 남한의 공격에 의한 전쟁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만약 한국이 베트남의 병력을 줄이거나 철수하면 미국은 똑같이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겠다고 위협하며 한국의 1개 사단 추가 파병을 거듭 촉구했다.

그 무렵 서울을 방문한 밴스 (Cyrus Vance) 국방부차관은 박정희를 만나 한국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고려하기만' 해도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 존슨에게 박정희가 과음을 하고 부인과 측근들에게 재떨이를 던지는 등 나라 전체를 통제하며 일방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매우 강력한 위험'이 있다고 보고했다. 1968년 3월 정일권 국무총리는 미국이 한국에 재정 및 군사 지원을 해주면 2개 사단을 베트남에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1968년 4월 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암살되면서 미국 주요도시에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가 거세게 전개되었다. 1965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반전운동이 1968년 1월의 '구정 공세'와 4월의 킹 암살로 격렬해진 것이다.

이 무렵 존슨은 북베트남 폭격을 멈추고 휴전을 추진하는 한편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68년 4월 중순 박정희를 만나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존슨의 휴전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그의 대선 불출마 발표에 영향 받아 소극적으로 응했다. 추가 파병을 당장 하기는 어렵고 나중에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미국 중앙정보국 (CIA)은 박정희가 존슨을 만나기 전까지는 1개 사단을 기꺼이 추가 파병하려고 했지만, 존슨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권력과 영향력을 잃었다고 생각한 데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 확대를 꺼려하자, 추가 파병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파악했다.

1968년 6월엔 한국이 5,000명의 제대 병력을 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은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미국은 이미 5월부터 북베트남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을 시작한 터였다.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에서 닉슨 (Richard Nixon)이 이기고 1969년 1월 취임하여 7월 이른바 '닉슨 독트린 (Nixon Doctrine)'을 발표했다.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69년부터 베트남에서 미군들을 철수하기 시작하면서도 베트남의 한국군은 그대로 유지되길 원했다. 박정희 역시 미국이 원하면 한국군을 베트남에 계속 주둔시키겠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한국군들 수당이 한국에서의 봉급보다 10배 이상 많으니 한국이 철수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한국 정부는 1971년부터 국내 여론과 국제사회의 비난에 따라 한국군 철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미국은 1971년 주한미군 6만 3000명 가운데 2만 명을 철수한 데 이어 추가로 감축하겠다며 위협하기도 하고 한국군 현대화 사업을 지원하겠다고 달래기도 하며 한국군 철수를 반대했다.

이에 한국은 1973년 1월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진 뒤에야 병력을 불러들일 수 있었다. 미군 전투 병력이 거의 떠난 1972년 여름부터 1973년 3월까지 5만 명 안팎의 한국군 2개 전투사단이 베트남전장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한국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병력을 보내고 미국이 전쟁을 끝낸 뒤에 군대를 철수시켰으니 미국의 침략전쟁에 가장 충성스러운 앞잡이였고 성실한 실행자였다. 용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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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이재봉 교수는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1996년부터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년 현재 '남이랑북이랑' 공동대표,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함석헌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두 눈으로 보는 북한>, <이재봉의 법정증언>,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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