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신연희 구청장이 박원순 서울시장과 소송까지 불사하며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던지라, 신임 구청장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가 더 크기도 하다. 정 구청장은 취임 이틀 만에 층마다 제복을 입고 서 있던 청원경찰의 경비 업무,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강남구'와 '강남구청장'에 대한 언론 보도 관련 보고서 등 비효율적인 보고 업무, 여직원만 차 심부름을 하는 성차별적인 사무실 문화 등 권위적이며 비효율적인 업무 시스템을 바꿀 것을 지시했다.
정 구청장은 또 전임 구청장이 서울시와 갈등을 빚으면서 오히려 강남구민들의 이해와 요구가 서울시 정책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서 정부, 서울시와 강남구민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서울 강남이 '파리 16구'처럼 경제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풍요롭고 품격있는 지역의 상징이 되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구청장 업무 첫날 지시한 일이 구룡마을의 쓰레기 더미를 치우라는 일이었던 것처럼, "강남의 양극화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구정을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정 구청장과 인터뷰 전문이다.
'정순균 표 강남', 작은 것부터 바로잡는 변화의 시작
프레시안 : 강남구청장 본격 업무 사흘째다. 바쁠 것 같은데, 어떤가.
정순균 : 바쁘다. 여기저기 오라는 곳도 많고, 직접 가서 봐야 하는 현장도 많고… 구청장이 아니라, 동네 동장이 된 것 같다. 그만큼 구민들도 자주 본다.(웃음)
선거운동 기간에 구룡마을(강남구 개포동 소재)을 찾았는데, 주민들이 당선되면 마을 한가운데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를 치워 달라고 요청했다. 전임 구청장 시절, 철거한 가건물 자리에 다시 가건물을 세우지 못하도록 쌓아놓은 쓰레기였다. 마치 옛날 난지도를 보는 것 같았다. 무허가 집단거주지라고는 하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인데…. 당선되자마자 구룡마을 쓰레기 더미를 치웠다.
그런데 구룡마을 쓰레기를 처리하는 일보다, 이를 보고하는 공무원 사회의 관행이 더 문제였다. 보고를 위한 보고를 하느라, 시간과 인력, 물자가 모두 낭비되고 있더라. 그래서 형식적인 보고, 그리고 보고서 만들기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구룡마을 근처를 오갈 때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는데, 쓰레기 치웠다고 말 한마디 하면 될 걸….(웃음)
프레시안 : 구룡마을 주민들도, 구청 공무원들도 '전임 구청장과 다르구나' 하고 느꼈을 것 같다.
정순균 :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업무 첫날 구청에 오니, 입구에서부터 매 층마다 제복을 입은 청원경찰이 서 있었다. 전에는 거센 민원이 많았는지, 구청과 구청장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구민들이 편하게 드나들어야 할 구청에 청원경찰이 서 있으면, 위압감이 들지 않겠는가. 평복을 입고 대기하다 상황이 발생하면 활동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튿날, 약 30쪽에 달하는 '강남구'와 '강남구청장'에 대한 언론 보도 스크랩을 가지고 오길래 이것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담당 직원이 새벽 6시부터 출근해 '구청장 보고용'이라며 특별히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인적·물적 낭비 아닌가. '강남구'와 '강남구청장' 두 단어를 포털사이트에 검색해 보면 될 일을….(웃음)
노무현 정부 국정홍보처장으로 있을 때도 신문과 방송을 일일이 챙겨 보지 않았다. 왜? 대통령이 안 보니까. 당시만 해도 매일 밤이면 광화문 한복판에 다음날 신문을 미리 볼 수 있는 '가판'이 배포됐다. 그러면, 부처나 기업 담당자들이 미리 보고 언론사에 이것저것 요구했다. 언론사는 또 인심이라도 쓰는 양 수정해주고. 하지만 홍보처장으로 있으면서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지시하길, 언론의 비판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정책에 반영할 것은 반영하고 고칠 것은 고치라고 했다. 만약 잘못된 보도라면, 언론중재위원회라는 조정기관을 통해 문제를 바로잡으라고 했다. 언론사 보도를 미리 보고 수정을 요구하고, 언론사는 그걸 바탕으로 생색을 내는 악순환을 끊은 것이다. 청와대부터 가판을 안 봤더니, 정부 기관들도 안 보고 기업들도 안 봤다.
프레시안 : ''정순균 표 강남'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지만, 하나하나가 상징성이 큰일이다.
정순균 : 작은 것 같지만, 이런 것부터 바로잡는 게 변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과거 행정을 '봉사'라고 했지만, 이제는 고객을 위하는 것처럼 구민을 위하는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특히 차 심부름 같은 것. 관공서나 기관에 가면, 으레 여성이 한다. 남성은 아예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성평등시대 아닌가. 시대에 맞게 조직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강남구청의 경우, 이에 대한 개선안을 이번 주 안으로 제시하라고 했다.(웃음)
'갈등 증폭기' 전임 구청장, 강남구민 목소리마저 배제시키다
프레시안 :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된 이래, 23년 만에 처음으로 강남에서 민주당 소속 구청장이 당선됐다. 하지만 그동안 구민들이 보수정당을 선택한 이유는 재산권 문제 때문 아닐까? 특히 재건축 문제에 대해서는 박원순 시정과 강남 구정은 달라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정순균 : '한강 변 재건축 35층 층고 제한'이 강남 재건축 문제를 둘러싼 핵심 쟁점이다. 강남구민들은 재건축 층고 제한은 사업성을 낮게 만드는 재산권 침해라고 주장하는 반면, 서울시는 '2030서울플랜'에 따른 것으로 한강 조망권 등 공익성을 강조하고 있다.
당선된 뒤 바로 서울연구원을 찾아 강남 재건축 문제를 살폈는데, 시민참여형 서울도시기본계획인 '2030서울플랜'에 강남구민은 배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연희 전 구청장과 박원순 시장 간 갈등이 8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결국 강남구민이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장 후보로 첫 번째 공약이 재건축 문제를 염두에 둔 '잃어버린 강남구민의 재산권을 되찾아 드리겠다'였다. '2030서울플랜'에 대한 재협의가 내년에 있다고 하니, 구청장으로 강남구민의 목소리가 서울시에 충분히 반영되도록 하는 첫 번째 임무가 주어졌다. 또 서울시민과 강남구민 사이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중재자 역할까지. 서로 대화하며 고민하다 보면, 해결점이 생길 것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현안에 대해 '중재자' 역할을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정치에서 '중재자'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정순균 : 재건축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서울시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청장이 중재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전임 구청장은 문제 해결을 위해 소통하기보다 갈등을 양산하는 쪽이었지만…. 박원순 시장이 강남에 온다고 하면, 구민들을 동원해 반대 현수막을 내 걸고 집회를 유도하는 등 아예 발을 못 붙이게 했다는 것 아닌가.(웃음)
그동안 강남이 서울시뿐 아니라 구민과 대화도 굉장히 부족했던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러 구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행정을 했던 것 아닐까? 앞으로는 구민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해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읽고, 이를 근거로 해결점을 모색할 계획이다.
프레시안 : '구민 청원제' 도입이 소통을 하겠다는 뜻? 하지만 청와대 청원과 달리 구청 민원은 세밀한 일이라 감당할 수 있을까?
정순균 : 구민 1000명이 서명하면 구청장이 답변하는 '구민 청원제'와 구민이 제기한 민원 처리 과정을 알려주는 '중간 보고제'를 시행할 계획이다. 아파트 단지나 동네에서 제기된 민원에 1000명 이상이 서명한다는 것은 일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일수록 구청장이 직접 나서서 구민과 만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구청장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한다.
양극화 문제가 집약된 강남을 '뉴디자인'하다
프레시안 : 강남구가 부유한 동네지만, 그에 따른 부정적 이미지도 있다. 강남의 이미지를 상향시키는 것도 민주당 소속 첫 구청장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정순균 : 구민으로 강남구와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 넘었다. 일반적으로 '강남에 산다'고 하면 '더불어 함께하지 못한다, 이기적이다, 배금사상에만 젖어 있다'며 부자 동네라고들 하는데, 실상은 다르다. 강남구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25개 자치구 중 여덟 번째로 많다. 강남은 한국 사회의 양극화 문제가 집약된 곳이다.
서울에서도, 특히 강남에 산다는 것은 자랑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겸연쩍은 부분도 있다.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취임사에서 "정순균이 지금부터 강남의 '뉴디자인 시대'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정순균 : 강남구를 프랑스 파리 16구처럼 감동과 낭만이 있는 도시로 만들 생각이다.
전국 350여 개의 연예기획사 중 159개가 강남에 있다. 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방탄소년단'이 속한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등 한류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기획사가 강남에 모여 있다. 강남역이나 코엑스처럼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 상설 공연장을 만들어 운영할 계획이다. 이런 문화 자원과 봉은사, 대모산 등 힐링 문화를 결합해 '도심 속 힐링'이 가능한, 기분 좋은 변화를 만들 것이다.
프레시안 : 강남은 문화 도시인 반면, 기업 도시이기도 하다. 삼성, 현대 등 강남에 본사를 둔 기업만 2000여 개에 달한다.
정순균 : 강남을 기업하기 좋은 도시, 뉴욕의 맨해튼처럼 만들 생각이다. 그래서 '사업하려면 강남으로 가라'는 말이 다시 나오게 하겠다. 기업이 제대로 활동해야 일자리가 생긴다.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공언했지만, 사실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일자리가 생기게 하는 것. 그래서 경제가 활성화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남에 지하 7층~지상 105층 규모의 현대자동차그룹 신사옥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가 들어서면 총 1조5000억 원 이상의 세수가 들어온다. 구청장 입장에서 자체 세수로 구의 자립도가 높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전임 구청장처럼 강남구민만을 위해 써야 한다는 이기주의는 옳지 않다고 본다. 강남구의 품격을 높이면서도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국정홍보처장의 역발상, '보수 텃밭' 강남을 바꾸다
프레시안 : 문재인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 정순균 강남구청장에 이어 강남을이 지역구인 전현희 의원까지 모두 민주당 소속이다. 구민들 기대도 크겠지만, 마음가짐도 남다를 것 같다.
정순균 : 강남구민들이 위대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구민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구정의 모든 판단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구민이다',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진짜 구민만을 위한 행정을 하겠다'라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프레시안 : 국정홍보처장 출신이 강남구청장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좀 놀랐다. 지금 생각하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순균 : 노무현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낸 이병완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 덕이다.(웃음)
고향이 전남 순천인데, 호남 지역이 반문정서가 강한 곳 아닌가. 그래서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기 전, 다음 대선을 준비하려고 지역에서 호남언론대책반을 꾸렸다. 그렇게 8개월 동안 지역 민심을 훑었는데, 호족 정치가 여전하더라.
지역 정치 토양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이병완 전 비서실장과 이야기를 했다.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으로 기초의원에 도전한(이 전 비서실장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광주 서구 다선거구 기초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역발상 정치 행보를 보인 사람 아닌가. 그런데 "선배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강남구청장에 출마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선배가 강남구청장으로 당선되면 민주당으로서도 큰 의미다. 또 '노무현'과 '문재인'의 정치 철학과도 상통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강남에서 민주당 소속 구청장이 나오면, 보수의 텃밭인 강남이 변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그의 역발상 제안 덕분에, 구청장이 됐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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