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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 골목따라 이어진 '시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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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 골목따라 이어진 '시간의 풍경'

[화제의 책] 김유경의 <서울, 북촌에서>

"봉건과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중첩된 의미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북촌'은 보통 이르는 삼청동과 가회동 일대 어느 한정된 지역이라기보다, 친근한 숨은 힘 같은 것이 느껴지는 서울 생활의 한 전형이다."

지난 2004년부터 5년 동안 <프레시안>에 연재돼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던 언론인 김유경의 '북촌 기행'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5년 동안의 취재와 집필 끝에, 골목 구석구석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더 농밀해졌고 그 속에 묻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졌다. 언론인 김유경의 신작, <서울, 북촌에서>(김유경 글, 하지권 사진, 민음인 펴냄)다.

북촌,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곳

가르마처럼 이어진 골목길, 나란히 어깨를 맞댄 한옥 지붕, 그리고 마치 20년 전 풍경이 정지된 듯한, 오래된 떡집과 대중목욕탕…. <서울, 북촌에서>는 북촌 구석구석에서 만난 수많은 주민과 상인, 문화인들의 삶의 모습을 옴니버스처럼 엮어낸 책이다. 세련된 도시의 얼굴 뒤에 숨겨진,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공간들의 이야기다.

▲ 서울, 북촌에서>(김유경 글, 하지권 사진, 민음인 펴냄) ⓒ민음인
그 골목골목의 정취 속에, 북촌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있다. 소격동 철물점 주인의 말 속에는 북촌 풍경의 변화상이 드러나고, 30년 동안 안국동 골목길에서 피마자를 키워온 송영각 선생에게선 옛 선비의 모습이 겹쳐진다. 57년 째 피맛골에서 빈대떡과 막걸리를 팔아온 '열차집'은 대학생부터 30년 단골까지 서민들의 삶의 향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공간이다.

600년 고도의 정수, 서울의 어제와 오늘이 드러나기도 한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 윤씨의 송현동 친정집은 시대의 흐름을 온 몸으로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식산은행의 관사 터로 넘어갔다가, 해방이 되자 미국대사관 직원 사택 단지로 쓰이고, 지금은 삼성전자가 소유한 빈 터로 남아있다는 대목은 씁쓸하기까지 하다.

군사정권 시절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삼청각과 세종문화회관의 건축 뒷 이야기도 흥미롭다. 1972년 남북협상을 위해 지은 뒤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던 삼청각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불도저 정신'의 산물이다. 군 공병대까지 투입해 산자락을 깎고 다져 1년여 만에 완공됐다. 세종문화회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래식으로 만들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지만, 건축가 엄덕문 씨가 뜻을 굽히지 않아 미학적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밖에도 대한제국 황실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 사연, 북촌 곳곳의 커다란 양반집이 사라지고 근대 도시 한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1930년대의 옛 이야기들이 차분한 어조로 이어진다. 중견 사진작가 하지권 씨가 찍은 200여 장의 사진도 이야기 풀이에 힘을 보탠다.

'옛 풍경'이 사라진 도시…'잘려나간' 골목과 삶

전통과 현대, 관과 민, 개발과 보존, 그리고 자본과 문화가 교차하는 곳이 바로 '북촌'일 것이다. 저자는 무분별한 재개발 정책으로 북촌의 풍경이 훼손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이른바 '디자인 한옥' 계획으로 건물이 획일화되고, 도시 계획 명목으로 골목길이 확장되면서 많은 전통 가옥들이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지원금을 받아 새로 고치는 한옥마다 무슨 연립 주택처럼 똑같은 담과 창문, 대문, 통일된 색깔로 획일화되는 게 보인다. 빤질거리는 새까만 기계 기와와 아스팔트 바닥에 서울 토박이의 세련됨보다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황당한 '디자인 한옥'이 넘쳐난다. 좁은 골목길도 변했다. 안국동 네거리에서 헌법재판소를 지나 감사원까지 이르는 가회로는 소방 도로 확충과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무지막지한 왕복 4차선 직선 도로가 뚫리면서 양 옆의 잘생긴 한옥들이 중간에서 무 중동 잘리듯 했다. 심지어는 명성 황후가 자란 집도 잘려 나갔다."

2002년 서울시의 '북촌 가꾸기 기본계획'이 본격화되면서, 북촌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개발업자들이 집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집값은 몇 배로 뛰었고, 업자들은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사용해 한옥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기와 밑에 흙 대신 콘크리트가 채워진 탓에 지금 한옥 지붕은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한다.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집집마다 풍겨오는 밥 짓는 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도 없다.

서울 도심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삼청동 길은 호젓한 주택가에서 인파가 북적이는 상가로 변신했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희비의 시선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눈요깃거리를 찾는 사람들과 세련된 포장 속에 정작 사라지고 있는 것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났던 북촌 골목의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이다.

"한번 이사 오면 30년 이상 살게 된다는 북촌의 매력은 무엇일까. 나는 골목 굽이굽이마다 켜켜이 내려앉은 사람들의 역사를 들추며, 경쟁 사회 속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정수와 만났다. 전통과 현대, 개발과 보존, 자본과 문화가 교차하는 곳, 북촌에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한옥에 반해 30년 동안 북촌에서 살아온 한 영국인이 북촌 개발에 반대하다 시력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이 공개됐다. 자고 일어나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과 여기저기 솟아나는 뉴타운, 그 속도전과 개발 논리에 피맛골이 그랬듯, 북촌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이다.

북촌 풍경이 보존해야 할 문화 유산이며, 지원해야 할 관광 명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옥의 보존이나 볼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이야기'라는 것을 저자는 역설한다. 책이 소개하는 풍경이 값진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개발 논리와 승자 독식의 경쟁 사회에서, 이들의 '북촌 이야기'는 곧 독자들에게도 잃어버린 삶의 정수를 찾아가는 여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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