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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만 반복되는 노동권 보장, '본편'은 언제 시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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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만 반복되는 노동권 보장, '본편'은 언제 시작하나?

[오민규의 인사이드경제] 생색은 지금, 실효성은 나중에…연착되는 노동의 권리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2019년 '일의 미래에 관한 ILO 100주년 선언'을 채택한다.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며 열린 당시 총회에서는 뜻깊은 협약 하나가 새로 만들어진다. 이름하여 '일의 세계에서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 - ILO 제190호 협약이다.

이 협약은 직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폭언·폭행과 괴롭힘으로부터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재명 정부 공약과 국정과제에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 정부도 ILO 190호 협약을 비준하겠다고 말이다.

폭넓은 보호 범위 '일의 세계'

이 협약에서 주목할 대목은 보호 범위가 매우 넓다는 점이다. 정식 근로계약을 체결한 노동자만이 아니라 실습생·교육생·구직자는 물론이고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처럼 전통적인 고용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 즉 '근로계약서를 썼냐 안 썼냐'보다 '일과 관련해 괴롭힘이나 폭력을 겪었느냐'를 더 중시하는 협약이다.

폭력과 괴롭힘을 당한 '장소' 역시 넓게 해석된다. 사무실 책상 앞에서 벌어진 일만 보는 게 아니라 출장, 회식, 고객 응대, 출퇴근 과정, 온라인 메시지나 플랫폼 앱을 통한 괴롭힘까지, 일 때문에 연결된 공간과 상황 전체를 포괄한다. 그래서 협약 이름에도 '직장'이나 '일터'가 아니라 '일의 세계'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

협약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인사이드경제>는 최근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재명 정부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협약 비준 절차를 진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190호 협약 관련 고용노동부 관계자들의 발언을 들어보자.

"장관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ILO 190호) 협약의 영향 및 주요국 사례를 분석하고 국내법 개정 논의를 위한 사회적 대화를 거쳐 비준을 추진하겠다." (지난해 7월 14일, 김영훈 노동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ILO 190호(폭력과 괴롭힘) 협약도 비준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국내법은 어떻게 개정돼야 할지 방향성을 조속히 설정할 것" (송유나 노동부 근로기준정책과장, 3월 5일 국회에서 열린 '프리랜서 아나운서·기상캐스터 노동실태' 토론회에서)

개별법 개정 후 협약 비준 추진?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할 때 겪었던 일이다. 정부는 ILO 협약과 충돌하는 법안을 먼저 개정한 뒤에 협약을 비준하자는 '선입법 후비준' 입장을 고수했다. 앞서 인용한 김영훈 장관, 송유나 과장의 논리도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계약형태·고용형태를 불문하고, 직장 내외는 물론 일의 세계에서 폭력·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산업안전보건법·남녀고용평등법·근로기준법 등의 개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선입법 후비준' 논리를 따르자면, 이들 개별법 개정을 모두 완료한 뒤에 ILO 협약을 비준하자는 것이 된다.

ILO 협약 비준 절차는 반드시 국내법 개정 이후에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타국 사례를 보더라도 우선 협약을 비준한 이후 국내법 개정 절차를 진행한 경우가 많다. 만일 입법절차가 지연될 경우 ILO 협약 비준이 기약 없이 뒤로 늦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효성 담보할 개별법 개정은 "나중에"?

그런데 정부가 ILO 협약 비준 관련 펼치는 논리는 '일하는사람기본법' 제정 토론으로 오면 정반대로 돌변한다. 본래 '기본법'은 헌법과 개별법을 연결시키는 가교 역할로, 헌법에 담긴 추상적 이념이 개별법에 구체화될 수 있도록 방향을 지시하는 성격의 법률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본법을 추진할 때야말로 개별법 개정 방향을 구체적으로 내놓는 것이 필요하다. '일하는사람기본법'과 겹쳐지는 개별법은, 근로기준법을 제외하더라도 산업안전보건법·고용보험법·산재보험법·남녀고용평등법·임금채권보장법 등인데, 기본법에는 이들 개별법을 구체화할 방향은 없고 그저 '추상적 선언'만 들어 있다.

올해 1월 21일 국회에서 진행된 '일하는사람기본법' 공청회에서도 가장 많은 논란이 된 것은 실효성 문제였다. "최소한 손해배상 책임을 명문화해야 한다", "분쟁조정에서 조정을 강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태료로 안된다. 형사처벌 규정과 벌칙 필요하다" 등 여러 의견이 쏟아졌지만 이 의견들의 공통점은 실효성이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의 설명은 한결같다. 기본법이기에 처벌조항이나 강제조항을 넣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기본법의 지향을 구체화할 산업안전보건법·최저임금법 등 개별법 개정안을 함께 패키지로 들고 오면 된다. 개별법이 바뀌면 현장의 체감이 확실히 느껴질 테고 실효성 논란은 사라질 것이다.

책임 생기는 협약 비준도 "나중에"

하지만 그런 법률의 개정 필요성에 이재명 정부가 내놓는 답도 동일하다. "우선 기본법을 통과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 뒤에 개별법 개정 논의에 착수하자." 참으로 익숙한 논리 아닌가. '나중에'!

"ILO 협약부터 먼저 비준하고 개별법 개정하면 되지 않나요?"

→ "개별법을 먼저 개정하고 나서 ILO 협약 비준 추진합시다."

"그럼 일하는사람기본법도 개별법 먼저 개정한 후에 추진하면 되겠네요?"

→ "아뇨. 기본법 먼저 제정한 후에 개별법 개정을 논의하면 됩니다."

국제협약 얘기가 나오면 '법부터 고치자' 하고, 플랫폼·특수고용 관련 '법부터 고치자' 하면 기본법이 먼저라 주장한다. 앞에서는 신중론을 얘기하면서, 뒤에서는 선언 먼저 하자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책임과 실효성 강제" - 결국 이걸 하기 싫다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라는 말이 된다. 국제협약 비준도 나중, 개별법 개정도 나중, 그런데 선언은 지금. 정부가 원하는 것은 권리의 실현이 아니라 권리의 예고편이라는 뜻 아닌가.

ILO 협약을 비준할 경우 1년의 유예기간 후 관계법령 개정에 대해 ILO 전문가위원회의 강도 높은 감시·감독 시스템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하는사람기본법은? 이거 제정한 후에 10년이고 20년이고 관계법령 개정 안 해도 큰 압박이 없다.

정부에 대한 신뢰 부족?

"에이, 설마 그러겠어? 정부를 너무 못 믿는 거 아니야?" 실제 사례를 들어보자.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전부개정이 이뤄진 2020년, 특수고용·플랫폼 중 일부 업종도 산안법 보호범위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전부개정 당시 법의 제1조 '목적' 조항이 바뀐 것이다.(아래 표)

▲2020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전후 목적 조항.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

'근로자의 안전 및 보건'이라는 단어를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의 안전 및 보건'으로 개정해 특수고용·플랫폼 등 포괄적인 보호대상을 설정했다. 그런데 새롭게 보호범주에 포함된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에게 보장된 권리는 5조·6조·77조·78조 딱 4가지 조항에 불과하다. 바로 그 조항들이 지금 일하는사람기본법에 명시된 선언적이고 추상적 권리와 꼭 닮았다.

그럼 어떤 권리가 보장되지 않을까? 취객을 상대하고 고객 폭언에 시달리는 배달 라이더, 대리기사들인데, 감정노동자 건강장해 예방조치(41조), 작업중지권(52조) 등이 일체 보장되지 않는다. 심지어 윤석열 정부가 산재보험법에서 삭제한 '전속성 기준'이 산안법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앱을 2개 이상 사용하는 플랫폼노동자에게는 산안법의 그 어떤 조항도 적용되지 않는다.

법의 '목적'을 바꿔서 '일하는사람'으로 보호범위를 넓히겠다고 '선언'은 했지만, 지난 6년 동안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를 위한 구체적인 제도개선은 단 한 글자도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선언'이라도 해야 구체적인 개선도 된다는 말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 나빠지는 건 없다?

"그래도 법·제도가 더 개악되는 건 아니잖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 말입니다." 일하는사람기본법 제정을 놓고 찬반토론을 이어가다보면 최종적으로 이 논리와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이건 위험한 얘기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논리로 빈껍데기 입법을 성과로 둔갑시키고 진짜 개혁을 늦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많이 아픈 사람에게 '위로'를 전하는 건 분명 없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진짜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치료'다. 위로라도 했다는 이유로 치료가 늦춰진다면 그걸 과연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뭔가 '나아지는 것'이 실효성 있게 주어져야 한다. 고장 난 우산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을까? 문제는 정부가 이걸 두고 '비를 피할 수 있다'고 선전할 때 더욱 증폭된다. 고장 난 우산이니 비를 피하려면 다른 부품을 더 끼워야 한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국제협약과 기본법 동시 추진

답은 간단한 곳에 있다. 일하는사람기본법과 개별법 개정안을 패키지로 내놓는 것이다. 최소한 산안법에서 전속성 기준을 폐지하고, 특수고용·플랫폼 현장에도 위험성 평가를 실효성 있게 시행할 의무를 강제하는 것이다.

ILO 제190호 협약 비준과 일하는사람기본법 제정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두 가지(협약과 기본법) 모두 개별법·국내법 개정의 방향과 지침을 담고 있는 규범 아닌가. ILO 190호 협약의 정신이 근로계약만이 아니라 '일의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것인 만큼 일하는사람기본법 취지와도 일맥상통한다.

"프리랜서가 근로자성 문제와 별개로, 생계 유지를 위한 최저·적정 보수 가이드라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부에서도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 업종별 보수 가이드라인을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 중이다." (송유나 근로기준정책과장, 3월 5일 국회 토론회에서)

하지만 이 정부가 내놓는 대안들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최저임금법 개정 또는 최저보수제 도입이 아니라 또다시 실효성 없는 '가이드라인'을 내놓겠다? 국제사회 감시는 싫고 간판과 생색만 좋다는 말인가. 지켜야 할 협약도 나중에, 실효성 있는 개별법 개정도 나중에, 예고편만 무한반복. 대체 본편 크랭크인은 언제쯤,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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