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살아 있는 개념이자 행동의 기준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민주주의 자체를 정면으로 공격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 민주주의의 생동력 덕분에 반민주적 세력은 민주주의를 직접 겨냥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만약 한국 민주주의의 활력이 조금이라도 빛을 잃는 순간이 온다면,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들의 다음 수순은 민주주의 자체의 무용성과 과잉을 끈질기게 공격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느냐고? 민주주의의 활력이 이미 퇴색해버린 프랑스에서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이를 예견한 바 있다. 그는 2005년에 출간한 책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허경 옮김, 인간사랑 펴냄)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지금, 민주주의가 조락한 사회의 지식인이 남긴 이 격정적인 기록을 펼쳐 드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다.
책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한국 사회가 이른바 'K-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으로 들떠 있는 와중에,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해 근원적이고 발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민주주의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무찌르고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우리의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민주주의는 결코 승리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언제나 지배 엘리트와 지식인들에게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고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이 대중적 담론으로 본격 부상한 계기는 '68혁명'이었다. '모든 금지를 금지하라'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그 운동은 기존 보수적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던졌고, 곧 보수적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의 '과잉'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랑시에르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민주주의 통치를 위기로 몰아넣는 것은 다름아닌 민주적 삶의 심화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삶의 심화와 이것을 뒤따르는 위협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 '민주주의적 삶'은 한편으로는 국민 권력을 확인하는 무정부주의적 원칙과 같은 것으로서, 이것은 1960-1070년대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서방 국가들에서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한 적이 있다. 즉 시위대의 전투적인 항의가 합당한 통치의 모든 원칙에 도전하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국정 전반에 개입하게 되었던 것이다."(상기 책 인용 인용 미 기재시 동일)
"민주주의적 삶은 공공영역에 대한 토론에의 광범위한 민중참여를 의미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해악한 것이었다. 올바른 민주주의는 집단적 행동의 지나침이나 과도한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이중적 광이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형태인 동시에 사회형태여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민주주의는 과도함이 지배하는 그런 것이다.
'68혁명'의 급진적 민주주의에 맞서 보수 세력은 곧 '민주주의의 과잉'이라는 담론으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유대계 철학자 베니 레비다. 그는 저서 <목자의 살해>(한국 미출간)에서, 모든 권위를 부정하며 때로는 폭력적으로 치닫는 민주주의 과잉이 인간이 의지할 마지막 근거마저 제거해버렸다고 주장한다. 레비는 사회를 기저에서 떠받치는 권위를 '신성한 목자'라 부르며, 민주주의라는 급진적 평등주의가 이 목자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성의 파괴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모든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국가, 시장, 테크노크라시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것들은 사회의 근본적 권위가 되기에 부족했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통치할 자격'을 문제삼는다.
"역사적으로 인간을 통치할 자격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혈연 또는 신성에 기초하는 출생성분상의 우월성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과 재생산활동의 조직역량에 기초하는 경제적인 능력인 것이다."
혈통에 따른 신분세습과 재력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혈연, 재력이란 귀속지위에 의한 통치와 어떻게 다를까? 저자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내린다. "그것은(민주주의-필자주) 오로지 우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기초하는 통치원리라고 할 수 있다." 우월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출생신분, 재력, 능력이라는 귀속적 지위에 따른 차별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혈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위계질서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마침내 랑시에르는 무시무시한 주장을 제시한다.
"(귀속지위 이후-필자주) 마지막으로 남은 이 자격은 무자격으로서, 통치할 자격도 통치받을 자격도 없는 자들에게 부여되는 자격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헌정의 한 형태도 아니며, 사회의 한 형태도 아니다. 인민의 권력이란 사회 구성원 전체의 권력이 아니며, 다수의 권력도 노동계급의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받을 자격만큼이나 통치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고유한 권력이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제도적 장치로 환원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선거제도나 권력분립을 넘어선다. 그것은 "누구나 통치할 수 있"”는 급진적 평등의 원리이며, 현실 속에서는 '자격 없는 자들'의 출현으로 정치 질서를 뒤흔드는 사건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계적 질서와 충돌하며, 늘 추문(스캔들)처럼 불편하게 나타난다.
랑시에르는 왜 자격 없는 '아무나에 의한 통치'를 민주주의라 부를까? 그의 주장은 현실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는 오늘날의 사회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과두제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조차, 체제를 민주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과두정의 장식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두정 사회에서 사람들은 소수 기득권의 통치 아래 각자 '자신의 몫'을 할당받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욕망하면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반드시 아르케(arche), 즉 '근본 원리'에 따라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르케란 한 사회가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근본적 원리에 의해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과두정 또한 이러한 지배적 질서, 곧 아르케에 의해 정당화된다.
철학자 진태원은 <한겨레>에 쓴 칼럼을 통해 아르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설정하려는 것이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을 특징짓는 논리라고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철학”의 진정한 목표는 실은 민주주의, 곧 정치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르케의 질서, 다시 말해 기하학적인 몫의 분배 질서는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본래적인 정치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한겨레> 2019년 10월 19일 자 '민주주의는 몫없는 자들의 몫이다')
자격없는 자들에게는 몫이 아예 배제될 때 불현듯 '민주주의'가 개입한다. 민주주의는 '몫없는 자들의 몫'을 요구하는 목소리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이런 통치할 자격없는, 통치받을 자격조차 없는 아무나, 누구나의 통치임을 선언한다. 자격없는 자의 통치는 과두정 기존질서에 파열을 낸다. 그래서 그는 아르케논리와 단절할 것을 주문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다시 떠올리기 싫은 추문이다.
랑시에르는 느닷없이 등장하는 민주주의의 역할을 이렇게 규정한다.
"민주주의는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이자 공공영역의 확대과정이다."
"국가 내부와 사회에 대한 과두제적 이중지배를 보장하는 공(公)·사(私) 영역의 분리에 저항하는 투쟁이다."
공·사의 분리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잘 다가오지 않는다. 저자 자신도 그다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해가 어려운 분들은 '세상은 만인의 것'이라 주장하는 유교의 덕목 '천하위공'(天下爲公)을 떠올려보면 된다. 세상이 구획되고 개인적 사유화가 진행될 때 사회는 부패한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들리는 분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작 <정치질서의 기원>(함규진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후쿠야마는 사회 붕괴의 핵심 원인으로 '가산제'(家産制, patrimonialism)를 지목한다. 가산제란 '가족·친족에 권력과 재산을 증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천하위공의 사상과 정반대의 것이다. 조선왕조가 500년간 상당한 수준의 질서와 문화 수준을 동시에 유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는 매우 조숙한 근대국가였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민주주의가 진전됨에 따라 더욱 세련되게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파는 민주주의를 무능한 대중의 지배로 매도하고, 좌파는 대중의 무분별한 욕망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말한다. 많은 정치이론가들에게 민주주의는 '혼란'과 '무질서'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 배경에는 "정치는 원래 전문가와 엘리트가 이끌어야 한다"는 오래된 전제가 자리한다. 랑시에르는 이 전제를 뒤집는다. 정치란 결코 질서의 유지가 아니며, 오히려 질서를 교란하는 '평등의 실현'이다. 정치의 주체는 이미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 아니라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이들이 '나도 말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할 때 비로소 등장한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 순간, 기존 체제를 불편하게 하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결국 민주주의가 추문(스캔들)이라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결함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이다. 민주주의가 늘 증오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것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이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급진적인 평등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언제나 엘리트들의 반감을 사고, 제도적 틀 안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다. 민주주의가 끝없이 귀찮고 불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불편한 스캔들을 감수할 용기를 갖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 '몫 없는 자들'이 또다시 무대에 등장하는 한, 민주주의는 늘 불온한 스캔들로서 살아남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에게는 마주치기 싫은 추문이다. 우리는 이 추문을 감내해야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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