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문호 루쉰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건 그의 소설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중국 근대 문학의 장을 열고 세계 시민을 열광케 한 그에게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모두 존재한다. 최근 중국에서 루쉰의 작품들이 '중화주의'에 반하고 '중국인'의 열등감을 부각시킨다는 이유로 젊은 세대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는 얘길 접했을 때 느낀 반가움도, 그의 소설이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데 대한 만족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특히 리영희 선생은 루쉰의 광팬이었는데, 그는 루쉰의 작품을 언급하며 "내가 평론 문장 쓰기에 언제나 명심하는 교훈은 노신(루쉰)의 광명 속에 앉아서 암흑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암흑 속에서 암흑을 대상화하는 태도"라고 했다. 루쉰은 어설픈 계몽론에 젖지 않으려 했고, 세상을 내려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진창' 속으로 들어가 그 세상이 만들어낸 그늘을 직시하는 사람이었다. 그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가 떠오른 것은 윤석열을 보면서였다.
광인일기에는 지식인으로 추정되는 한 피해망상 환자(혹은 정신분열 환자)가 등장한다.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이 '식인(食人)'에 중독됐다는 망상에 빠져, 동네 사람들은 물론 자신의 형제, 가족이 모두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고 믿는다. 길거리에서 본 여인이 자식을 혼내며 '내 너를 물어뜯겠다'고 하는 걸 '식인'의 증거로 해석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는 걸 '결국 날 살 찌워 잡아먹으려는 음모'라며 몸서리친다. '왜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느냐'는 질문에 "그런 일은 없다"고 답하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의심하고 급기야 인류의 역사가 식인의 역사 그 자체라고 단정한다.
이 광인의 일기장은 이렇게 끝난다. "사람을 먹어 보지 않은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
1911년 중국 최초의 근대화 운동인 신해혁명이 환멸로 귀결되던 시절, 루쉰은 광인일기를 썼다. 소설은 마치 광인을 조롱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세상을 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광인이 본 '식인 세상'은 먹고 먹히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메타포일 수 있다. 그 곳에서 광인은 민중을 계몽하려다 실패한 병약한 지식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무지한 민중의 '식인' 습관을 깨닫고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한 '광인'일 뿐이다.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광인은 망상에 빠져 세상을 적대시하는 미친 편집증 환자일 뿐이다. 오히려 광인은 자연스러운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습의 망령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국 민중'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정 반대의 해석이 가능한 게 루쉰 소설의 묘미다.
윤석열을 보면서 '광인일기'를 떠올린 이유는 그의 세계관이 광인과 비슷해서다. 윤석열은 모스 탄이라는 음모론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글로벌리즘은 완전히 배신 당했다. 공산주의 네오막시즘, 완전히 구축된 권위주의 독재체제, 초국가 경제권력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며 "글로벌리즘은 거대한 기득권 카르텔을 구축해 국가도, 주권도, 자유도 거기에 매몰되고 이제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식인'의 세상에 홀로 깨어 있는 광인이다.
최근엔 옥중 편지를 페이스북에 공개해 "제가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유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제가 겪는 일신의 고초 때문이 아니다. (...) 제가 우려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와 국민의 미래가 진심으로 걱정된다"고 주장했다. 윤석열은 지금 '광인일기'를 쓰고 있다. "사람을 먹어 보지 않은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는 사명감을 일기에 적어둔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윤석열의 '광인일기'와 루쉰의 '광인일기'의 다른 것은, 윤석열이 소설 속 메타포로 구축된 인물이 아니라, 현실에 실재로 존재하는 망상가라는 점이다. 그는 스스로를 '계몽자'로 명명한 뒤 광기에 빠져 세상을 불태우겠다고 결심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리하여 윤석열의 광인일기는 문학적 상상력을 무너뜨리고 우릴 현실의 위기 앞에 세워놓는다. 윤석열의 광인일기는 루쉰의 광인일기와 다르게 '망상에 빠진 불행한 권력자'에 대한 풍자로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게다가 윤석열은 '가짜 광인'이다. 루쉰의 광인은 스스로 완벽한 순환 논리를 만들어 내지만, 윤석열은 자신의 신도 앞에서만 망상의 나래를 펴다가, 내란죄 수사 앞에서는 현실론적 법기술자가 되는 모순을 보여준다. 모스 탄과 같은 자신의 지지자들 앞에선 '광인일기'를 쓰며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펼치다가도, 내란 재판에 이기기 위해 '인간 방패'가 돼 줬던 경호처 간부들을 고소하거나, '날'로 계산해온 구속 기간을 갑자기 '시간'으로 계산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선택적 망상'이다.
윤석열은 '광인'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탄핵 심판정에서 윤석열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일삼았다. 국회에 1500명의 병력을 보내놓고 본청에 특전사 요원들 20명 밖에 안 들어갔다고 뻔뻔하게 주장했고, 김용현 국방장관이 "280명이 본관 안쪽과 복도든 이쪽 곳곳에 가 있었다"고 반대되는 증언을 하자 곧바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윤석열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정치인들을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들은 사람이 있는데 아니라고 거짓말을 태연하게 한다.
그는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과정에서 '경고성 계엄' 같은 조악한 논리로 처벌을 피해가려는 잔기술을 부리다가 거짓말이 들통나 멋쩍게 웃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그때는 그의 행동을 규정할 마땅한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는데, 지금 그의 행태를 보니 '가짜 광인'이라고 규정하는 게 딱 맞는 것 같다.
거짓말은 '망상'과 다르다. 그의 관심사는 처벌을 피하는 것 뿐이다. 자신이 편할 때 음모론을 받아들이다가, 갑자기 형사 사법 체계의 헛점을 치밀하게 파고든다. 공산주의자들이 부정 선거를 일으켜 나라를 무너뜨린다는 거대 음모론은, 자신을 지지하는 한줌 극우 세력들의 입맛에 맞춘 것이고, 그들을 선동하기 위한 영리한(?) 전략일 뿐이다.
루쉰의 광인일기 속 광인은 피해망상이 '완쾌'되어 공무원이 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완쾌'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짜 광인'의 피해망상적 일기를 강제로 시청하고 있다.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우릴 번쩍 정신들게 한다. 광인 흉내를 내는 거짓말쟁이 내란 확신범 윤석열에 대한 신속한 처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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