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숙제로 전락한 수행평가지만, 폐지가 아닌 과감한 개선을 통해 당초 기대했던 평가 체계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학교 현장에서 시행돼 온 수행평가를 둘러싼 논란이 교육계에 대두됐다.
지난 1999년 암기 위주인 지필평가의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고, 학생들에게 창의성과 사고력 및 문제해결력 등을 길러주기 위해 도입된 수행평가가 당초 취지와 다르게 운영되면서 교육현장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다.
과목당 2∼3개의 평가가 진행되는 등 수행평가의 시행 횟수와 특정 기간에 집중되는 시행 시기 및 내용 등 과도한 분량과 공정성 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잇따르면서 수행평가의 폐지 목소리마저 나왔다.
사정이 이렇자 교육부는 지난 2일 수행평가에 대한 중·고등학생들의 과도한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올 2학기부터 모든 수행평가를 수업시간에만 진행하도록 하는 내용의 개선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교육현장에서는 실질적인 구조 개편 없이는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현장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개선안이라는 시각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수행평가, 전면 재구조화’를 선언한 경기도교육청은 학생과 학부모 및 교사와 함께 수행평가의 현재를 진단하고, 향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수행평가 현장의견 수렴 토론회’를 개최했다.
21일 총 200여 명의 학생과 학부모 등이 참여한 가운데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이번 토론회는 박태곤 수원 매탄고등학교 학생과 윤미미 과천고등학교 학부모, 이호림 시흥 서해고등학교 교사 및 김선 충남대학교 교수가 패널로 참여했다.

각 토론자들은 그동안 시행된 수행평가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도 해당 제도의 폐지가 아닌, 학생들이 지닌 역량과 가능성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개편을 통한 수행평가의 본질 회복을 주장했다.
가장 먼저 토론자로 나선 박태곤 군은 "그동안 수행평가는 지필평가에 몰리는 과도한 부담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됐고, 학생들의 학업 역량에 대한 정성적 평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학생들의 학업 성취가 낮은 경우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점수를 보장해 주는 ‘기본점수제도’는 학생 간 교육격차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럼에도 현재 학생들에 수행평가는 지속적인 난이도의 상승 및 물리적인 평가 시간의 절대적 부족 등 교사와 학생을 향한 과도한 물리적·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과제형 평가의 원칙적 금지에도 사교육으로 인한 학생 수준의 상향 평준화가 이뤄지면서 학생간 변별력이 사라지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요구된 논술형 수행평가는 학생이 즉각 작성하기 어려워 질적 하락으로 이러지는데다 심각한 경우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마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박 군은 "무엇보다 현재의 수행평가는 평가를 위한 평가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지만, 그럼에도 수행평가를 폐지해야 한다는 시각은 결과적으로 사교육의 성장을 촉진하는 위험한 해결책이 될 수 밖에 없다"며 "실제 매탄고에서는 디지털 기기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수업시간 내 평가 운영을 통해 분량과 시간의 적정성 및 교사의 수업진도 부담 완화, AI 활용 능력과 디지털 리터러시 등 미래역량 학습 등의 효과를 얻고 있는 상황"이라고 소개한 뒤 "모든 과목에서 불필요한 논술형 평가를 시행하는 제도를 개편하는 등 수행평가의 운영 방식에 대한 현실적 개선만 이뤄지더라고 수행평가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학부모 윤미미 씨는 "수행평가가 본연의 취지대로 자리 잡았다면 지필평가의 경쟁에 부담도 줄고 보다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긍정적 결과를 이끌어 냈겠지만, 정작 교육현장에서는 또 다른 내신과정으로 치러야 하는 시험으로 변질된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교육현장에서 제기하고 있는 수행평가의 문제는 ‘과도한 과제량’과 ‘수행평가 시간의 절대적 부족’ 및 ‘공정성 실종’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 씨는 "한 한기에 과목당 평균 세 차례의 수행평가가 실시되다 보니 학생들은 학기당 대략 36회의 수행평가를 치르고 있으며, 평가형식도 쪽지 시험과 PPT 제작·발표를 비롯해 포트폴리오 제작과 서술형 글쓰기 및 프로젝트 완성 등 다양한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며 "또 지필평가 준비기간과 수행평가 일정이 겹치면서 학생들이 과도한 학습량에 치이고, 평가의 변별력이 사라지면서 공정성 논란에 휩싸이는 현실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수행평가의 비율 조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평가비율이 낮아진다면 과제량과 범위 및 평가 횟수의 감소를 이끌게 되는 것은 물론, 지필평가 준비기간과 겹치지 않도록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는 여력도 마련되며, 내신에 불리하다고 여겨지는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도 부담없이 수행평가를 시행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어린 나이부터 과도한 경쟁과 우열 가리기에 학생들을 내몰지 말고, 교육의 본질을 지켜나갈 수 있는 평가 체계로 지속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호림 교사 역시 "최근 수행평가 폐지에 대한 청원도 나온 상황이지만, 지금은 폐지에 대한 논의보다 수행평가의 파행적인 부분들을 어떻게 고쳐 내실화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며 "수행평가는 ‘전인교육(지식 전달에 치우친 교육에서 탈, 지·덕·체의 균형된 발달을 지향하는 교육)’의 실현을 목표로 설계됐지만, 정작 학교현장에서는 상대평가로 진행되면서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서열화·점수화의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또 "교사의 입장에서도 교원 인사발령 시기로 인해 촘촘한 평가 계획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데다 여러 교과를 맡으면서 갖게되는 평가 부담, 지필평가 외에도 체육대회와 현장체험학습 등 다양한 교내 행사 및 교육활동 등으로 인해 수행평가 시행 시기를 임의적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AI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에듀테크를 활용한다면 학생의 수행 부담과 교사의 평가 부담 등을 줄이게 돼 결국 수행평가가 학생의 성장 및 교사의 전문성 신장에 도움이 되는 제도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선 교수는 "원론적으로 교육 평가는 추론의 과정"이라며 "실제 학생들의 잠재능력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평가 도구를 활용해 관찰 가능한 증거들을 토대로 학생들의 성취 증거들을 수집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결국 평가방법 자체에 대해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볼 것이 아니라, 무엇을 평가하려는지에 따라 타당하고 적합한 평가방법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따라서 좋은 수행평가 과제의 기준이 무엇인지, 복합적이고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을 평가할 수 있도록 개발됐는지 등을 살펴본 뒤 과제의 지침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제시해주는 것이 최우선 돼야 할 것"이라며 "또한 수행평가는 객관식 평가가 아닌 주관식 평가라는 점을 인정하고, 교사의 전문성과 평가권을 존중하는 것을 기본으로 수행평가가 지속돼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토론회 참석자들도 이 같은 지정토론자들의 의견 대부분에에 공감의 뜻을 밝히면서 △학교생활기록부의 단순화 △교사의 행정업무 경감 △고교학점제 폐지 △교사정원 확충 △디지털 기기 및 AI를 활용한 수업시간 내 평가 등 수행평가가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과 변화의 방향성 등을 제시했다.
임태희 교육감은 "교육감으로 일하면서 대한민국 교육정책의 형성 과정에 대한 문제 의식이 커지고 있다"며 "예를 들어 대입문제와 관련해 교육부가 유·초·중등교육을 책임지는 시도교육청과 깊이 있는 의견을 나누지 않고 있는 점 등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행평가 문제 역시 학생과 학부모 및 교사 모두가 고충을 겪고 있는 상황임에도 교육부는 교육현장과 동떨어진 지침을 일방적으로 내려 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오늘 토론회에 참석하신 분들 모두 수행평가의 폐지보다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대입문제와 직결된 수행평가를 얼마나 공정하고 실효성 있게 운영해야 하는지 교육당국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경기도교육청은 앞으로도 교육현장의 목소리를 통해 현장 맞춤형 대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