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이고 비상식적인 요구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의 요구 사항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한국이 미국이 만족할 만한 양보안을 내놓지 않으면 8월 1일부터 25%의 보편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방위비 분담금을 현재보다 9배가량 많은 연 100억 달러로 올려달라는 것이다. 셋째는 한국의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수준으로 끌어올리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요구를 다른 동맹에게도 내놓고 있다.
이게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터무니없는 요구인지는 숱하게 거론되어왔다. 그런데도 트럼프 행정부는 막무가내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마가(MAGA)'가 미국 스스로 경쟁력을 강화해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특히 동맹국들을 갈취해서 이루겠다는 심보가 아니면 도저히 설명 불가할 정도이다.
이렇듯 자아도취와 유아독존, 그리고 인정투쟁과 갑질의식으로 똘똘 뭉친 트럼프의 미국을 상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미국의 자정기능이 눈에 띠게 약화된 것도 이러한 우려를 부채질한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4년 임기는 이제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하면 트럼프의 폭주가 제어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트럼프가 정치적 궁지에 몰릴수록 어떤 무리수를 들고 나올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미국 우선주의'가 미국의 초당적인 '뉴노멀'이 되고 있어, 트럼프 이후의 미국이 '정상국가'로 되돌아올지도 불분명하다. '탈미'가 지구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까닭이다.
'미국 패권의 종언'도 유행처럼 거론되고 있지만, 유심히 봐야 할 지점들도 있다. 트럼프의 요구가 적대국이나 경쟁국을 상대로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지만, 동맹국을 상대로는 그 어느 때보다 패권적 행태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나라일수록 전전긍긍하고 있다. 과도한 요구에는 선을 그어야 하는데, 이러다가 트럼프의 화를 돋워 더 큰 화를 불러오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동맹이라는 미국에 '공미증'(恐美症)을 앓고 있는 셈이다.
'미친자의 이론'(madman's theory)를 신봉하는 트럼프에게 자신을 향한 타자의 두려움은 가장 큰 먹잇감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라는 공포심을 상대방에게 주입시켜, '그럼 내가 하자는 대로 해!'라는 강압 외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의 여러 현안에서 한국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주한미군 철수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자체 국방비를 크게 올리지 않으면,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올려주지 않으면,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나올 수도 있다는 걱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미 과도하게 책정된 방위비 분담금을 크게 올려주는 것도, 이미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국방비 부담이 높은데 이를 2배가량으로 늘리는 것도, '한국 방어'를 위해 주둔한다는 주한미군을 대중국용으로 전환하는 것도 상식과 국익에 맞지 않다. 그래서 나는 '현명한 자강'을 주문하고 싶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트럼프 행정부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주한미군 감축론'을 흔쾌히 수용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과거에 여러 차례 주한미군 감축을 희망한다고 말한 바 있기에, 이는 트럼프에게 '정치적 승리'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또 한국은 이미 3년 연속 세계 군사력 순위 5위를 기록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주한미군 감축이 한미가 상호 만족할 수 있는 합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미국의 확장억제는 유지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미국 내에서 나오는 주한미군 감축론은 핵우산을 포함한 확장억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 트럼프 행정부 안팎에선 전작권 전환이 필요하다는 입장도 강하다. '주한미군 감축-확장억제 유지-전작권 전환'을 골자로 하는 한미동맹의 미래상을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슬기롭게 자강하기 위해서는 자강의 핵심을 잘 잡는 게 매우 중요하다. 지배적인 담론은 군사력 강화에 맞춰져 있는데, 그 부작용과 기회비용을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총알을 먹을 수 없고, 전차나 장갑차를 타고 출퇴근·통학할 수 없으며, 전투기를 타고 여행을 다닐 수는 없다. 적절한 군사력은 필요하지만, 결코 다다익선(多多益善)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 이재명 대통령도 강조한 것처럼,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5위 수준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GDP보다 더 많은 돈을 국방비를 쓰고 있다. 그런데도 방산 대국을 향한 열망이 뜨겁다.
하지만 방산은 결코 “미래의 먹거리”라고 보기 어렵다. 무기 수출이 품고 있는 윤리적 문제도 있지만, 투자 대비 고용 효과가 다른 분야에 비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방산 분야의 고용 창출 효과가 훨씬 높은 미국에서도 같은 예산을 보건의료·교육·인프라 등에 투입하면 2배 안팎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군비증강 중심의 자강론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부작용은 남북관계의 돌파구 마련은 하염없이 길어지면서 한반도 군비경쟁을 격화시킬 소지가 크다는 데에 있다. 문재인 정부 후반기에 남북관계가 악화된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문 정부가 "단계적 군축"에 합의해놓고 역대급 군비증강에 나섰다는 데에 있다.
또 지금도 남북 간의 재래식 군사력 격차가 큰 상황에서 한국이 군비증강의 고삐를 더욱 당기면, 조선은 핵과 미사일 및 러시아와의 군사협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돈은 돈대로 쓰면서 안보의 대미 의존도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주문하고 싶다. 여러 차례 강조한 것처럼, 막대한 국가적 자원이 소모되는 '유사시 무력통일론'을 내려놓으면, 남북관계의 새판을 짜면서 대북 억제 위주의 효과적인 군사력을 구축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군비증강을 조정해 생긴 예산상의 여력을 민생과 복지, 그리고 공공분야 일자리 창출에 쓰면, 경제적인 자강에도 기여하게 된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최근 신간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를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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