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의 계절이다. 7월에 결정되고, 8월에 고시되니 여기저기서 최저임금을 주제로 말들을 섞을 거다. 경영계는 처음엔 1만30원 동결을 주장했고 이후 수정안에선 10원, 20원씩 올렸다. 10원짜리 동전 보기도 힘든 세상이니, 말장난처럼 들린다. 차라리 동결이 정중한 표현처럼 느껴질 정도다. 7월 1일 수정안에선 총 80원 인상을 제안했다. 100원도 올릴 수 없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결론이 무엇이든 이런 반응들은 쏟아질 거다. 소상공인 다 죽는다, 일자리는 줄고 기업들은 해외로 갈 거다 등등. 경영계 의견보다 높게 결정되면, 더 심한 말이 더해질 거고.
최저임금 1만 원 이야기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등장한 2012년부터 있었던 말이다. 그전에도 있었다. 2001년에 기사에도 최저임금 힘겨루기가 치열했음이 발견된다. 전년도 1865원이던 최저임금이 2001년에 2100원이 되었는데 인상 폭이 너무 가파르다는 이유였다. 2000 원 다음은 3000원이고, 다음은 5000원, 그러다 끔찍한 1만 원의 시대가 열린다는 우려가 등장했다. 3000원이 되는데도 4년이 걸렸다(2005년, 3100원). 9년이 더 흘러 5000원이 되었다(2014년, 5210원). 여기서 11년이 지난 2025년에야 최저임금은 만 원의 벽을 넘었다.
2008년에도 경영계는 최저임금 인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때 최저임금은 3770원이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는 3300원이었다. 17년이 지나 아메리카노는 4700원이 되었고 지금 최저임금으로 두 잔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데 이를 최저임금이 너무 급하게 오른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 라떼 두 잔도 못 사는데 말이다. 제주 말차 크림 프라푸치노는 두 잔이 1만3000원이라, 내년도 최저임금이 경영계가 제시안 인상금액에서 10배 더 올라도 어렵다.
이 순간, '왜 저런 걸 마시려고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시대에 따라 소비의 결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건데, 예시에만 집중한다. 스타벅스를 말하는 거겠는가. 그런 카페들이 흔하디흔하다는 거다. 사람들이 카페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게 삶의 한 조각이 되었다는 거다. 거기서, 매번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사람은 한 번쯤은 프라푸치노가 어떤 음료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아메리카노가 무슨 커피인지도 몰랐던 2001년이라면 느끼지 못할 박탈감이지만 지금은 2025년이다. 열 번 가면 한 번쯤은 다른 음료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 이야기인데, 최저임금과 연결만 되면 늘 멋대로 해석한다.
'최저'에 꽂혀서다. 그러면 최저임금 인상으로 이 사람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저 인간들에게 최저임금 올려줘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식의 괴상한 말들이 당당하게 등장한다. 임대료와 카드 수수료 그리고 플랫폼 기업의 갑질에 소상공인이 힘든데 최저임금까지 오르면 어쩌냐는 말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앞의 삼중고를 최저임금 노동자가 책임지는 게 어찌 억강부약(抑强扶弱)이냐면서 질문을 분리하자고 하면, 대답은 이렇게 돌아온다. "누가 강이고 누가 약이야?"

'밥 하는 동네 아줌마'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이때부터 자본이라는 거대 악은 사라진다. 사람이 사람을 헐뜯는다. 특정 취향으로 연결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런다면 한숨 쉬고 말 일이지만 그 내용들이 일상 속으로 여지없이 침투한다. 이 주제로 찬반 토론을 하는 대학생들이든 고등학생이든 심지어 초등학생조차 비슷한 이야기를 끌어모아 대화를 한다.
상대가 논박하면, 논리를 가장한 거친 말이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다. 모두가 자본의 그늘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다르지 않은데, 약자가 약자를 끝없이 조롱한다. 그 순간, 최저임금의 사회복지적 맥락은 개인을 징벌하는 성격으로 둔갑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최저임금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라는 말이 "저러니 최저임금이나 받고 살지"라는 빈정거림에 덮인다.
최저에 꽂혀서다. 그러면 정책을 따지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이 어떤 사회적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차근히 설명하지 않고, "그 돈이면 충분하지 않냐?"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긍정적으로 살라는 격려처럼은 들리지 않는다. 최저임금 받는 최저의 삶 주제에, 도대체 뭘 하려고 돈이 그렇게 필요하냐는 비웃음이 가득하다.
2025년에, 어쩌다가 피자 한 판이라도 배달시켜 먹는 게 개념 없는 행동인가? 2025년에, 제주도 여행 한 번 꿈꾸는 게 낭비의 끝판왕인가? 2025년에, 1년에 한 번만이라도 뮤지컬을 관람하고 싶다는 게 분수를 모르는 짓인가? 물론, 대답은 간결하다. "그걸 왜 해야 해?"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예시를 바꿔보지만 효과는 없다. 스마트폰 없어도 살 순 있지만 불편하지 않냐, 대학생이 노트북 없어도 학교야 다닐 수 있지만 경쟁에서 뒤처질 거다 등의 말을 한들, 대답은 더 냉소적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지."
최저에 꽂히면, 최저임금 일자리가 직업세계의 가장 아래에 있음을 멋대로 공표한다. 최저임금은, 직업을 수직적으로 구분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이 소득격차에 의해 수직적으로 지나치게 벌려지는 걸 경계하기 위한 제도지만 안중에 없다. "그 일이 200만 원 이상 받아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면서 조롱한다. 최저임금을 받는걸, 개인 능력이 최저임을 증명하는 거라 생각한다. 최저니, 최저임금만 받아도 감사하라는 무례가 이어진다.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파업을 하자 한 정치인은 "조리사라는 게 별 게 아니다. 그 아줌마들 그냥 동네 아줌마들이다.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이 되어야 하냐"라고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연료와 같은 거다.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않냐"라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도 나부낀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으면 될 일이다"와 진배없는 수준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노동자가 숨졌을 때, 한 정치인은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글을 SNS에 올린 적이 있는데, 이런 세상 인식과 무엇이 다른가.
누군가는 하는 그 일, 그 일이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최저임금은 그걸 보장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인상으로 인한 이런저런 연쇄적 사회 반응이 걱정된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최저인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깝죽거리냐고 하면, 싸울 수밖에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