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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남성가족부를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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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남성가족부를 만들어라

[오찬호의 틈새] 이재명 정부, 구조적 성차별을 보려는 의지가 있나

성매매가 정당한 거래라는 비겁한 변명

성매매 여성이 왜 사회적 약자인지를 유쾌하고도 슬프게 풀어낸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분 5관왕을 하면서 나는 약간 편해졌다. 가끔씩 법정 의무 교육을 강의할 때, 권위 있는 상을 휩쓴 영화라면서 <아노라>의 내용을 곁들이면 사람들이 제법 집중하기 때문이다. 오스카의 명성을 빌려 설득하는 게 좀 처량하긴 하지만 이 교육이 직장인들이 너무나 지루해하는 성희롱, 성매매, 성폭력, 가정폭력 예방 교육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고맙다.

성매매 예방 교육의 결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남성들이 어떤 논리에 기대 성을 구매하는 것을 정당화하는지를 짚으며 접근하다. 이게 설문조사나 인터뷰로 정교하게 드러날 성질이 아니기에, 온갖 자료들을 융합하고 클릭할 수 있는 모든 커뮤니티를 파헤쳐서 가설 수준에서 논의를 이어 나가야 한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정당한 거래를 하고 있다는 논리다. 돈을 내는 만큼 서비스가 오가는 과정이 투명하고, 어떤 폭력도 없는 행위자 간의 합리적인 선택일 뿐이라는 입장이 제법 많다.

영화 <아노라>는 마이키 매디슨이 연기한 '애나'의 당당하지만 취약한 삶을 조명하며 정당한 거래라는 논리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짚는다. 전반부에서 주인공 애니는 성매매 노동자로서 당당하고 유쾌하다. 그러다 방탕한 재벌 2세의 괴상한 꼬임에 넘어가 '그걸 진짜 사랑이라 착각하고' 결혼까지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몸이나 파는 인간과의 결혼은 있을 수 없다는 남자 부모의 훼방은 집요했고 결국 애나는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처참히 느끼며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다. 베이커 감독은 이 처절함을 별다른 영화적 과장 없이도 극대화해 여운이 깊게 남는 엔딩을 보여주는데 탁월하다.

정당한 거래? 그게 가능할까? 정당한 거래라는 논리는 상호 합의라는 측면을 강조하지만, 한쪽의 상황은 다르다. 경제적 제약, 사회적 낙인 속에서 선택지가 찌그러진 이들의 현실은 끔찍하다. 만신창이가 되어 거적때기로 살아가면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무엇을 하든, 더러운 일 했던 사람 취급을 받을 애나는 앞으로도 음지에서 살아갈 거다. 먹고살기 위한 거래이기에, 별수 없이 용기 내면서 말이다. 이 야무진 모습, 인간의 진솔한 당당함이겠는가. 아카데미가 이 영화에 작품상을 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거다. 그 사람 '어떤'지 묻지 말고, '어찌' 사는지 보자는 거다. 편견을 덕지덕지 붙이고선 불평등의 결이 제대로 안 보인다는 거다.

실제로 성 구매자들, 그러니까 남성들이 성 판매자를 정당한 거래의 파트너로 존중하는 것도 아니다. 정당한 거래라는 말은, 과거처럼 인신매매로 끌려와 짐승 대우를 받는 여성을 착취하는 나쁜 사람은 아님을 증명하려는 본인 변명 용도로 사용될 뿐이다. 그리고 여성을 향해 묻는다. 끌려오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런 일을 하냐고. 그 끝에 성 판매자는 '본인 좋아서 몸 판 주제에' 불과한 납작한 인간이 될 뿐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능동적으로 성을 판매하려고 했다면 다 처벌 대상이다. 직업 브로커에게 속아 엄청난 빚이 발생하고, 브로커는 당장 돈 갚으라며 성매매를 소개해 주고, 그렇게 일하다 적발되어도 동료와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바꾼다거나 또는 단골에 대해 호의적인 기록을 남긴 흔적만 있어도 성을 판매한 죄가 성립된다. 정상 참작이라며 기소유예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어쨌든 죄는 있다는 거다. (북유럽 일부 나라에서는 성 판매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 '노르딕 모델'을 채택한다. 그 행위가 무결하다는 게 아니라, 판매자 지지고 볶은들 유의미한 감소가 생기지 않아서다.)

정당한 거래라면서 본인 행동의 범죄성을 희석시킨 구매자들은, '돈 쉽게 벌려는 주제에'라는 추임새를 만들어가며 성을 구매한 찝찝함을 완벽히 중화시킨다. 남성들은 자신과 판매자가 동급의 도덕성을 지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는 편하게 돈 벌려는 게으르고 나쁜 여성이지만, 자신은 딱 이 순간을 제외하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남성의 성 구매행위는 평소 열심히 일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의 가벼운 일탈로 규정된다. 눈감아줘도 되는 남자의 사회생활 정도로 말이다.

자, 여기까지 왔다면 성매매 예방 교육은 넓은 바다로 향할 수밖에 없다. 문화 안에, 특히나 남성들의 커뮤니티 안에는 이런 논리가 어떤 식으로든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릇된 합리화가 일상 속에 어떻게 잠재되어 있는지를 늘 성찰해야지만 성을 구매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지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면 그 빌어먹을 수요와 공급도 어그러지지 않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면, 왜 성매매 예방 교육이 의무 교육이란 말인가.

남성들의 불만을 신경쓰고 있느냐고 묻는 대통령

하지만 강연장은 술렁인다.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했다"라는 말이 여지없이 등장한다. 영화 <아노라> 때문에 더 집중하고 들었는지, 더 집중해서 화를 낸다. 내겐 익숙한 일이다. 잠재적 가해자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뭐 그렇게 들린다면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뜻은 "당신, 범죄자야!"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 흐르는 괴상한 공기에 관한 질문임을 아무리 친절하게 말해도 늘 이렇다.

저 말은 '자신에게 남성 문화의 성질이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정도의 성찰적 비유다. 발견하고 제거할수록 실수할 여지도 준다.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현명한 솔루션이라는 거다. 다행이고 기쁜 일 아닌가. 하지만 화부터 낸다. 이미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이다. 여성의 고충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런 남자는?"이라고 묻는 게 대단한 논리처럼 부유하는 세상이기에 놀랍지 않다. "여성가족부는 있는데 남성가족부는 왜 없냐" 따위의 말은 얼마나 진지한가.

그러니 대통령조차 무려 국무회의에서, 그것도 여성가족부 차관에게 "남성들이 불만을 가진 이슈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냐"라는 황당한 질문을 건넨다. 왜 황당한가. 전 세계에 그런 부서는 남성 건강에 관심을 가진다거나, 이혼 후 양육권과 육아 등에 관한 여러 문제에 관해 고충을 해결하는 정도로 존재한다. 대통령은 "여성가족부가 아닌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개편해서 폭넓게 그런 것들을 보려고 해서"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그래서 남성의 불만을 언급한 거라면, '여성가족부만 있고 남성가족부는 없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 아닌가. 남성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감이 가볍다는 게 아니다. 성차별을 해결하겠다는 정책과 맞물려 논의될 성질이 아니라는 거다. 성차별을 줄이려는 정책을 고민할 때마다, "그럼 남자들 역차별은?"이란 물음을 넘어가야 한다면 어떤 정책도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거니까 말이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달 28일 언론 인터뷰에서 아직 구조적 성차별은 존재하니 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겠다는 좋은 뜻을 전하면서, "왜 하필이면 (부서 이름에) 여성이냐, 우리가 성평등을 추구하는 거지 여성만을 위해서 어떤 정책을 하는 건 아니"기에 명칭을 변경한다는 이유를 굳이 덧붙였다. 성별이나 성적 지양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고려해서 '여성만'이라고 표현했겠는가. 곳곳에 떠도는 '왜 여자에게만 혜택을 주냐'는 말 따위에 엄청 눈치 보고 있음을 드러낸 거에 불과했다.

기자가 여성의 차별에 관심을 가지면서 남성이 겪는 역차별도 신경 쓰겠다는 뜻이 무엇이냐면서 사례를 말해달라고 하자, 여지없이 공무원이나 초등학교 교사의 성별 차이를 꺼낸다. "왜 그 직종에 여성들이 몰렸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구조적 성차별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그 간단한 걸 고의적으로 비껴간다. 어떤 직종에서 남성은 차별받으니 마찬가지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도돌이표처럼 말한다.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성차별을 논할 때마다 삐죽삐죽 들이밀면서, 여성이 겪는 구조적 차별을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가? 솔직히,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 중요하다'는 말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아 실망스럽다. 당시 이재명 후보는 한 마디만 삐끗하면 큰일 나니 잘 정리해달라는 식으로 기자들을 향해 농담을 했는데, 이런 소극적인 태도가 앞으로 치고 나아가야 하는 성평등 어젠다를 두루뭉술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왜 모를까.

과감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성차별이 보이고 궁극적으로 남성들의 고충이 어떤 원인으로 야기된 것인지도 드러날 수 있다. 산업재해, 자살률, 심지어 고독사까지 남성의 비율은 압도적이다. 그 배경에,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문화적 기운이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남성의 전투적 기질을 좋아하는 일터에서는 노동자의 안전을 외면했다. 삶이 전투가 되니, 위기가 왔을 때의 절망감은 엄청날 거다. 그래서 스스로 죽고, 숨어서 죽는 날을 기다린다. 남자를 괴롭히는 그 성별 고정관념을 비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페미니즘이 하고 있다.

이러다가 다음 국무회의에서는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 정책은 아닌지 고민하라"면서 여가부 장관을 다그칠지도 모르겠다. 그런 질문 들어가며 우회하고 우회해 나올 정책은 맹탕일 거다. 차라리 남성가족부를 만들어서 일을 시켜라. 초대 장관으로, 젊은 정치인 한 명이 떠오르는데 이름을 말하긴 싫다.

▲이재명 대통령이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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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민낯들>(2022),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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