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하버드 대학교가 트럼프 정부의 대학 운영 관련 요구 사항에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미 교육부는 하버드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을 동결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한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에 육박하는 기금을 보유하고 있는 하버드가 트럼프 정부의 압박에 입장을 바꿀지 미지수다.
14일(이하 현지시간) 미 교육부는 '반유대주의 퇴치를 위한 합동 태스크포스'(Joint Task Force to Combat Anti-Semitism)가 성명을 통해 "하버드 대학교에 대한 다년 간 보조금 22억 달러와 계약 금액 6천만 달러를 동결한다고 발표했다"고 전했다.
이 TF는 성명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한 배경에 대해 "최근 몇 년간 캠퍼스를 괴롭혀 온 학습 방해와 유대인 학생들에 대한 괴롭힘은 용납할 수 없다"며 "명문 대학들이 납세자의 지원을 계속 받으려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이 금액과 관련해 미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이날 동결 금액이 "하버드가 받는 연방 기금 90억 달러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신문은 "70억 달러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보스턴 어린이병원, 데이나-파버 암연구소를 포함한 보스턴과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하버드와 제휴한 11개 병원에 지원된다. 나머지 20억 달러는 우주 탐사, 당뇨병, 암, 알츠하이머병, 결핵 등을 포함한 하버드 연구비로 직접 지원됩된다"며 "자금 동결이 어떤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보도했다.
앞서 지난 202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 군사 충돌이 벌어진 이후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급증하자 컬럼비아 대학교, 뉴욕 대학교, 예일 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등 미국 내 학교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가 일어났다. 하버드에서도 시위가 열렸는데, 학교 측은 이 시위에 참가한 13명의 학생들이 대학 정책을 위반했다면서 학위를 수여하지 않겠다고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후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지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주요 대학들이 유대인 학생들을 보호하지 않았다면서, 대학들에 반유대주의를 퇴치하고 다양성 관행을 없애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원금을 볼모로 학교를 압박하고 있는 트럼프 정부가 학교의 채용, 입학, 커리큘럼과 관련한 요구를 하고 있다면서, 구체적으로는 정부와 채용 정보를 공유하고 각 학과의 "관점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외부 기관을 유치하는 것이 포함된다고 전했다. 일례로 트럼프 정부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중동, 남아시아, 아프리카학과에 대한 새로운 감독 기관 설치를 요구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이같은 요구에 대해 앨런 가버 하버드 총장은 14일 사퇴를 거부하며 밝힌 메시지에서 11일 백악관 측이 정부와 재정 관계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요구 사항 목록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여기에는 학생과 교수진, 직원의 견해와 함께 학업 프로그램 및 학과에 대한 감사, 대학의 거버넌스 구조 및 채용 관행 변화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가버 총장은 "하버드나 다른 어떤 사립대학도 연방 정부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정부의 요구 사항이 "하버드의 지적 환경을 규제하려는 직접적 개입"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정부가 추진하는 변화가 "법에서 벗어난 것"이었다며 "대학은 독립성을 포기하거나 헌법상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어떤 정부도 사립대학이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누구를 입학시키고 채용할 수 있는지, 어떤 연구 및 탐구 분야를 추구할 수 있는지를 지시해서는 안된다"라고 덧붙였다.
하버드 측은 홈페이지에 게재한 입장문에서 "가버 총장은 하버드가 반유대주의와 싸움에 여전히 전념하고 있으며, 지난 15개월 동안 시행된 일련의 캠퍼스 조치를 상세히 설명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하버드 대학교가 인종 차별을 고려한 입학 제도를 폐지한 대법원 판결을 준수했으며, 하버드 대학교의 지적 및 관점 다양성 확대를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하버드 측의 윌리엄 A. 버크, 로버트 K. 허 변호사 역시 행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하버드는 모든 구성원의 경험을 개선하기 위해 대학이 해왔고 앞으로 할 계획인 것에 대한 논의에 열려 있다"면서도 "하버드는 이 정부든 다른 어떤 행정부든 합법적 권한을 넘어서는 요구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버드의 이번 결정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하버드는 교내 정책을 변경하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을 거부한 미국 내 최초의 주요 대학"이라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신문은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존경하는 저명한 보수 법학자인 마이클 루티그 전 연방법원 판사가 "이것은 미국의 여러 기관들을 향한 대통령의 광란에 있어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하버드는 대통령의 분노를 두려워하는 전국의 다른 대학들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며 "일부 평론가들은 하버드의 결정이 로펌, 법원, 언론 그리고 백악관의 다른 탄압의 표적 대상들이 반격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하버드는 2024년 기준 532억 달러의 기금을 보유하고 있고, 8명의 미국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다. 신문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오래된 대학교인 하버드는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깨어있는' 이념을 몰아내려는 트럼프 행정부 시도에 가장 요주의 대상"이라고 진단했다.
신문은 "하버드와 행정부의 싸움은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가 원하는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자 추방 정책 및 '미국 우선주의'의 핵심 실세 역할을 하고 있는 밀러 부비서실장이 대학 압박의 선봉에 서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고등 교육에 대한 자유주의 지배를 깨뜨리려는 정부의 노력 속에 하버드는 중요한 표적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공화당 내에서 하버드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버드 졸업생인 뉴욕 출신 공화당 하원의원 엘리스 스테파닉은 "하버드가 고등 교육의 도덕적, 학문적 부패 전형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당연하다"라며 "설립 모토인 '진실(Veritas)'을 지키지 못한 이 대학에 대한 미국 납세자의 지원을 완전히 중단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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