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운명>(임레 케르테스, 유진일 옮김, 민음사)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1929~2016년)는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 헝가리에서도 그다지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다.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헝가리 왕국의 부다페스트에서 목재상을 하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5살 때 부모가 별거한 후 기숙학교에 들어갔고 유대인 박해가 시작돼 14살의 나이에 악명 높은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독일의 패전과 함께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석방되어 부다페스트로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가, 번역자로 일했고, 특히 니체,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등 독일어권 작가 다수의 작품을 헝가리어로 번역해 소개했다.
인용한 소설은 13년의 집필 기간을 걸쳐 1973년에 완성한 첫 소설 <운명>이다. 당시 헝가리 공산 정권에 의해 출판이 막히다가 2년 뒤에 출간되었다. <운명>은 작가의 수용소 체험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2005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어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청산> 등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했다. 앞의 세 작품까지를 '운명 3부작' 또는 네 작품을 포괄해 '운명 4부작'이라 한다. 홀로코스트 3부작으로 명성을 얻어 많은 상을 받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14년에 헝가리 최고 훈장인 성 이슈트반 훈장을 받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중에 경제적 도움이란 말이 들어 있다.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후 어려운 삶을 겪으며 그 기억에 기반한 글을 써서 뒤늦게 문단에서 인정받았기에 오랜 기간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14년 소년이 수용소에 끌려가 노인이 돼 나온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중산층 유대인 부모 아래에서 평범한 유년을 보내던 14살 소년 죄르지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낀다. 노란색 별을 가슴에 붙이고, 생필품 배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고,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아버지가 가족을 떠난 것이다. 전체 9장으로 구성된 소설에서 1장은 아버지와 헤어지는 장면이다. 노동 봉사에 소집된 아버지를 일가친척이 모여 마지막으로 식사하며 이별하는 의식을 치른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자 아빠가 나를 와락 안더니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힘껏 끌어안았다. 이 때문인지, 그저 지쳐서인지, 아침에 가장 먼저 새엄마가 내게 한 요청 때문에 내가 어느 순간엔가는 무조건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유야 어떻든 눈물을 흘린 것은 결국 잘한 일이었다. 아빠가 눈물 흘리는 내 모습을 보고 흡족해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아빠가 가서 자라며 나를 들여보냈다. 나는 무척 피곤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최소한 그날 하루만큼은 불쌍한 아빠가 좋은 기억을 가진 채 노동 수용소로 떠나게 한 듯싶다."
다음날 떠난 아버지는 영영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2~8장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과정과 그곳의 생활을 그렸다. 유대인 소년들에게 할당된 공장 노동에 징집된 죄르지는 어느 날 공장으로 가던 버스에서 끌려 나와 감금된다. 갑작스러운 연행에 이어 가축우리를 방불케 할 수용소행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아우슈비츠였다. 그러나 그때는 처음 들어본 낯선 지명에 불과했고 소년은 다행히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지 않았다. 거기서 하차하지 않고 부헨발트 수용소로 간다. 부헨발트와 차이츠 수용소를 오가며 매일 도처에 도사린 죽음과 맞서 싸운다.
수용소의 비참함과 잔혹한 노동,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소년은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견뎌 내는 법을 익힌다. 죽음에서 삶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족한 식량을 아껴서 먹고, 살인적 노동을 기계적으로 해내고, 그곳을 지배하는 폭력적인 규칙에 순응하면서 삶을 사는 것에만 집중한다.
소년은 1944년 수용소에 들어가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부다페스트 거리로 돌아온다. 그사이에 자신이 노인처럼 변해 버렸다고 느낀다. 마지막 9장은 부다페스트로 복귀한 그의 심정을 그린다.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야겠다. 그가 마지막으로 품은 각오였다. 인용문은 9장에 나온다.
야만적이고 제멋대로인 역사에 맞선 개인의 취약한 경험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작가가 가장 비인간적인 공간 속에서 가장 존엄한 인간성을 모색한 기록이다. "야만적이고 제멋대로인 역사에 맞선 한 개인의 취약한 경험을 지켜 내려 한 작가"라는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 드러나듯 <운명>은 자신의 홀로코스트 생존 경험을 의미 있는 울림으로 전환해 현대인에게 전한다.
<운명>과 '운명 4부작'은 아우슈비츠 자체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우슈비츠 너머를 사유한다. 익숙한 세계에서 쫓겨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최악의 수용소에 던져진 소년의 시선으로 가장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임을 주장하기 위해선 어떠해야 하는가를 모색한다.
작가의 관점이 특별한 것은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분노에 가득 차 고통만으로 기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족과 인내를 통해 운명을 받아들이는 다른 방식의 성찰은, 빅터 프랭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프리모 레비 등 많은 '수용소 문학' 중에서 케르테스 작품의 특징이다. 그러나 작품을 이해하면서 소년 죄르지의 차분한 고백을 오독하지는 말아야 한다. 작가의 강렬한 체험을 그대로 반영한 직설적 고발이 아니라, 애써 담담하게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한 기술을 통해 독자에게 피상적인 판단을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용문은 정독해야 한다.
'강제 수용소의 행복'을 말한 이 놀라운 결말의 강조점은 그러나 행복이 아니라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에 대해 계속 물어야 하고 자신이 그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다. 작품의 원제는 '운명 없음'이다. 간결함을 위해 '없음'을 떼고 '운명'으로 제목을 삼은 듯하다. '운명'을 인간이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운명 같은 건 없다고 믿는 건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행복을 말하는 기이한 풍경은, 양키식 유머의 유대교적 심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세상은 그것을 물어야 하고, 그 일은 겪은 '나'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기억해야 한다는.
작가는 이 기억을 안고 살았다. 기억으로 글을 썼다. 고통과 대면하는 이런 글쓰기가 있을진대, 작가가 마지막에 한 말을 곱씹으면 우리가 역사에서 붙들고 기억해야 할, 정확하게 기억해야 할 기억은 얼마나 많은가. 기억은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2002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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