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결론이 나 있는 과거의 사건을 영화화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조훈현과 이창호, 세기의 대결, 1990년대에 바둑을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각종 언론과 광고를 잠식했던 두 사람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스승을 제압한 제자, 청출어람을 넘어서 제자가 스승에게 압승하는 풍경은 그 자체로 드라마였으며 많은 이들을 흥분케 한 사건이었다. 30년이 흐른 뒤, 우리 앞에 도래한 <승부>(2025)는 1990년대의 세기 대결을 '승부'라는 타이틀로 현재화하며 동시대 관객들에게 어떤 말을 건다. 표면적으로 그 '말'은 조훈현 9단(이병헌)의 견습생 초년 시절, 스승으로부터 건네받았던 바둑판 뒷면을 통해 전달된다. "바둑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세상은 그들을 두 사람의 대결이라 평가했지만 영화는 대결이 아닌 자신과의 승부로 해석한다. 승부는 이기고(勝) 지는(負) 상황에 집중한다. 반면 대결은 마주한(對) 상태에서 우열이 가려지는(決) 상황에 집중한다. 승부의 세계는 단순하다.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을 뿐이다. 반면 대결은 두 사람의 승부가 결국 두 사람을 분열시키고 우열을 판단한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바둑은 흑과 백, 나와 상대(相手), 선명하게 그어진 대당관계 속에서 모든 관계를 승자와 패자로 갈라치는 잔혹한 세계다. 승패를 넘어 진정한 대결의 맞상대는 결국 나라는 진실, 이는 단연 바둑의 세계에만 해당하지 않고 우리의 삶이 전개되는 일상에도 적용된다는 깨달음을 <승부>는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럼에도 조훈현과 이창호(김강훈/유아인),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라는 사실은 극의 긴장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준 가르침을 제자가 어떻게 수용하고 거부하며 성장하는가 목도하는 것이야말로 <승부>의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우리는 스승과 제자라는 위계질서, 그 사이의 전복을 사유하게 된다. 한때 스승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의문과 반론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것이라서 이에 저항하면 반드시 그 대가로 합법적 폭력이 자행되었다. 스승의 폭력은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행위였고 폭력을 행하는 자도, 당하는 자도 그 폭력에 감사해야 했다. 부조리한 시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그 어떤 일말의 폭력도 허용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이유 없이 담임 선생에게 뺨을 맞았던 억울한 기억이 남아 있는 필자에게 비폭력이 강조되는 문화가 확산한 것이 감사하다. 하지만 폭력을 종식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교권의 추락으로 이어졌다면, 가르침을 통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이 더는 존재할 수 없는 조건 속으로 시스템이 무너져 내렸다면, 이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적 사태일 것이다. 30년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스승과 제자의 한판 승부라는 극적 상황을 2025년의 우리가 굳이 목도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창호는 조훈현과의 대결에서 승리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안해한다. 이긴 대상이 스승이란 점을 떠올린다 해도 영화 속에서 표현된 이창호의 죄책감은 조금 과하다 싶다. 시종일관 삐죽 나온 입, 웃음기 없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일관하는 유아인 배우의 연기도 한몫한다. 이창호는 승리 후 자신의 죄책감에 대해 "좋지 못한 바둑으로 이기게 되어서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기자에게 고백한다. 이창호가 경기를 좋지 않다고 평가한 기준은 전적으로 조훈현에게 있다. 조훈현은 끊임없이 기본기를 강조한다. 그는 천재를 믿지 않고 운을 바라지 않는다. 모든 승부의 결과는 전적으로 노력의 결과다. 반면 이창호는 조훈현의 기본기 강조에 한없이 답답해한다. 그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고 싶고 그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조훈현 때문에 힘들어한다. 물고 뜯고 싸우고 덤비는 것이 바둑이라 생각한 조훈현과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고 여긴 이창훈의 세계관 차이는 절대 교접할 수 없다. 이를 이창호 또한 모를 리 없다. 그는 어릴 때부터 승리의 쾌감을 즐기는 자였고 상대가 누구든 이기는 게 프로의 의무라는 조훈현의 말을 믿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경기를 '좋지 못하다'고 평가한 것은 모순적이다. 조훈현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 애썼고 스승의 바둑을 복기하며 철저히 승리를 준비했던 그가 스승을 이긴 그 '재미'를 부정하고 죄책감을 품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과도한 영화적 설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창호의 죄책감은 현실 속 '이창호'로부터 빌려온 감정이다. 1990년대, 조훈현과의 대국들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스승을 이긴 미안한 마음을 품었었다. 이 감정이 그 당시에는 스승의 권위를 넘어선 자가 응당 품어야 하는 도덕적 감정 정도로 치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스승을 이겼으니 제자로서 미안한 마음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는 심리, 제자는 절대 스승의 권위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전재를 바탕으로 심긴 감정이다. 현실 속 이창호에게 이러한 감정이 없었다고 부정할 수 없다. 이창호는 스승으로서 조훈현을 존경하며 따랐었다. 특히 그가 살았던 시대는 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된다고 가르침 받던 시대 아니었는가. 분명 1990년대 이창호의 죄책감엔 조훈현이라는 개별자가 아닌 '스승'을 이겼다는 사실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2025년, 스크린 속에 투영된 이창호의 죄책감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창호는 죄책감을 품으면서도 조훈현과의 대결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서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조훈현의 가르침으로 그의 승부욕을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영화는 스승을 이기고 싶다는 이창호의 읊조리는 듯한 고백을 굳이 삽입한다. 승리에 대한 강렬한 염원과 스승을 이긴다는 불충 사이에서 발생하는 극적 긴장을 위한 장치이겠으나 이로 인해 2025년의 관객들은 이창호의 승리를 향한 세속적 욕망을 더 이상 세속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승부>가 전달하려는 승부의 진정한 의미는 대결하는 두 존재가 서로의 계급장을 뗀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승부의 대상을 맞수가 아닌 나의 내면에서 탐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선 두 사람의 계급적 위치를 유연하게 봐줄 수 있는 사회적 시선이 동반되어야 한다. 만약 이 영화가 1990년 당시에 만들어졌다면, 우리는 여전히 '스승을 이긴 제자'라는 한계 속에서 이창호의 죄책감을 해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위계질서가 무너진 현재에야 비로소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결이 재해석 될 수 있는 여유를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2025년의 우리가 이창호의 죄책감을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은 그가 진심으로 조훈현의 바둑 스타일을 존중하고 그것이 '좋은' 길이라고 믿었다는 것뿐이다. 적어도 영화 속 이창호는 조훈현의 가르침을 스승이기 때문에, 그 절대적 권위로 인해서 좋은 길이라 평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조훈현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승화한 존재다. 어쩌면 <승부>는 조훈현 보다 이창호의 태도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제자로서가 아닌 함께 바둑판에 앉은 맞수로서 상대의 방법론을 깊게 연구하고, 존중하고, 그 가르침으로부터 다른 길을 가게 된 자가 품는 도의적 감정. <승부>는 분명 이창호의 죄책감을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하길 요구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창호가 좋은 길이라 평가한 조훈현의 가르침에 집중해야 한다. 조훈현에게 바둑은 곧 희생을 동반한 전투였다. 삶의 궤적 속에서 마주했던 그의 경험들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가 바둑을 치열한 생존 게임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영화는 깊이 다루지 않는다. 대신 바둑에 대해 두 번 화를 내는 순간으로 그에게 바둑은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한다. 조훈현이 이창호에 대해 가장 치를 떨었던 순간은 그를 천재로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볼 때였다. 그 말들이 이창호를 교만하게 만들어 바둑을 가볍게 여길지 모른다는 노파심이 분노를 이끈 것이다. 이는 자신을 불러다 놓고 바둑을 '그깟 돌 놀이'라 폄하하는 자본가를 향한 분노와 사뭇 닮아있다. 그는 바둑이 한낱 돈벌이 수단이 되는 것도, 특별한 능력자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도 거부한다. 오히려 모든 수(手)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철저한 모더니스트에 가까웠다. 그는 매 수마다 흑과 백의 입장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창호가 자신의 능력에 자만하지 않도록, 세상에도, 나의 능력에도 안주하지 못하도록 제자를 이끌었다. 어쩌면 이창호가 좋은 길이라 평가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창호가 언급한 조훈현의 좋은 길을 공격과 수비라는 공통 분모 없는 각자의 바둑 스타일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면 우리는 둘 중 하나에 더 가치를 둘 수밖에 없다. 바둑에는 정도(正道)가 없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이창호가 자신의 스타일보다 조훈현의 스타일이 더 좋다고 평가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수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스승에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며 조용한 목소리로 항변했던 이창호였다. 그는 조훈현이 강조한 바둑을 대하는 자세, 모든 수를 꼼꼼히 따져보고 계산하고 자신의 선택에 자만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함을 배웠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한 존재의 가치관을 배운다는 것은 그 존재의 세계를 직접 온몸으로 경험해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 스승조차도 모순으로 가득한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그 모순 전체를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스승의 가르침은 온전히 제자의 것이 될 수 있다. 이창호는 그 큰일을 결국 수행해 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청출어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결과 아닌가!

배움을 위해 스승의 집에 들어가 문자 그대로 '문하생'이 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물론 문하생이란 이름으로 제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던 부조리한 시대를 기억한다. 군사부일체라는 말 속에 담긴 권위주의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좀먹었는지 지금까지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만약 <승부>가 제시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상적 관계가 가능하려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스승의 세계를 존중하고 그 가르침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제자의 태도와 제자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할 자세가 되어 있는 스승의 태도가 모두 공존해야 할 것이다. 교육이 계급상승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 현 시대에서 과연 진정한 배움과 가르침은 존재할 수 있을까? <승부>를 보고 나니 그 이상적 관계가 더욱 그리워진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