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미국 국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오랫동안 워싱턴의 정책 의제는 연줄이 좋은 특수 이익집단들에 의해 결정되어 왔으며, 이들은 성실히 일하는 평범한 미국인들의 경제적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해 왔습니다. 그러나 2024년 11월 5일, 미국 국민은 분명한 목소리로 실패한 자유주의적 현상 유지를 거부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은 우리나라를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에 서게 했습니다. 이제 그 여명의 빛 속에서 우리는 이미 번영하고 활기차며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임금님으로 모신 '용비어천가'로 손색없을 글이다. '트비어천가'라 불러도 좋을 이 글은 누가 썼고 그 출처는 어디일까?
헤리티지 재단의 '2025 경제자유 보고서'
놀라지 마시라. 국내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이 미국 최고의 싱크탱크(think tank)라 칭송해 마지 않는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 회장인 케빈 로버츠가 쓴 글이다. 얼마 전 재단이 공개한 <2025 경제자유지수 보고서(2025 Index of Economic Freedom)>, 그 중에서도 서문의 첫 번째 문단이다.
이 정도 정치성향이라면 '극우(far right)'로 분류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단체라 할 수 있다. 이런 성향의 재단이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순위가 몇 계단 떨어진 모양이다. 언제나처럼 한국 언론들은 앞다투어 경쟁하듯 대서특필을 해댄 바 있다.
韓 노동시장 자유도 13계단 추락 … 주52시간-최저임금이 '발목' <동아일보>
경총, 美 헤리티지 재단 보고서..韓 노동시장 항목, 20년 넘게 '부자유'등급 <매일경제>
韓 노동시장 자유도, 세계 184국 중 100위 … 美 헤리티지재단 평가 <조선일보>
경총 "한국 경제·노동자유 퇴행 … 기업 경쟁력에 악영향" <아주경제>
[사설] 韓 노동시장 자유도 참담, 미래산업 숨쉬기 어렵다는 뜻 <헤럴드경제>
[사설] "경직된 노동시장에 韓 경제 발목" 美 싱크탱크의 경고 <서울신문>
<인사이드경제>는 대체 이 보고서에 뭐라 적혀 있는지 궁금해 재단 홈페이지를 찾아 내용을 살펴봤다. 영어로 된 두꺼운 자료라서 우선 급하게 'korea'란 단어로 검색해봤다. 점수와 순위표에 등장하는 것 말고 한국에 대해 별도로 평가한 내용은 매우 짧았다.
가장 큰 부정적 평가항목은 '정치적 스캔들과 부패'
내용을 검토하면서 또 한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내 언론이 언급한 '노동시장 자유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최저임금이나 주52시간 관련 지적도 전혀 없었다. 팩트체크를 위해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기로 한다. (번역은 ChatGPT와 함께 작업했음.)
한국의 경제자유지수는 74점으로, 2025년 경제자유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에서 세계에서 17번째로 자유로운 경제로 평가되었다. 이 평가는 작년과 거의 변동이 없으며, 아시아-태평양 지역 39개국 중 5위에 해당한다. 한국의 경제자유지수는 세계 평균 및 지역 평균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2025년 지수 기준으로 "거의 자유로운(mostly free)" 경제로 분류된다.
한국은 법치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견고한 법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스캔들과 부패 문제는 여전히 정부의 신뢰성과 경제 자유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국제 무역에 대한 개방성을 적극 활용한 경쟁력 있는 민간 부문에 의해 탄탄한 회복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현재의 정치적 혼란과 정부의 역할 및 복지 정책의 적절한 범위를 둘러싼 논쟁 결과에 따라 경제적 역동성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 헤리티지재단, <2025 경제자유지수 보고서 - 한국 평가>(☞자료 바로가기)
헤리티지재단이 가장 문제삼은 것은 노동시장이나 조세, 무역 분야가 아니라 혼란한 정치적 상황(current political turmoil)이었다. 즉, 윤석열의 계엄과 내란이 빚어낸 최근 사건들, 보수 양당을 가리지 않고 터져나오는 온갖 '정치적 스캔들과 부패 문제(political scandals and corruption)'가 핵심 이유라는 것이다.
오히려 보고서는 한국의 경제자유지수가 꽤 괜찮은 점수를 얻고 있으며, 시장주의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거의 자유로운(mostly free)' 경제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한국의 언론들은 어떤 자료를 참고 삼아 저 많은 기사들을 생산해낸 것일까.
ILO 회원단체 한국 경총의 보도자료
답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보도자료이다. 경총은 3월 10일 <美 헤리티지 재단 '2025 경제자유지수 보고서 - 한국평가' 주요내용>이라는 제목으로 자료를 배포했다. 보도자료에서 경총은 헤리티지재단이 12개 부문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경제자유지수'보다 12개 부문 중 1개에 불과한 '노동시장 자유도'를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헤리티지재단 보고서가 한국의 약점으로 지적한 것은 '정치적 스캔들과 부패'인데, 경총은 보고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 노동시장'을 경쟁력 저하 요인으로 명시했다. 헤리티지재단이 보고서에서 밝히지도 않은 내용을 적는 게 부끄러웠는지, 도대체 노동시장에서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재단 보고서에도, 경총 보도자료에도 등장하지 않는 "주52시간·최저임금이 발목"이라는 표현을 아예 기사 제목에 노출시킨 <동아일보>의 능력은 신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필시 헤리티지재단이나 경총이 표현하지 않아도 그 마음 속을 읽어낼 줄 아는 초능력자(!)가 아닐까.
해고 자유로워야 올라가는 '노동시장 자유도'
그렇다면 문제의 '노동시장 자유도(Labor Freedom)'는 어떻게 측정하는 것일까? 경총 보도자료에 따르면 "임금, 근로시간, 채용, 해고 등 노동시장 규제가 경직될수록 낮은 점수"를 받는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쉽게 해고할 수 있고, 노동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어야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데도 노동시장 자유도 점수가 낮아진 것을 과연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헤리티지재단의 채점 기준은 결사의 자유 협약, 노동안전 협약, 노동시간 협약 등 핵심적인 ILO(국제노동기구) 협약과도 충돌한다. 그렇다면 국ILO 회원단체이기도 한 경총은 자제했어야 마땅하다. 게다가 한국은 현재 ILO 이사회 의장국 신분 아닌가.
노동시장 자유도와 한쌍을 이루는 '기업환경(Business Freedom)'의 경우 한국은 무려 90점을 받아 최고 등급인 '자유(Free)' 수준으로 분류되었다. 경총은 보도자료에서 이런 사실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왜 Labor Freedom은 '노동시장 자유도'라고 번역하면서 Business Freedom은 '기업환경'이라 번역해 놓았을까?
경총 논리라면 문재인 정부가 최고 우등생
뭔가 점수를 매기고 순위가 정해지는 분석 보고서가 나올 경우, 정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올해 몇 점을 받았나', '전년 대비 얼마나 오르거나 내렸나'만 살펴선 안된다는 것이다. 1995년부터 무려 30년째 지속적으로 발간된 헤리티지재단 보고서라면 더욱 그렇다.

재단 홈페이지에서 한국의 '경제자유지수'의 연간 추이 그래프를 가져왔다. 지난 30년 간 점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경제자유지수는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내내 낮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문재인 정부가 취임한 2017년 처음으로 70점 대에 올랐으니 말이다.
한번 올라간 게 아니다. 2019년을 제외하면 문재인 정부 기간 내내 한국의 경제자유지수는 70점 대를 유지했다. 퇴임 시점인 2022년에는 역대 최고 점수를 기록했다.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경제자유지수는 오히려 낮아졌다. 경총 논리에 따르자면 역대 정권 중 문재인 정부 시절이 가장 바람직한 시점이었단 말일까?
노동시장 자유도 역시 문재인 정부가 최고점
경제자유지수만이 아니다. 재단은 홈페이지에서 경제자유지수의 12개 세부지표 각각에 대해 나라별로 연도별 추이를 그래프로 살펴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시장 자유도는 2006년부터 점수가 공개되어 있다. 이를 그래프로 나타내보면 아래와 같다. 재단 홈페이지에 공개된 한국 노동시장 자유도 수치를 그래프 아래에 표로도 구성했다.

놀랍게도 노무현 정부 시기에 매우 높은 점수(57.3~57.7)를 기록한 노동시장 자유도는, 이명박 정부 시기 최악의 점수인 40점대로 떨어졌다. 박근혜 정부 시절 조금씩 높아지던 이 점수는 경제자유지수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에 최고점(58.7)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 시기가 어떤 때인가? 2018년과 2019년에 한국 최저임금은 2년 연속 두자릿수 인상을 기록하던 해이다. 재벌은 물론이고 윤석열 정부까지 가세해 깨부수자 외치는 '주52시간제' 노동법 개정이 이뤄진 시점도 바로 이때이다.
그렇다면 경총은 이 문제에 한번 답변해보라. 최저임금과 주52시간제가 가장 강하게 발목을 잡은 시기에 왜 한국의 노동시장 자유도가 최고점을 찍은 것인가? 오히려 윤석열 정부 시기에 노동시장 자유도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최저임금 인상률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노동시간 규제도 풀어주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경총 주장대로라면 노무현·문재인 정부에게 우등상을 줘야 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겐 낙제점을 줘야 한다. 경총의 색깔은 대체 어느 쪽인가. 극우 정치성향의 헤리티지재단 보고서를 어떻게든 입맛에 맞게 끌어쓰려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