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이하 현지시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고위급 회담에서 미국이 제안한 30일 휴전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동의했다. 유럽 국가들도 환영의 뜻을 나타내면서 이제 공은 러시아로 넘어갔다. 러시아도 조속히 이에 동의해 일시 휴전을 거쳐 항구적인 평화의 토대를 만드는 데 호응해야 할 것이다.
3년을 넘긴 러-우 전쟁은 휴전과 종전 이후에도 많은 후유증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 바로 핵문제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기존의 핵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유럽만의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자체 핵무장이나 잠재적 핵 능력 확보 주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외교 전문가인 기드온 로즈는 3월 8일자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에서 "트럼프가 국제질서를 난폭하게 해체하면서 핵확산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그는 핵확산이 서방 진영이 "불량국가"로 지목해온 나라들이나 "테러집단"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동맹·우방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이 크게 후퇴하는 상황에서 여러 나라가 '자강'의 논리에 따라 핵무기 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취지이다. 그러면서 "자유주의 질서가 무너지면, 비확산 체제도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확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핵국가가 핵무장에 나서는 것인데, 이를 '수평적 핵확산'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는 기존의 핵보유국이 핵무장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를 '수직적 핵확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치면서 두 가지 가능성 모두 고개를 들 가능성이 제기된다.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 사태가 핵문제와 관련해 각별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양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겠냐는 판단에 기초한다. 이러한 판단은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러시아의 강대국 정치에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하루아침에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 되었다. 약 1900개의 전략 핵탄두와 2300개의 전술 핵무기가 이 나라의 영토에 남게 됐다. 핵무기의 면면도 가공할 만했다. 우크라이나는 당시 176기의 SS-19 및 SS-24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미사일 한 기에 6~10개의 전략 핵탄두 탑재가 가능했고 개당 폭발력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20배가 넘었다. 또한 44기의 전략폭격기 및 다량의 공대지 전술 핵미사일도 보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구소련으로부터 다량의 핵무기를 물려받은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스의 '비핵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쉽게 비핵화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국 내 핵 포기 반대 여론도 높았고 신생 독립국가로서 안보 및 경제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2년 11월에는 "가장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국가에 핵무기를 판매할 의사가 있다"고 말해 국제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그러자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들은 당근책을 제시했다. 비핵화된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하고 핵폐기 비용과 기술, 그리고 경제 지원을 해주겠으니 핵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밀고 당기기 협상이 거듭된 끝에 채택된 것이 바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이다. 1994년 12월에 우크라이나, 미국, 러시아, 영국 정상이 부다페스트에 모여 양해각서에 서명했는데, 그 핵심은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과 국경선을 존중하고 우크라이나의 영토적 통합과 정치적 독립에 반하는 무력 사용 및 사용 위협을 자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합의가 나오기 전부터 이를 경고한 학자가 있었다. 시카고대의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1993년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에서 "우크라이나는 재래식 무기로는 핵보유국 러시아를 상대로 자국을 지킬 수 없고, 미국을 포함한 어떤 나라도 우크라이나에 의미 있는 안전보장을 제공할 수 없을 것"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경고는 핵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강대국들의 전략적 목표에 묻혔다.

영국·프랑스가 유럽에 핵우산 제공?
미어샤이머의 경고가 나온 지 31년이 지난 오늘날 유럽에서는 '재무장' 결의가 강해지고 있고, 그 일환으로 유럽의 핵보유국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문제가 공론화되고 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의 핵 보호를 우리로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논의해보고자 한다"고 했고, 이에 대해 여러 유럽 국가들과 영국·프랑스 정부는 논의해볼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논의가 힘을 얻을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핵 능력을 크게 강화하려고 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핵무장을 선택한 데에는 미국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보다 앞선 1941년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가 이후 미국 주도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하지만 '특수관계'에 있다던 미국이 핵을 독점하려고 하자 영국은 자체 핵 개발을 재개해 1952년에 핵실험을 실시했다. 미국의 핵우산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고 여긴 프랑스도 1954년에 비밀 핵 개발에 착수해 1960년에 핵실험을 강행했다.
트럼프의 귀환을 계기로 대서양 동맹이 와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과거 영국과 프랑스가 품었던 미국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더욱 강하게 유럽 전체로 번지고 있다. 그런데 유럽은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1963년에 사를르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핵무기는 세계 평화의 핵심적인 보장책으로 남아 있지만, 미국 핵이 유럽과 프랑스와 관련된 모든 사태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며 자체 핵무장을 정당화했었다. 드골의 이 언명은 영국·프랑스가 유럽 전체에 핵우산을 제공하더라도 유사한 질문을 야기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로즈는 영국과 프랑스의 자체 핵무장 배경에는 미국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점을 환기하면서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영국과 프랑스를 계속 신뢰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여러 가지 난관이 도사리겠지만, 유럽의 일부 나라가 자체 핵무장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핵보유국인 영국·프랑스의 '수직적 핵확산'과 일부 국가들의 '수평적 핵확산'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유럽의 현명한 선택을
유럽이 중대 기로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약 8000억 달러에 달하는 방위비를 마련해 '재무장'에 나서겠다는 것은 대세가 되고 있고, 유럽 자체 핵우산 논의도 탄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이 유럽을 위한 것인지는 진지하게 자문해봐야 한다. 안 그래도 유럽에서는 극우화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막대한 군사비 책정이 경제 불안과 사회경제적 양극화, 그리고 복지 위기를 심화해 극우화에 멍석을 깔아줄 가능성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유럽은 불안의 눈초리로만 미러 간의 밀월을 볼 것이 아니라 기회의 측면도 봐야 한다. 트럼프가 핵군축과 국방비 대폭 축소를 미러 관계의 중요한 의제로 삼고 있고, 푸틴도 이에 호응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은 이럴 때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군축을 둘러싼 미러간의 물밑 흐름이 가시화되려면 유럽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유럽이 대규모의 군비증강에 나서면 미러 간의 핵군축과 군비 축소도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럴수록 유럽의 안보도 불안해진다. 이에 반해 미러 군축 협상이 탄력을 받으면, 유럽과 러시아는 '안정적이고 낮은 상태의 군사력 균형'에 도달할 수 있다.
2024년 기준으로 유럽연합(EU)의 군사비 총액은 러시아보다 4배가량, GDP는 10배 정도 높다. 유럽에 부족한 것은 군사력을 비롯한 '하드파워'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유럽이 상실한 것은 외교력이다. 냉전 시대와 21세기 초반까지 선보였던 독자적이고 갈등 해결 지향적인 외교를 상실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의 동진에 너무 쉽게 편승한 것이 오늘날의 화를 자초한 것이 아니냐는 자성이 필요한 것이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최근 신간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를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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