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원래 학부에서 한문교육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한국어교육과 한국문학을 전공했다. 필자가 한국어학과 교수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무조건 한글 전용론자인 줄 알고 대화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시대 같으면 우리말만을 썼을 수도 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 시대 경주로 간다면 과연 대화가 통할 수 있을까? 필자의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대화가 통하기는커녕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하늘만 보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시대에는 우리말이 성조도 있었고, 지금보다 경상도 사투리도 심했다. 그때는 신라의 중심이 경주였으므로 경주 방언이 표준어였다고 본다. 즉 왕이 사용하는 말이 표준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래된 경주 사투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향찰(향가)을 번역할 때 경주 방언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것도 상식인데, 경주 고어에 능한 학자가 별로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당시에는 우리 글자가 없어서 향찰이나 이두를 사용하던 시절이므로 현대인이 알아보지 못하는 말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참고로 향찰은 우리말이 전체계적인 표기수단을 말하는 것이고, 이두는 보조적인 표기수단으로 한문에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는 방법이다. 즉 향가는 향찰이라는 표기를 사용하여 우리말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고, 이두는 한문 문장에 조사(에(厓), 으로(乙奴) 등)와 어미(이다(是多), 하다(爲多) 등)을 표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타임 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 세종대왕 시절로 간다면 어떨까? 이번에는 조금은 알아듣기는 하지만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면서 중국어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세종 당시에만 해도 우리말에 성조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억양이 심하게 작용했다. 실제로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에 보면 ‘백셩(백성百姓)’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발음법을 표기해 놓았다. 그말을 그대로 읽으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백성’과는 전혀 다른 발음이 나온다. 예를 들면 ‘백(百)’을 읽을 때 “[ㅏ]에서 시작해서 [l]로 끝나도록(起於·而終於ㅣ) 발음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읽는다면 ‘바익’이라고 읽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셩’도 ‘시엉’이라고 읽도록 정해 놓았다. 그러므로 세종시대에는 ‘백성(百姓)’을 ‘바익시엉’이라고 쓰고 빠르게 발음하였다. 중국어 병음으로 보면 [bǎixìng]이라 쓴다. 실제로 필자가 한자로 칠판에 ‘百姓’이라 써놓고 중국 학생에게 중국 본토 발음으로 읽어 달라고 부탁하면 그들의 발음이 필자가 15세기 발음법으로 읽은 것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본 학생들은 모두 15세기에 이렇게 정교하게 발음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은 것에 관해 감탄하곤 한다. 혹간에 훈민정음이 한자어의 발음기호로 시작한 것은 아닌가 의문을 품는 학생들도 있다. 너무나도 중국음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의 말씀은 거의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나름대로 성조가 있어서 외국어를 듣는 듯한 기분도 들 것이라는 것을 말해 둔다.
다시 조선 말기나 대한제국 초기로 돌아간다면 우리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당연히 알아들을 수 있다. 지금처럼 성조는 거의 사라졌지만 서울 말씨가 표준어(당시에도 표준어라는 개념은 없었다)에 가깝기 때문에 현대인이 알아듣는데, 어려움은 별로 없을 것으로 본다. 다만 필자의 기억으로는 조부께서 편지를 쓸 때 반치음(△)과 아래 아(•) 자를 쓰시는 것을 보았다. 국어시간에 반치음이 조선시대 후반에 사라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1960년 대 초반에도 사용한 흔적이 있다. 그러므로 표준어는 상당히 중요하다. 초기 성서를 번역할 때 평북 방언으로 하여 알아보기 힘든 점이 많았다. 예를 들면 ‘가브리엘’을 ‘갑발열’, ‘세례’를 ‘밥팀례’, 아버지를 ‘아반’, 어머니를 ‘오맘’ 등으로 표기하여 어려움이 있다.
이와 같이 언어는 시대에 따라 항상 변한다. 현대에도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언어는 변하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으므로 바른 우리말을 쓰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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